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Haru Sep 12. 2021

밥벌이 능력치가 -1 되었습니다.

초등 인강 관리 교사 편

시간당 알바가 아닌 뭔가 그럴듯한 직장이 있어야 한다.

부실한 내 무릎을 보호하면서,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일이 필요하다.      


초등 인강 관리교사 일을 추전 받았다. 광고 로고송이 떠오르긴 했지만 생소한 분야다. 재택근무에 대략 8년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나는 부모와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렵지 않아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어린이집 경력 10년, 아이와 부모상담에 대한 겁없음이 나는 무기로 삼았다. 

20대에 한 번의 면접으로 10년을 일했고, 그 후는 전업주부였던 내게 낯선 세상이 펼져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지원하기 버튼을 누르고, 이력서를 제출하기. 1차 관문의 시작이었다. 해당 내용에 ‘v' 넣지 못해서 ‘_’로 표시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해주세요.”

“꼭 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결과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저렇게 세련되게 말했어야 했는데. “되면”..... 한숨 나오는 표현이었다.

사투리 쓰는 아줌마의 그저 순박한 마지막 절규처럼 들렸을 것이다.




합격 연락이 왔다. 이 일에 지원하기를 잘했구나. 이렇게만 일이 풀리고, 살아진다면 곧 집도 한 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의 축하와 격려를 만끽했다. 집에만 있어서 잊고 살았던 거지,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호기롭게 일을 시작했으면서, 나는 곧 항복의 백기를 들 것 같다.

컴퓨터라는 말을 아직도 쓰는 내게 pc의 세계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 홀로 서 있는 것보다 더 난감한 일이었다. 손짓 발짓이라도 해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교육을 받기 위해 프로그램 하나는 다운로드하는데도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다. 몇 배의 시간을 들였다. 제일 나이가 많은 뒤떨어지는 교육생이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넘어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아줌마라는 철가면을 쓰고 민폐형 동기생이 되는 것을 감수했다. 세상을, 나를 참 모르고 살았구나. 매일이 우울했다. 그래도 막상 일을 시작하면 상담은 잘할지도 모르니 버티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 준 비장의 무기는 낡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더니, 실제 업무는 더 힘들었다. 상담의 부담감, 해지 요청, 방어 상담, 상대가 귀찮을 정도의 문자발송 등등 매뉴얼의 이행이 나는 불편했다. 내 탓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늘어나는 해지률에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자신이 없으니 질문이 많아졌다. 꼼꼼함은 독이 되었고, 할수록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아이와 원룸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6시간을 함께 있는 공간에서 통화를 한다. 아이의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미안함보다 엄마의 어설픔과 어색함을 보이는 것이 싫다는 이기적인 이유였다. 거친 목소리와 추리한 내 얼굴을 전화/화상 상담으로 확인하는 일은 훨씬 가혹한 일이었다.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나는 마음의 고됨을 “자기 방치”의 정당함으로 이용했을까. 내가 살아온 길을 고스란히 확인하고 있는 시간들이다. 나의 초라함과 상황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의 밥벌이가 녹록지 않겠구나.

이전 05화 시급을 받아보니 알겠더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