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라는 제목의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글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작이 있는 영상물은 원작을 읽지 않으면 보기 싫은 병이 있어서 책을 구매하고자 했다. 도서관에서는 당연히 읽을 수 없었고, 번역본마저 품절이거나 한참이나 뒤에 도착한다고 했다.
성격이 급해서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원서가 번역본보다 빨리 도착한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 SNS에서인가 번역본보다는 원작이 훨씬 몰입이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봐버렸다. 그럼 원서로 읽어 줘야지! 하는 마음에 겁없이 구매했다.
빨리 읽고 싶다고 샀으면서,
시작은 빨리 했으나 끝은 그렇지 못했고,
22년도에 산 500페이지가량의 책의 끝은 결국 2026년에 볼 수 있었다.
미룬 것에 비해 읽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이 군상극이 나를 매료시켰다는 이야기다.
Mozasu
모세는 자신의 사람들을 출애굽시켜 자유의 땅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한국인 독자로서 막연히 읽는 내내 그들이 언젠가 "자신들의 나라"인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책을 덮고 생각하며 돌이켜 보니 양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에게 과연 한국은 고향이었을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모자수의 시점에서, 모자수가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분명 누가 봐도 사고 치지 않고 성실히 자란 노아보다 공부를 싫어하는 철없는 아들이었던 모자수를 볼 때 오히려 안심이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신경쓰는 노아와 다르게 모자수는 부정 없이 자신의 일을 닦아 나가고, 아들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노력하는 가족의 가장으로 남는다.
Noa
책의 줄거리에 대해 친구에게 간단히 이야기하였을 때, "그 정도의 일인가?"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아의 충격이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노아에게는 열심히 공부하여 들어간 명문대를 뛰쳐나와, 가족을 평생 보지 않고 일본인으로 자신을 숨기며 살아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작중의 초반에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수-노아, 이삭-모자수의 서로 어긋난 닮음이다. 외향은 자신의 핏줄상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들의 성향은 정반대이다. 동경하던 정직하고 신실한 아버지가 아닌 한국인을 향한 편견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 야쿠자의 피를 타고 났다는 사실은 노아에게 자신의 과거와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저주로 남는다.
4대의 이야기에서 중심점을 담당하던 장남의 죽음은 한 줄로 남는다.
Haruki
모자수와 처음 친구가 되던 순간부터 가장 신경이 쓰였던 인물 중 하나였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이야기로 건실한 삶을 살아내고 있어 안도하였으나, 결국 그의 성 정체성은 평생 그를 외인으로 남겨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상성을 계속 좇는다. 노아는 결국 Normal을 좇다 죽음에 이르렀음으로 회자된다. 하루키의 비밀은 결국 밝혀지지 않았을까. 노아도 선자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정상적인"가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의 결말은 달라졌을까?
Ayame
아야메의 시점은 짧게 지나간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큰 임팩트를 남겼을 것이라 확신한다. 고한수의 독백에서 스쳐지나간 하루키의 성 정체성은 아야메를 통해 더욱 자세히 서술된다. 파친코를 읽으며 가장 좋았던 부분은 이런 부분이었다. 책의 전체 분량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입체감을 얹어준다. 어느 하나의 입장에 몰입할 수 없고, 이야기의 메인 서사에만 몰두되지 않으며 중간중간 환기되어 수많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들의 삶을 상상하게 한다.
Hansu
책을 다 읽고 애플TV에서 방영한 드라마 버전을 틀었는데, 오프닝 영상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고한수가 어린 선자를 안아들던 컷이었다.
작중 누구도 알지 못한 고한수의 마음은 꽤나 자세하게 서술된다. 나이가 들어도 선자의 과거와 현재를 사랑스럽게 보는 고한수와, 그를 증오하면서도 이전에는 쳐다보지 않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예뻐 보이기를 바라는 선자의 엇갈리는 모습은 독자는 지켜보며 안타까워하지만 둘 중 누구도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아내가 죽고 나서 선자와 결혼하기를 기대했던 고한수의 마음은 선자에게는 기만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에, 둘은 마지막까지 엇갈릴 수 밖에 없다.
..and all the WOMEN
go-saeng을 공유하는 수많은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남성 캐릭터들의 자아도 뚜렷하지만, 더욱 자세하고 입체적으로 묘사되는 부분은 단연 여성의 이야기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을 평생 외면하지 못했던 경희도, 솔로몬을 애증했던 하나도, 외도로 자식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에츠코도, 솔로몬을 떠나며 누구보다 당당했던 포에베도, 순수한 질투로 노아의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버린 아키코도, 평생 미국을 꿈꾸며 영어를 공부했지만 아들을 살리고 한 순간에 죽어버린 유미도, 그 긴 격동의 시간을 모두 겪어낸 양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