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나 김밥 한 줄을 산다. 한참을 고민하며 서성거리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익숙하다. 나는 편의점 간편 식품을 이용하던 사람이 아니다. 간편성과 ‘정성이 결여된’을 동일시한 탓인지도 모른다. 전자레인지의 데우기 기능은 무시하고 특유의 "냉함"이 싫었다. 편의점 음식에 맹목적이고 긍정적인 남편의 태도로 인한 소심한 반항이었을지도. 특히, 그가 즐겨먹는 김밥은 나는 유난히 싫어했다. (지금은 나의 주된 메뉴 중의 하나다.)
결혼을 하고 임신 8개월까지 도시락을 쌌다. 능숙함은 부족했지만 의욕과 정성이 있었다. 결혼 10년 차가 되었을 때는 능숙함이 더해서 점심-저녁 2개의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새벽 5시부터 부지런함을 떨었다. 개수가 하나도 줄기는 했지만 6년을 국과 반찬 3가지를 고수하며 나를 뽐내는데 시간을 보냈다. 처음의 시작은 상대의 요구였지만, 내용과 형식은 잘한다는 말에 중독되었다. 야채와 과일을 갈아서 함께 넣기도, 홍삼진액나 같은 건강식품까지 챙겼다. 하루의 포커스가 기-승-전-도시락 반찬이 될 정도로 책과 인터넷을 보며 정보를 모으고 연구하면서 열심히 했다. 물론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재능이 있다 생각했다. 문화센터의 무료 강습 과정만으로 한 번에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잡채나 해물파전을 별다른 준비 없이 바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냉장고도 실력도 준비되어 있었다. 반찬을 해서 택배를 보내고, 생일상을 차리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피곤했지만 그 수고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자부심이었고 무기였다. 다른 사람들의 “대단하다”라는 말을 자양분으로, 나는 그렇게 살았다.
편의점에서 산 김밥을 먹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생수가 아닌 보리차를 끓여 먹고, 마트에 파는 양념된 고기는 구입하지도 않았다. 그럴듯한 맛을 내기 위한 양념들 따위는 필요조차 없었다. 멸치육수를 우려 다소 번거롭게 음식을 만들던 나의 진심은 무엇일까. 여전히 예쁘게 차려진 한상차림을 좋아하고, 정갈하게 담긴 도시락 사진이 들어간 책을 좋아한다. 그렇게 긴 세월을 거창하게 도시락에 커피까지 늘 준비했으면서 나는 위해 간단하게 밥과 반찬만 담는 것도 안 하는 건 왜일까.
나는 무엇을,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귀찮은 것을 안 할 수 있는 지금의 편안함을 누리는 것과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차원에서 (나를 위한)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나를 더 위하는 걸까. 도시락을 싸는 것도 나를 위한 일이지만,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수고를 안 하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 나를 위한 일일 수 있다. 이 역시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기 싫은 나의 변명일까.
나를 위한 도시락이라니.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긴 하다.
타인에게 향하는 정성은 “~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갖는다. 나를 위한 정성은 “좋아서”라는 단순한 (근거가 약한) 이유를 갖는다. 어쩌면 이 단순함이 몇 줄짜리 명분보다 더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