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7 용산CGV 시사회에서
"덧없음에 익숙해져야 해요"
화려한 도시 뭄바이.
영화는 뭄바이에서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여러 언어가 섞여 있고, 종이로 증명되지 못하면 없던 것으로 되어 버리는 듯한 도시.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빛이 있고, 희망이 있어 떠날 수 없는 도시.
그 안에 살려면 미쳐야 적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덧없음을 알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All We Imagine As Light (2024)
감독: 파얄 카파디아
주연: 카니 쿠스루티, 디비야 프라바, 차야 카담, 흐리두 하룬 등
상영 시간: 118분
2024 칸 영화제 그랑프리(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 이하 영화에 대한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빛
보는 내내 제목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할 정도로 도시를 채우는 조명들을 많이 보여준다는 것도 문득 깨달았다. 그 야경들이 때로 서울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동굴 안의 장면에서, 아누의 남자친구인 시아즈에게 빛이 쏟아지는 장면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에 하나였다. 프라바의 남편이 너무 많은 빛은 눈을 멀게 한다고 했다. 빛은 밝다고 마냥 좋은 것이 아닌 것이다.
제목이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것인 점도 마음에 들었다. 빛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어 나를 비춰 줄까?
호/불호
영화를 보기 전 친구에게 소개하기 위해 잠시 검색해보았을 때 영화에 대한 평이 양극으로 갈리는 것을 보았다. 지루한 영화라고 아주 싫어하거나, 많이 감명받아 꼭 봐야 한다고 추천하거나.
보면서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바닷물이나, 옆으로 기어가는 게의 모습이나, 눈이 시리도록 보여주는 야경, 아누와 파르바티가 춤을 추는 장면을 보며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은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을 불필요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내용이 없으니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은 당연히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사진과도 같은 장면들을 보며 온갖 것을 느끼고 채워지는 사람을 위한 영화가 아닐까.
뭄바이
뭄바이는 나에게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포그가 지나갔던 곳으로만 남아 있다. 덕분에 아직 봄베이라는 지명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도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고교 시절 선생님과 친구가 공통적으로 가장 좋았던 여행지로 꼽아서 더 궁금했다.
보기 직전까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도시를 처음으로 간접적으로 체험해서 좋았다. 여러 언어가 섞여서 사용된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프라바와 아누
나는 늘 프라바처럼 초연하기를 바라지만 늘 아누처럼 기대하고, 연연하기만 한다.
운명
프라바와 아누를 가르는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는 운명이다. 자신의 감정을 좇고 다른 것들은 잠시 뒤로 하는 아누에게 프라바는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음악
이 영화에서 장면만큼이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악이다!
초반에 거의 이어서 음악 두 개가 나오는데 그때부터 완전히 매료되었다. 결말부의 음악도 좋았다. 노래가 깔리는 부분만 모아서 다시 보고 싶은 정도이다….
노란 이어폰을 낀 소년
처음 파르바티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부터 이어폰을 낀 소년에게 자꾸 눈이 갔다.
조용한 마을 안에 들리는 비트는 소년의 이어폰 안에서 흘러 나온다. 뚱한 듯도 한 모습과 다르게 영업 시간을 묻는 프라바에게 얼마든지 있어도 좋다며 퉁명스럽지 않게 말한다. 변성기가 오지 않아 높은 목소리도 분위기를 환기해 주어서 좋았다.
소년의 가게를 덮고 있는 것도 여러 색의 조명들이 만든 또 하나의 빛이었다.
아, 무엇보다 좋았던 장면은 모여 있는 주인공들의 뒤에서 혼자 일을 하며 춤추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게 되었고, 그 모습에 영화의 기억이 더욱 좋게 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