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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Jan 08. 2023

"영원히 살면 뭐해?"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1993년 작품이니까 꽤 오래전 영화다. 당시 비디오 테이프로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코미디지만 스토리도 괜찮고 나름 메시지도 담겨 있다.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받을 정도여서 시각적 재미도 있다.   


<죽어야 사는 여자> 영화 줄거리(출처 : 네이버 영화)

1978년의 브로드웨이. 매들린(Madeline Ashton: 메릴 스트립 분)은 인기가 사라져 가는 뮤지컬 스타이다. 그러던 그녀에게 어렸을 적 앙숙인 헬렌(Helen Sharp: 골디 혼 분) 자기 약혼자 멘빌 박사(Ernest Menville: 브루스 윌리스 분)와 함께 나타난다. 매들린의 연기를 본 박사는 그녀를 한눈에 좋아하게 되었고 그런 약혼자가 헬렌은 못 미더울 뿐이다. 늘 남자 친구를 매들린에게 뺏겨온 헬렌, 결국 이번에도 박사는 매들린과 결혼하고 만다. 정신적 충격에 매일 매들린이 죽는 비디오만을 보던 헬렌은 비만이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매들린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고 그로부터 7년 후 매들린은 헬렌에게서 출판 기념 파티 초대장을 받는다. 처녀처럼 미끈해진 헬렌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매들린은 미용실에서 소개한 75살의 나이에도 젊고 아름다운 신비의 여인(Lisle Von Rhoman: 이사벨라 로셀리니 분)에게 큰돈을 주고 젊음의 묘약을 마신다. 한편 헬렌은 멜빈 박사에게 매들린을 죽일 음모를 얘기하고 집에 돌아온 매들린과 맨빌 박사는 다툼 끝에 그만 매들린을 계단밑으로 밀어내려, 숨지게 만든다. 그 후 헬렌에게 전화해 구원요청을 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이 삐뚤어진 매들린이 일어나 걷는 것이었다. 매들린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헬렌은 박사와 음모한 걸 큰소리로 떠들다 매들린에게 들켜 배에 총상을 입게 되지만 배에 큰 바람구멍만 뚫어진 채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매들린은 헬렌도 영원히 산다는 묘약을 마신 걸 알게 되고, 둘은 화해한다. 기적이 아닌 묘약 때문에 둘이 산 것임을 안 박사는 둘의 곁을 떠나려 하지만 헬렌과 매들린은 그를 신비의 여인에게 데려가 약을 먹이려 한다. 그러나 약을 거부한 박사는 그곳을 도망쳐 버린다. 37년 후 그의 장례식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위에 영화 줄거리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과 관련한 장면이다. 마시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약을 앞에 두고 멜빈 박사(브루스 윌리스)는 말한다.

"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아. 영원히 살면 뭐 해? 심심하면? 외로워지면? 장애인이 되거나 총에 맞으면?...다른 사람들은 다 늙잖아? 주변 사람들은 다 죽는걸 난 지켜봐야 하잖아? 이건 아닌 것 같아. 영원히 사는 건 꿈이 아니라 악몽이야"



인간은 영원불멸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부정, 즉 영원불멸의 꿈은 종교와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거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을 보수적으로 만들거나 소비욕구 자극한다는 견해도 있다.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 말이다. (공포관리이론). "죽음의 부정"에 대해서는 어니스트 베커의 동명의 책을 보시라. 다만, 끝까지 읽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 도전하시라.



아래와 같은 이야기도 있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쓴 한 단편 소설은 “인간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비밀의 강물”을 마신 로마 군인 마르쿠스 루푸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르쿠스는 불멸이라는 것이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곧 끝없이 살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해독제인 맑은 샘물을 찾습니다. 그것을 마시고 가시로 손을 긁자 죽을 수 있는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표시로 피 한 방울이 나옵니다. 마르쿠스처럼 우리도 때로는 삶의 내리막길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절망감을 느낍니다(시편 88:3). 우리는 죽음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가 갈라집니다. 마르쿠스와 달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사망을 이기셨으며 그것을 삼키고 승리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54). 우리에게 해독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요한복음 4:10)입니다. 그것을 마심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영생에 대한 모든 법칙이 바뀌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52).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절망을 모두 뒤집어 놓으십니다(히브리서 2:11-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과 주님과 영원토록 누릴 참된 기쁨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습니다.

출처 : <오늘의 양식, 2022.12.13>


같이 읽으면 좋을 필자의 글

https://brunch.co.kr/@ujuboygpqn/3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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