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egarden Mar 11. 2021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가 되고 싶었다.

0310

나는 아빠의 가죽점퍼 안에서 먹이를 받아먹는 병아리처럼 자랐다. 아빠는 내가 너무 조그맣고 이뻐서 어딜 가든 나를 품에 안고 데려갔다고 했다. 게다가 우리 아빠는 내가 자라던 시대에 보기 드문 딸바보로, 내 방에 인형을 거짓말 하나도 안 붙이고 정직하게 100개로 채워준 적도 있다.

설날 추석 명절에 큰댁에 가면 남자 어른들이 앉는 큰 상, 여자 어른들과 아이들이 앉는 작은 상이 있었다. 나는 항상 큰 상 앞에 아빠의 양반다리 안에 앉아 있었다. 다른 남자 어른들이 명절 용 값비싼 고기를 먼저 자기 입으로 가져갈 때, 우리 아빠의 고기는 항상 내 입으로 들어오거나 내 밥숟갈 위에 떨어지지 않게 잘 자리 잡아 있었다. 책에도 썼지만, 요즘도 아빠는 내가 아주 못된 말을 해도 '응 미안...'이라고 하신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사랑을 배웠다.

독자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엄마가 나를 아끼는 마음도 결코 아빠에 밀리지 않는다.

내 동생이 엄마 뱃속에 있던 나의 세네 살. 엄마가 고생스러운 게 너무 싫었던 나는, 버스에 라도 타면 가장 내 말을 잘 들어줄 것 같은 분 앞에 가서 엄마에게 윙크를 하며 ‘아이코 다리야~ 아야~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 '꼬맹이가 만삭의 지네 엄마를 자리에 앉히고 싶은가 보다' 생각하는 좋은 어른들이 자리를 양보해 줬단다.  
그렇게 엄마 앞에 잘 앉아있다가 엄마 뱃속에 자라고 있던 동생이 발로 내 등을 차면, 다른 자리에 가서 다시 '아이코 다리야~'를 해서 좋은 어른을 웃으며 일어나게 만들고는 그 자리에 씩씩하게 혼자 앉아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했다고 한다. (그때 만난 좋은 어른 분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적당히 영리하게, 그리고 버릇없이 자랐다.

자라면서 나는 엄마 아빠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저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는 것 외엔,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도 나보다 훨씬 머리도 좋고 똑똑한 내 엄마와 아빠. 우리 엄마 아빠가 나보다 더 많이 배웠으면 삶이 그렇게 고단했을까? 생각했다. 책임질 가족이 많지 않았으면 저축을 더 해서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버는 시간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나 일을 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나는 결혼을 해서 내 남편이나 내 아이의 밥숟갈 위에 가장 큰 갈치 덩어리를 얹는 것보다 
엄마 아빠랑 여행을 다니는 삶, 엄마 아빠에게 맛있는 것을 사 줄 수 있는 삶을 택했다.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가 되고 싶었다.
어차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고,
"내리사랑" 이 대세이자 삶의 진리라 하면,
나 하나쯤 아래에서 위로 흘러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다행히 남동생이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아서인지 나에게는 결혼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그저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너만 있으면 다른 건 다 괜찮아... 등이 내가 듣는 말의 대부분이다. )

나는 사람이 성장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여행 그리고 사람. 사람의 인연은 선택이 가능한 게 아니고, 책은 강요할 수 없으니, 엄마를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여행을 택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처음 터키로 패키지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엄마는 그거 돈으로 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다 내서 안된다고 하고 우리는 떠났다.
그렇게 하나. 둘. 셋...
"내가 방문한 나라가 말이야~ 너 때문에 스무 개가 넘어~ "라고 엄마가 말할 때, 내 기분은 그야말로 째졌다.
"응. 엄마. 내가 엄마가 가고 싶은 데는 다 데리고 가줄게. 엄마가 삶이 고단해서 못했던 것 내가 다 하게 해 줄게. 나만 믿어."

르완다, 태국, 미얀마.
내가 일하는 곳에 엄마가 장기간 올 때마다 
아침에 엄마에게 한국으로 치면 천 원짜리를 스무 장에서 서른 장씩 쥐어주고 출근을 했다.
"엄마 오늘 이거 주고 싶은 사람들 다 나눠주고 저녁에 어디로 나와."
처음에는 영어울렁증에 힘들어하던 엄마가 나날이 즐거워했고, 저녁이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이야기해주며 즐거워했다.
"오늘은 시장에서 아기가 둘인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아기 얼굴이 너무 조막만 해서 속이 상했어. 그래서 삼천 원이나 줘버렸어."(물론 사투리로)
"응 잘했어. 그럼 내일 만나면 또 줘."
"오늘은 백화점에 가는 길에 택시에서 기사가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어가지고 걷다가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그 동네에 사는 흑형들에게 "Where are you from(너 어디서 왔니)?"을 묻는 엄마 때문에 빵 터지기도 하며,
동네 흑 언니들과 나보다 더 친해진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고,
삶의 고단함이 담긴 엄마의 얼굴에서 그늘이 조금씩 사라질 때,
엄마 마음의 키를 한 뼘쯤 자라게 한 내가 기특했다. 대견했다.

세상에 잘난 사람은 너무 많았기에 나의 자존감은 높지 않았지만,
어찌하지 못할 나의 색깔을 나는 좋아했다.
난 늘 나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을 찾아내곤 했으니까.

얼마 전 일산 호수 공원을 걷고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가 자전거 뒤에 왜건이라고 불리는 낮은 캠핑용 카트를 달고 열심히 발을 굴리고 계셨다. 왜건은 '아빠 어디 가'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아기가 많은 집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모차보다 넓어서 아기들이 두세명 태울 수 있다.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왜건에 아기들이 아닌 한 할머니가 강아지를 안고 앉아계셨다. 잘못 봤나? 다시 눈에 힘을 줘서 바라보았다. 정말 70대쯤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강아지를 품에 안고 왜건 안에 앉아계셨고, 앞에 50대쯤 보이는 아주머니가 열심히 자전거 바퀴를 밟고 계셨다.

(나의 최애 드라마 중 하나인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영화 속의 지안이는 반신불수인 할머니가 달이 보고 싶다고 하자 대형마트 카트에 할머니를 태우고 밤에 카드를 밀고 달린다. 담요에 폭 쌓여 카트 안에서 할머니는 달을 보며 미소 지으며 행복해한다. )

현실에도 이렇게 멋진 아주머니가 있구나... 나는 자전거 바퀴를 힘차게 굴리던 아주머니에게 달려가 사인을 받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렇게 왜건이 달린 자전거가 멀리 갈 때까지 보고 서 있었다.
오후 햇살과 바람에 할머니의 은빛머리가 반짝이며 날리고 있었고, 강아지를 안고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웃고 있던 표정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때 떠올랐다.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가 되고 싶었던 내가.

작가의 이전글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세 번째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