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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Jun 24. 2019

경비 조달을 위한 조선소 노동 이야기.story

꽃별-비익련리(추노 ost)


세상의 모든 길은 조선소로 통한다

조선소는 다양한 방법으로 입사가 가능한 곳이다. 


첫 번째로 알바몬, 알바천국, 잡코리아 등.. 구글에 검색하다 보면 수 만 건이 쏟아져 나온다. 보통 아웃소싱 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구해서 업체에 넘기려고 이런 구인구직 사이트에 글을 올려놓는데, 경쟁이 황치열 수준으로 치열하기 때문에  모집공고에 '월 400~500 가능!!' 같은 소설을 쓰며 급전이 필요한 노예들을 유혹한다. 조선소에서 노동강도가 힘들기로 유명한 포설 같은 경우 직종을 '포설'이란 말 대신 '풀링'이나 '배선'으로 최대한 얼버무려 이야기하고, 족장 같은 경우엔 대체할 단어가 없어서 보통 다른 직종으로 속여서 이야기한 뒤 은근슬쩍 발판 설치 일이라면서 사실상 호구 잡아서 넣는데, 이는 포설과 족장에 들어간 노예들이 항상 추노질을 하기 때문에 그 모자라는 티오를 채우기 위함이다. 보온이나 배관, 덕트를 구한다고 써놓은 공고들도 꽤 많은 곳들이 좋은 팀으로 넣어줄 테니 입사서류 쓰게 '일단' 오라고 한 뒤 "아~ 거긴 자리가 꽉 차서 포설이나 족장으로 가셔야 될 것 같아요~ 족장은 일당 만원 더 드립니다^^" 정말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이 말을 하는데 파이프라도 있다면 진짜 머리를 한 대 세게 후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결론적으로 호구 잡혀서 인건비 떼이고 몸 병신 돼서 6개월 안에 도망 노비로 전락하려면 이 루트로 가면 된다. 


두 번째로 지인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지인과 정말 친하고 지인이 주변 사람들을 정말 잘 챙겨주는 아가페적 스타일이라면 능력이 없어도  조장급이나 반장급의 기량자 단가를 챙겨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우 행복해서 눈물이 날 지경으로 하루하루를 근무할 수 있는데, 정말 희박하지만 이러한 경우가 있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과의 관계가 정말 종잇장 두께 하나 이상이라도 멀다면 이런 행복한 상상은 진작에 접어두는 게 현명하다. 대부분의 경우 친분을 운운하고 잘해주는 척하면서 '단가 금방 올려줄게'라는 약속과 함께 인건비를 많이 후려치고, 가끔 본인 원할 때 술 한잔 하면서 추노질을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결국에 추노 할 때쯤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드립으로 본인이 마치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준 것처럼 신세한탄을 하는 게 포인트다. 이게 괜찮다면 이 루트로 가면 된다.


세 번째로 3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 중인 거사모(거제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니조알(니들이 조선소를 알아?) 같은 조선소 관련 카페에서 구직을 하는 방법이다. 여긴 대부분 현장 반장들이 직접 채용하는 거라서 은근 신뢰성이 높고, 잘 찾아보면 첫 번째 방법보다 하루 1~2만 원씩이나 더 높은 단가를 받을 수도 있다. 이건 아웃소서들의 행복 넘치는 소설을 믿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끈끈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이용하는 것도 아니기에 어떻게 보면 가장 속 편하고, 깔끔하고, 좋은 조건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야, 출근만 해도 하루 9만 5천 원이야."

조선소 생활을 꿈에서만 그리고 있었을 땐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방법을 알지 못해서 하루 종일 알바 app만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여긴 400 준다는데 저긴 450 준다고 하네... 저기로 갈까..'같은 되지도 않는 망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다. 그곳엔 어찌나 노비를 환영하는 자들이 많던지, 부랄 두 쪽만 싱싱하면 누구나 한 달 400~450을 찍는단다. 그 소설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페이스북에 '이제 조선소에 갈까 생각하는 중'이라는 내용의 여행일지를 올리니 그다지 친하지 않은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바로 왔다. 오랜만에 아주 반갑다며, 본인은 지금 대우조선해양에서 팀장으로 일하는데 함께 일을 하자는 말을 했다. 조건은 하루 일 9.5만 원에, 잔업이 많아서 열심히만 하면 월 400은 충분히 찍는다고 했다.

 

"진짜 나 같은 줮병슨한테 월급이 400이나 떨어진다고요? 정말요?" 


한치의 흔들림 없이 그렇다고 했다. 일단 오기만 하란다. 열심히만 하면 400이건 500이건 가뿐히 찍는다고, 으레 항상 사람 못 구해서 안달 난 곳이 조선소라고. 바로 근무를 할 수도 있으니 굳이 여러 군데 전화해서 시간 낭비하지 말란다. 그렇게 바로 목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느낀 나는 곧바로 자전거와 함께 거제도로 거처를 옮겼다. 숙소라고 쓰고 닭장이라고 읽는 곳에 가보니 먼저 근무를 하고 있던 고추들이 나를 반겼다. 짐을 푼 다음 날엔 대한산업보건협회에서 지정한 병원에서 8만 원인가를 주고 채용신체검사를 받았는데, 3일 정도 뒤에 결과지가 나와서 회사에 이력서와 함께 제출했다.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을 믿었건만, 채용은 계속해서 지연됐다. 이유는 매번 달라졌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채용이 늦어져서 미안하다고, 다음 주에는 무조건 투입될 거라는 말만 전화로 매주 2번씩 들었다. 그러다가 한 달이 지나자 지인의 전화도 뜸해졌고, 희망고문만 당하다가 약 두 달간 숙소에서 생활비만 축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기간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처럼 느껴졌고, 하루가 2시간이 아닌 24시간임에 굉장히 무료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닭장 고추들에게 '그 형은 출근 잘해요?'하고 물어보니 사실 그 지인은 아웃소싱 팀장이란다. 일이 안 잡혀도 자리가 날 때까지 나를 무기한 붙잡아놓고, 자리가 생기면 그제야 넣어줘도 되는, 갑의 입장이었던 것이었다. 인간적으로 지인을 불러놓고 이러면 안 되는 거였지만 사실상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고, 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희망고문을 당하다 보니 매번 '정말 조금만 있으면 근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했고, 그도 알고 나도 알듯이 나에겐 다른 대안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래 시발 네가 그렇지 개색꺄하며 마냥 기다린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생활비만 어마어마하게 깨졌고 정말 캘리포니아산 잣 같은 시간이었지만 결국 그 끝엔 기회가 찾아왔다. 



기다림 끝에 시작한 근무

그렇다. 두 달간 숙소에 짱박혀있던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소속은 대우조선해양 H안벽 FPSO선 인펙스(INPEX)호, 포설 2직 4반이었다. 작업을 해야 했던 FPSO 선박은 해상에서 석유나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저장하고 적출하는, 바다 위의 연료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배였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길이가 무려 336미터에 폭 59미터로, 축구경기장 세 개를 이어놓은 것보다 더 긴 크기였고 100만 배럴 이상의 컨덴세이트를 저장할 수 있었다.(천연가스에서 나오는 휘발성 액체 탄화수소를 말한다.) 처음 가서 멀리서 볼 때 에이 줬도 아니네 하고 갔는데 배가 씨부랄 진짜 진짜 크다. 처음에 현장 팀장이 배에서 길 잃어버리지 않게 잘 기억하고 다니라길래 뭔 x소리지 하면서 웃으며 넘기고 말았는데 들어가 보니까 x발! 층도 매우 많은데 길까지 판의 미로처럼 복잡했고, 거기다가 한쪽에선 불똥 튀기면서 용접하고 있고, 한쪽에선 유리섬유 보온재 날라서 벽에 붙이고 있고, 한쪽에선 방독마스크 걸치고 페인트칠하고 있고, 족장 작업, 포설작업, 결선 작업, 배관 작업, 화기 작업, 양중 작업(크레인) 작업까지 겹쳐있었다. bgm으로 그라인딩, 고함, 크레인 양중, 장비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리니 여긴 지옥 혹은 전쟁터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조선소에 가기 전에 찾아봤던 직종보다 직종의 종류가 더 다양함에 꽤 놀랐는데, 종류를 써보자면 대강 이렇다.


포설 : 케이블을 끌어다가 설치함.

결선: 케이블 피복 벗겨서 단말기에 연결. 

용접: 1미터 지지고 3시간 놀다 옴. 

족장: 발판 설치.

보온: 유리섬유로 된 보온자재를 벽에 붙임.

도장: 페인트칠 및 파워 그라인딩. 

화기: 용접, 절단, 트레이 설치.

취부 : 기계의 파트나 모듈 혹은 블록 전체를 부착/탈거를 도움.

배관: 얇은 훅업 배관부터 사람 키의 몇 배 되는 대형 배관까지 설치.

QC: 품질관리


이중 나는 케이블을 설치하는 '포설' 팀 소속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가정집에 전기가 필요하니 데굴데굴 말린 전선을 끌어다 주는 일이었다. 다만 배의 길이가 400미터가량 되고 높이가 아파트보다 더 높은 배다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많은 케이블이 들어갔다. 내부가 구리로 되고 긴 케이블을 도면에 나와있는 대로 설치하는데, 몸이 굉장히 고됐다. 


하루 일과

현장직에선 하루 일당을 1 공수 혹은 한대가리라고 한다. 조선소에서 흔히 1.5 대가리라고 부르는 잔업까지 한다고 가정했을 시의 하루 일정은 이러했다.

 

[1.5 공수 기준]

06:00 기상 후 고양이 세수. 숙소 화장실은 동일한 시간에 사람이 몰리기에 사용 못한다고 보면 편함. 자리 꽉 찬 통근버스 대충 끼어서 타고 이동, 락커룸 도착하면 장구류 착용 후 야드(작업장)로 집합함. 이것만 해도 굉장히 피곤함.

07:40~ 준비운동 및 TBM 시간. 안전작업 좋아 좋아 좋아! 뻘짓거리하고 작업 시작.

10:00~10:10 휴식시간. 일 바쁘면 못 쉬는 경우도 있음. ㄹㅇ개 화남

12:00~12:40 배에서 내려가는 것만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식당 줄도 길어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국 밥 허겁지겁 먹고 다시 배 위로 뛰어 올라감. FPSO선이라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그것도 대기줄이 엄청 길어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함.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면 배로 들어갈 수 있는데 배에 들어가서도 작업장까지 또 올라가야 됨. 간단히 말해서 점심 먹고 등산을 한다고 생각하면 됨.

12:40~ 15:00 반장의 어림없는 허튼소리 한 번 듣고 작업 개시.

15:00~15:10 휴식시간. 쉬던 안 쉬던 힘든 건 똑같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복도에 줄줄이 모여서 담배 피움.

18:00~18:40 상대적으로 점심보단 한가한 저녁시간. 야근 안 하는 사람들은 이미 퇴근했기에 사람이 별로 없음. 엘리베이터 편하게 타고 배 위로 올라감. 

18:40~22:00 잔업시간. 다들 피곤해서 능률이 안 나옴. 하루 종일 지들끼리만 힘들었는지 말도 틱틱 뱉고 싸움박질 나기 일보직전의 상태로 작업함. 보통 이땐 마음 안 맞는 사람이랑은 스트레스받아서 이야기를 잘 안 하게 되고 마음 맞는 사람이랑만 대화하게 된다고 보면 됨.

22:30~01:00 버스 타고 숙소로 복귀해서 똥줄 기다리고 빨래 기다리고 샤워 줄 기다려서 어렵게 개인정비하다가 하루가 너무 고달파서 치맥 한 번 당기는데 3-40대 젊은 꼰대들이 자기도 옆에서 술 한잔 하자면서 앉아서 맥주 뺏어먹으면서 선비 소리 하는 거 듣다가 새벽 1시쯤 곯아떨어짐.

다음날 06:00 피곤에 절어서 기상. 똑같은 생활 무한반복.


1.5 공수면 14만 2500원인데 이미 5년도 더 된 물가니 어떻게 보면 돈 많이 버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잔업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선박에 들어가는 인부들 같은 경우 작업 물량이 없어서 매일 기본공수만 찍으며 주말 싹 다 쉬는 팀도 있다고 들었다. 그 팀 사람들한테 들은 건데 풀 공수 채워도 22 공수밖에 안 나와서 조공 기준 200 정도밖에 못 가져간단다. 특히 대부분 물량팀인데 하청 회사에 계약된 일거리가 소진되면 싹 다 퇴사해야 하고, 한 번 퇴사하면 재입사까지 한 달 이상 대기해야 하니 사실상 소득의 총합은 그리 높지 않다. 중요한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한 달 소득이 1년 소득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과, 내가 일을 하고 싶다고 해도 일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케이블 설치 작업

포설은 생각보다 간단한 작업이었다. 바지선에서 케이블 드럼을 데굴데굴 굴려서 건조 중인 선박 옆으로 가져오고, 선박 밑에서 양중하는 작업자들한테 드럼을 선박 위로 올려달라고 이야기하고, 온데크(갑판)에서 크레인이 내려주는 케이블 드럼을 받고, 드럼에 있는 케이블들을 풀고, 케이블을 배 안에 설치하고, 바인드 툴이라 부르는 결속 장비로 케이블을 트레이와 결속해주면 끝이었다. 그러나 모든 진실된 말은 '그러나' 뒤에 나오듯, 이 파워케이블들의 굵기는 대부분 엄지손가락 굵기 이상이었고 내부는 구리나 여러 종류의 케이블들로 꽉 차있어서 하루 온종일 당기고 있으면 팔근육에 자연스레 무리가 왔다.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굵기가 아나콘다만 한 케이블도 당겨야 하는데, 이걸 당길 땐 인원이 10명이 넘는 팀 전체가 케이블 하나 잡고 줄다리기하듯이 오우가~ 오우가~ 구령 넣으면서 풀파워로 당겼다. 이게 생각보다 미친 듯이 무거운 데다가 일직선으로 쭉 당기면 되는 게 아니라 도면 따라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커브를 틀며 설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 번 당길 때 5cm 갈까 말까였다. 영혼 갈아가면서 파워케이블을 당기다가 팀원 중 한 명이 옆에서 염력을 사용하고 있는 걸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진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처럼 팀에 한 두 명 있는 도인들 때문에 힘을 제대로 못 받은 경우엔 아예 미동도 없는 무자비한 케이블이었다. 이런 굵고 얇은 케이블들을 하루에만 수백 미터씩 당기는데 한겨울에도 땀이 세바가지씩 나온다. 그리고 배 안에는 항상 쇳가루가 날리는데 작업을 하다 보면 마스크를 쓸 수 조차 없다. 왜냐하면 소음공해가 심해서 소리를 지르며 소통해야 하는 것도 있고, 앞쪽에서 선창 "오가야~"를 한 사람이 외치면 나머지 사람들이 후창으로 "오가야~"를 함께 외치며 케이블을 당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 구령을 제대로 안 맞춰서 케이블을 당기면 손이 케이블과 트레이 사이로 협착될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골절상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오가야~를 외치지 않으면 오히려 다친다. 그래서 팀원과의 협력을 위해 폐를 포기하기가 쉽다. 



코딱지 코딱지 맛이 있는 코딱지

그런 현장이다 보니... 1시간만 있어도 가래 뱉으면 누런 떡가래가 나오고 퇴근할 때쯤엔 쇳가루가 몸에 많이 달라붙어서 온몸이 가렵고 따가웠다. 숙소에 돌아와서 샤워하면서 코를 풀어보면 진짜 석탄처럼 시커먼 코딱지가 나왔는데 와 내 코에서 어떻게 이런 신비한 물질이 나올 수 있나 싶어서 매일 놀랬다. 이 덕에 코딱지 파는 맛에 들려서 아직도 코파기의 즐거움에서 못 헤어 나오고 있다는 건 비밀이다.



작업자를 위한 공간은 없다.

케이블이란 무엇인가.. 어떤 건축물을 봐도 어딘가에 숨겨져서 설치되는 게 케이블이 아닌가. 배에선 케이블이 동서남북 상하좌우를 따지지 않고 설치된다. 전층, 전 구역, 심지어 헬멧도 안 들어가는 협소한 공간, 혹은 10m가 넘는 천장일지라도 필요하다면 설치해야 한다. 케이블이 들어가는 공간에 사람을 위한 공간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배관이나 덕트를 타고 이동해야 할 수도 있고, 작업등도 안 켜진 암흑 속을 헤쳐나가야 한다거나, 보온자재 옆에서 작업하다가 몸에 유리섬유가 붙어서 긁어도 긁어도 끝나지 않는 가려움을 느낄 수도 있고, 천장에 걸린 트레이를 잡고 목숨 내놓고 야마카시를 해야 할 수도 있고, 헬멧도 안 들어가는 하이볼 테지 단말기 하부에 머리에 착 붙는 소형 헬멧을 끼고 그대로 온몸이 구겨져서 손을 최대로 뻗으며 케이블을 희한한 자세로 당겨야 할 수도 있다. 이러다 보면 어깨, 머리, 팔꿈치, 손목, 손가락, 인대, 무릎에 협착과 전도, 골절상을 매우 쉽게 얻을 수 있는데, '힘들다'보단 '아프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특히 본인이 근무했을 겨울~봄쯤엔 철로 만들어진 배가 얼음덩어리로 변해버린 때였는데 바닷바람이 온몸을 난도질하고 얼어붙은 케이블이 손가락을 고문했다. 퇴근을 할 때쯤엔 온몸에서 쉰내가 폴폴 풍겼고, 작업복엔 쇳가루와 유리섬유가 많이 묻어있었다. 안전화엔 땀이 흥건했고, 걸을 때마다 땀 때문에 질척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다. 케이블 설치는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점심시간 진풍경

500명밖에 수용 못하는 식당에서 수천 명이 식사를 한다. 줄이 워낙 길어서 똥도 못 싸고 손도 못 씻고 세수도 못하고 먼지 다 묻은 상태로 달려가서 기다리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이미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결국 30분 이상을 서서 기다려서 밥 한 번 겨우 먹는 건데, 다 먹고 나면 1시간밖에 없는 점심시간이 다 끝나버린다. 시간이 조금 남는다고 해도 똥 한 번 시원하게 못 싸고 배 위로 올라가야 한다. 화장실 칸이 몇 개 없어서 똥줄이 매우 길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항문 조이고 기다리는데 똥 칸에서 담배 피우면서 즐똥 타임을 즐기는 민폐족들도 많고.. 어쩔 땐 진짜 바다에다가 싸버릴까 싶을 정도로 눈물겨운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다가 배 위로 승선해야 했는데, 줄이 미친 듯이 길어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면 아파트 10층 이상의 높이를 계단으로 뛰어서 올라가야 시간 안에 승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승선할 때 헬멧에 부착된 RFID 칩으로 승선시간이 자동으로 인식되고 그 정보가 회사로 전송되는데, 똥을 너무 오래 쌌다거나 해서 정시에 몇 분이라도 늦으면 그거 가지고 관리자들이 왜 늦었냐고 추긍하고 일찍 일찍 다니라고 난리 피우고 2차로 반장이 늦지 말라고 난리 피웠는데 그럴 때마다 현타가 강하게 왔다.



퇴근 이후..

우리 팀 같은 경우는 팀장이 알코올 중독자라서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고로 퇴근하고 회식하는 게 아니라, 회식하고 퇴근했다. 팀장과 팀원들은 어떻게던 나를 데려가려고 악을 썼고 난 어떻게던 빼려고 매일 악을 썼다. 다만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지, 안 간다고 버티면 어떻게던 눈치 주고 괴롭혔기에 몇 번에 한 번꼴은 따라갔다. 결국 난 미성년자의 몸으로 술냄새와 땀냄새에 찌들어서 조선소 생활을 이어갔다. 술을 마시고 나서 자택이 근처에 있는 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함께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는 보통 방이 2~3개가 있고, 방하나에 고추 3~4명이 기본으로 들어가서 생활하는데 보통 8~12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생활한다고 보면 된다. 조선소를 다니며 경험했던 모든 숙소들은 항상 더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라는 말처럼 그 누구도 청소를 하려고 하지 않았고, 담배냄새가 벽에 스며들어서 도저히 빠지지 않을 수준으로 심했다. 숙소에선 샤워를 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힘들었다. 인원은 12명인데 화장실이 1개였기 때문이었다. 세탁기를 돌리는 것도 한참 기다려야 했고, 똥 한 번 싸려고 해도 줄을 서야 했다. 그리고 정말 뭐 같은 게 뭐였냐면, 개인적인 자유시간이 절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닭장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것도 그지 같은데, 물론 다 그렇단 건 아니지만 같이 생활하는 조선소 아재들은 대부분 개념 없고 배운 것 없고 작업장에서 본 여자 품평이나 하는 몰상식한 종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뭐만 하면 간섭하고, 인생 선배인 척하면서 어떻게 살라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잔소리를 했다. 본인들 심심하면 나이 어린 사람들 괴롭히는 것에 사디스트적인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알겠으니까 가만히 좀 내버려 두라고 하면 요즘 젊은것들은..으로 시작해서 쯧쯧 혀를 차면서 잠도 안 자고 인생 설교와 진상 짓으로 날밤을 세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꽉 막혔는지 뚫어뻥으로 머리를 세게 내려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소는 하루에도 수백 명이 입사와 퇴사를 하는 곳이라서 숙소 생활을 아무리 오랫동안 같이 했다고 해도 서로 친절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몇 달이면 안 볼 사이라는 생각을 대부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소에 배에서 싸울 수 없으니 숙소에서 언쟁이 많이 오고 갔고, 최악의 경우 숙소에서 현피를 뜨는 경우도 있었다.



피바람이 불었던 나날들

그렇게 3개월 정도를 근무했다. 대기기간만 없었다면 반년은 하는 거였는데, 원하는 기간만큼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3개월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근무했다. 잔업이 있는 날이건 철야가 있는 날이건, 근무를 할 수 있다면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 야근을 끝내고 밤 11시쯤 숙소에 들어오면 화장실 줄을 기다렸다가 샤워를 하고 1시쯤에 잠들고, 다음날 6시에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일상을 꽤나 오래 반복한 것이었다. 안전화는 군데군데 마모가 심해서 찢어지고 구멍이 뚫렸고, 양옆으로 벌어짐이 심해서 케이블 타이로 묶고 다녀야 할 정도로 헌신짝이 됐다. 그래도 현장일의 특성상 언제 팀이 정리되고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일하려고 했다. 제일 많이 근무한 달은 세 번째 달로, 38 공수를 찍어서 급여명세서에 360만 원이 찍혔다. 그리고 그 360만 원 찍힌 달에 박근혜 정부의 계획 아래 도마 위에 오르게 된 빅쓰리(대우, 삼성, 현대)가 구조조정을 감행하면서 배 안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늘 보이던 사람들이 점점 안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떤 작업자는 정문 앞에서 큼직한 푯말을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시작했고, 배안에선 회사 대표들이 하나 둘 해외로 날랐다는 소식도 간간히 들렸다. 한 회사씩 무너져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에이~ 설마 우리 회사 대표는 안 그렇겠지 하며 다른 회사들을 보며 끌끌끌 웃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회사의 대표도 수억 원의 기성금을 가로채서 해외로 도주한 뒤였다. 회사는 정말 눈 깜짝할 새 사라졌고, 내 월급 360만 원은 대표와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는지 잠적을 감췄으며 사람들은 광분했다. 결국 단체로 노무사를 선임해서 대표에게 소송을 걸었고,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몇 개월이 지나서야 보상한도인 300만 원을 돌려받았지만 초과액 60은 증발했다.)



텅 빈 거리

퇴사 다음날 거리로 나갔다. 밤이 될 때까지 무작정 걸었다. 숙소 주변엔 사람은커녕 헌 옷 수거함에 산더미처럼 쌓인 회색 작업복만 널브러져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회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술에 취해 거리를 휘젓고 다녀야 정상이었는데 그 시절은 이미 피바람과 함께 지나간 뒤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제를 떠났고, 내가 떠날 차례도 다가왔다. 일을 겨우 시작하게 된 것도 서글펐는데 회사가 사라졌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나에겐 왜 이리 힘든 일만 생기는 것 같았는지, 인생이 이렇게까지 힘들 수 있나 싶어서 가슴이 정말 아리도록 아팠다.



고현으로..

거제를 완전히 떠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같이 일했던 사람이 거제도 고현에 있는 삼성중공업엔 자리가 있다길래 그쪽으로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새 숙소로 옮겼지만 거기에서도 알거지 상태로 한 달가량 대기만 해야 했다. 회사 도전 이전에 받은 월급으로는 장비를 교체하고 학교 건축기금에 보태느라 꽤 많이 써버렸는데, 갑자기 회사가 도산되고, 받을 줄로만 알았던 월급을 못 받으니 어처구니없이 자금난을 겪게 됐다. 그래서 도저히 버티다 못해 매일 라면과 삼각김밥을 먹으며 근처 인력소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새벽에 일어나면 숙소 사람들은 삼성으로 출근을 했고, 나는 인력소로 출근했다.



그만 좀!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졌는데도 잘 풀리는 일은 없었다. 때마침 나같이 대우조선에서 퇴사한 사람들이 많아서 인력소는 앉을자리조차도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볐고, 일거리가 부족한 탓에 매일매일 데마찌를 먹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지금까지 겪은 상황들도, 당장 처한 상황에도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 상태에서 인력소와 건설회사들의 부당대우를 경험하게 되어서 분노가 폭발했다. 그래서 어떤 인력소던 부당 수수료를 챙기는 게 보이면 증거자료를 수집해서 고용노동부에 고발했고, 작업 현장에서도 건설회사들이 근로시간을 초과해서 근무를 시키거나 부당대우를 하면 무조건 고발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며, 앞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겪는다면 불쌍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최대한 통제하기로 마음먹었다.



합의

시간이 지나고, 화가 가라앉았을 때쯤 고용노동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 주장에 근거가 있고 합당한 조치였기에 인력소들에게 경고조치를 했고, 건설회사에 처벌을 내릴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건설회사 간부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고용노동부에 고발하신 것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그것 때문에 일전에 고용노동부에서 감사를 보러 현장에 왔고, 결론적으로 선생님께서 진성서를 취하하지 않으신다면 벌금 500만 원을 내야 하고 경고도 받게 될 상황인데.. 정말 죄송한데 취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취하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네요. 그쪽 회사에서 사람을 워낙 노예처럼 부려먹고 폭언에, 법적으로 보장받는 휴게시간도 안 주고 사람 굴려서 제가 일부러 처벌 제대로 받으시고 다음부턴 그러지 마시라고 신고한 거거든요.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서 일하면서 그런 꼴 많이 당했을 텐데, 행정처분 정직하게 받고 반성하시길 바라요."


쿨하게 끊었다. 내가 생각해도 멋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계속 전화하지 마세요. 수신 차단합니다."

"선생님 잠시만요...!!!!!"

"왜요?"

"합의.... 해주시면 안 될까요?"

"뭔 합의요?"


이젠 합의를 하잖다. 너무나도 기가 차서 "야 내가 돈 때문에 밤새면서 진정서 줫빠지게 쓰고 증거자료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고발한 줄 아냐? 이 x끼들이 어디서 사람을 설렁설렁 보고 있어, 내가 취하 안 한다고 했지. 눈에 뵈는 게 돈 밖에 없어서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냐? 난 취하할 생각 없으니까 꺼져 이 x새끼들아!"라고 말하고 쿨하게 끊고 싶었다. 하지만 쿨하게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큰 액수였다. 


"얼마를 생각하시는데요?"

"200만 원이요...."


순간 치킨 때문에 200만 원 나누기 2만 원을 했는데 100마리는 족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입꼬리가 순식간에 귀에 걸렸지만 멘탈을 다잡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얘네가 내야 하는 벌금이 500만 원인데 200만 원은 너무 후려치는 것 같아서 300을 부르기로 했다.


"그건 너무 후려치는 거 아닌가요? 됐고, 오늘 안으로 300만 원 입금하시면 취하해드릴게요. 근데 이 금액 싫다고 하시면 앞으로 합의고 나발이고 진짜 어떤 이유로던 전화하시면 무조건 차단할 거니까 알아서 하세요."

"예 선생님! 300만 원 바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고마워요 이 사람아...'


그날 내 통장엔 300만 원이라는 거금이 찍혔고, 조선소 생활과 거제도 생활은 그렇게 뷰티풀 하게 종결됐다. 



잘 있어라 거제도

거제를 떠날 때. 짐은 많은데 짐을 옮길만한 게 없어서 박스에다가 짐을 넣고 박스테이프로 어깨끈을 만들어서 짊을 짊어지고 부산으로 갔다. 사람들이 박스 가방을 쳐다보며 수군대는데 그러건 말건 웃으며 다녔다. 부산 가는 길에 그간 겪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는데 부산에 도착하고 보니 마치 이전에 겪은 모든 이야기들이 동화책에 다녀온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니 조선소를 다니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사회가 뭔지, 세상이 뭔지, 줫같음이 뭔지. 조선소에서 경험한 어려움들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겪을 줫같음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했다. 이렇듯 거제도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이자 안줏거리가 되었다.



'뒤에서 남을 비방하여 자신을 드높인다.' 

-조선소 정신 1조 1항-


잘 있어라 조선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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