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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Haru Oct 27. 2021

인생에 의미만 찾지 말고, 욕망에도 충실하기

'만'과 '도'의 균형

이른 아침 산책 길에 그늘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좋아 한낮의 더위를 잠시 잊을 만큼 그 시간을 즐겼다.

어느새 아침의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집을 나서는 시간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다른 색의 공간에 서 있다.

조금은 무채색에 가까운, 서늘한 거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한다.

나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고,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의 거리에서 변한 것은 감각뿐이다.


인생에 의미를 찾지 말고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 되자.

나는 의미를 찾는 일을 고차원적인 사고의 영역이라 착각했다. 욕망에 충실한 사람을 본능을 따르는 1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미성숙한 사람이라 여기고 때로는 무시하며 살았나 보다. 욕망과 본능을 동일선상에 두고 그것을 쫓느라 타인에게 관심이 갖지 않는 그들을 무심함을 비난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돈에 욕심을 부리는 것을 탐욕스럽다 여겼다. 그들의 단순한 욕망의 추구를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인간관계를 고민하고 사회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삶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어쩌면 편협하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정성이 돌부처도 돌아앉힌다는 비과학적인 말을 믿고 살았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으로 포용하는 태도인 줄 알았다.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 여겼다. 사람의 선함을 이용하는 것은 정말 나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며, 나의 이익과 편안함을 위해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순수하지도 선하지 않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분명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무조건 탓할 수도 없다고 한다. 이용당하는 사람들을 탓하고 비난하는 목소리 또한 존재한다. 아니, 그들의 행동을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인 논리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욕망에 충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뿐이다. 내가 가진 기준으로 의미를 부여하느라, 나는 그들의 개성과 기질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있다.    

 



밥을 먹으면서 다리를 떠는 모습을 지적했다. ‘복 나간다’는 미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먹기 싫은 반찬을 젓가락으로 쓱 밀어내는 행동이 예의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 기준이다. 밥을 퍼 놓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피자를 시켜 먹자 하면, 음식을 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여겼다. 다리 떤다고 나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젓가락으로 반찬을 밀어낸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피자를 시키면 나 역시 맛있게 먹을 거니까. 차린 반찬들은 내일 먹으면 될 일이다.

 

불필요한 전등을 끄자는 말과 어두운 것이 싫다는 개인의 욕망에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다 논할 수 없다. 완전한 이해라는 것은 없다.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든 다들 잘 살고 있으니, 누구의 기준이 더 낫다 할 수 없다.      

모든 일들은 결과로 말을 할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나의 지금은 성공적이라 할 수 없다. 마음 편함과 상관없이 사회가 부여한 기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나의 사고방식은 어딘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의미부여와 욕망 추구의 균형,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잃은 것은 아닐까. 


인생의 절반을 의미만 찾다가 ‘지금’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앞으로 절반은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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