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홍은사
홍은사
주로 야외취침을 했기 때문에 충전에 어려움을 겪었고, 배터리가 항상 모자랐다. 그래서 며칠에 한 번은 보조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피시방 아르바이트생에게 부탁을 해서 충전을 맡긴 뒤 다음 날 찾아가거나, CU사장님께 부탁드려서 충전을 하거나, 화장실 콘센트에 충전기를 꼽아놓고 화장실 노숙을 하는 식으로 배터리 관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충전을 며칠간 하지 못해서 보조배터리까지 모두 사용한 상태였고 휴대폰 배터리는 0퍼센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배터리가 다 돼서 데이터와 GPS를 사용할 수 없다면 도로 한복판에서 발이 꽁꽁 묶이게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머릿속으로 지도를 암기한 뒤 휴대폰 전원을 껐고,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이 길이겠거니 하면서 이동했다. 얼추 여기가 맞나 의구심이 들 땐 다시 휴대폰의 전원을 켜서 확인하며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이동을 하던 중.. 어딘가에서부터 길을 잃었다. 고도가 계속해서 높아져서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래도 길이 끊어지지 않고 나오기에 큰 의심 없이 계속 올랐다. 그 상황에서 휴대폰을 켜서 확인을 했어야 했지만 날이 미친 듯이 더웠기에 중간에 멈춰서 확인하기가 굉장히 싫었고, '배터리를 아껴야 해.'라는 생각으로 배터리 핑계를 대며 계속해서 소나무길을 헤쳐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산 중턱에서 등산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산 중턱에 위치한 삼거리까지 다다른 뒤였다. 삼거리엔 홍은사라는 절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었다.
'홍은사?.. 내가 가야 하는 절은 오어사인데..'
그제야 멀리와도 너무 멀리 왔고, 잘못 와도 한참을 잘못 왔다고 생각했다. 휴대폰을 켜서 확인해보니 오어사를 가려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우회전을 해야 했는데, 우회전을 너무 일찍 해버린 바람에 다른 길로 들어가게 됐고 홍은사라는 엉뚱한 절로 찾아간 것이었다. 다행히도 잘못 찾아간 홍은사에서 산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어사가 있어서 자전거를 끌고 산길을 헤쳐서 오어사로 내려가기로 했다.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모범적인 방법은 원래 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가는 게 맞지만,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를 왔다고 생각했기에 산길로 빠르게 이동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스님께 동냥, 죄송합니다..
오어사로 가는 길목에 있던 홍은사. 배가 많이 고프기도 했고,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절에 계신 스님께 물 한잔이라도 부탁드린 후 하산할 생각이었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어디 있을까, 절에 들어간 나는 여스님을 발견했고 여스님께 동냥을 했다.
"계세요~"
"네~ 어떻게 오셨어요?"
"스님 제가 길을 잃었습니다. 산을 이용해서 내려가려고 하는데 내려가는 길이 있나요?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물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하. 네 어서 들어오세요."
자신을 여몽 스님이라고 소개한 여스님은 씩 웃으시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스님은 땀에 쩔고 피곤에 쩔어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듯한 내 얼굴을 보시더니 배가 많이 고프고 힘들어 보인다고, 먹을 것을 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난 그저 땀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주방으로 들어가신 스님을 기다렸다. 양말이 닿는 바닥에 발 모양으로 습기가 찰 정도로 땀범벅인 상태였다. 땀이 조금 식고 진정이 될 때쯤, 스님은 라면을 주방에서 내오셨고, 절에선 남기지 말고 싹싹 긁어서 먹어야 한다며 웃으며 일러주셨다.
"감사합니다... 흑... 흑..."
"뜨거우니 천천히 드세요."
이 날 너무 힘들었던 게 그제야 억울함으로 터져 나와서 눈물의 할렐루야 소리와 함께 라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라면을 10초 컷 하고 국물까지 할짝거리며 들이키는 나에게 며칠째인지, 어떻게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를 여쭤보셨다.
"여기까지 며칠 걸렸어요? 잠은 어디서 자고요?"
"여행은 며칠째고요, 잠은 맨날 밖에서 자요."
"그렇게 오랫동안 밖에서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렇게 지금까지의 여행 썰을 들려드렸다. 3000원짜리 고등어 회 떠먹겠다고 가위로 잘라먹다가 설사한 이야기,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 고향 이야기, 학교 건축 프로젝트 이야기 등.. 스님은 재미있는 사람이라며 관심을 보이면서 이야기를 즐기셨고, 이야기가 끝나자 계좌번호를 여쭤보셨다. 그래서 여행자 명함에 계좌번호를 적어서 드리고 헤어졌다.
"자전거로 내려가는 길이 없어서 어쩌죠. 아까 올라오셨던 길로 다시 내려가서 한참 돌아가야 오어사로 갈 수 있을 거예요."
"한 바퀴 돌아서 오어사까지 가기엔 배터리가 없고 해도 지고 있어서요. 힘들어도 산길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산길이요? 그렇다면 지금 해가 지고 있으니 등산로라도 알려드릴게요. 다만 거기가 엄청 험해서 자전거를 끌고 가기엔 무리가 있을 거예요. 위험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해 지기 전까지 도착하실 수 있으시려나 모르겠네요."
"알려만 주신다면 해 지기 전까진 어떻게던 내려가겠습니다. 체력 좋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쪽 보이시죠? 저기가 등산로 입구예요. 그럼 저리로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스님! 정말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예요.."
산길을 헤쳐나가다
계단이 얼마나 많고 길이 험했는지 시간 단축은커녕 더 많은 힘과 시간이 들었다. 짐 무게까지 60kg 정도가 되는 자전거를 지면에서 10cm가량 힘겹게 들고는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는데 무릎이 파괴되고 탈골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이동을 하다가 중간쯤 내려왔을 땐 자전거를 안고 넘어지면서 크랭크 톱니 부분에 종아리가 찍혀 종아리에 크랭크가 칼처럼 살을 파고들기까지 했다. 몸에 힘이 빠졌는데, 다친 종아리에 힘까지 들어가질 않게 되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때부턴 자전거에서 짐을 분리해서 자전거 한 번 옮기고, 다시 산을 올라가서 위에 남겨진 짐을 가지고 내려오고, 그런 식으로 짐을 분할해서 산을 수십 번 오르락내리락하며 옮기기 시작했다. 지나다니는 등산객들이 나를 보더니 다리에서 피가 난다며 자전거 옮기는 일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민망한 나머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얼굴이 씨뻘개져서는 "아.. 괜찮습니다.." 하며 혼자 낑낑거리면서 짐을 옮겼다. 그냥 도와달라고 할걸.. 수줍음이 많았던 소년이었기에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못 했다.
해가 거의 다 졌을 무렵, 홍은사에서 오어사까지 등산로로 짐을 모두 옮기고 자전거도 내릴 수 있었다. 오어사에 도착해보니 오어사에 있는 사람들이 절 구경을 마치고 다들 집으로 귀가하고 있던 참이었다. 해는 완전히 졌지만 휴대폰 충전을 하면서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기에 자전거에 짐을 주렁주렁 장착하고, 라이트를 켜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힘든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휴대폰 충전도 못한 채로 일어나서 휴대폰을 잠시 켜보니 무려 10만 원의 학교 건축 후원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입금자엔 '여몽'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 어제 라면을 끓여주신 여스님께서 후원을 해주신 것이었다. 설마 스님이 후원을 해주시려나 생각했기에 더 그랬던 걸까, 이 날, 밤이 깊어가고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만 수십억 번을 반복했했다. 이 글을 통해 홍은사 여몽 스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