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게 삶의 소중함을 배운 1박 2일.
내연산 도착
때는 바야흐로 40~50일 차, 영덕에서부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기슭을 따라 난 도로를 타고 포항 내연산에 도착했다. 시간이 벌써 오후 3시이라 곧바로 관리사무소로 뛰어들어가서 메이플스토리 왕서방 NPC처럼 늠름하게 생기신 관리자분께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자전거 여행 중인 사람입니다. 정상까지 전력 질주해서 갔다 올 건데 잠시 자전거(국보 제494786호)를 맡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좋아요, 다만 해가 지고 있고 산도 험하니 정상까진 안 되고, 꼭 ㅇㅇ지점까지만 찍고 돌아오셔야 해요. 그 이상 가면 오늘 절대 못 돌아옵니다. 기억하세요. 아무리 빨리 가도 정상까진 안 됩니다. 제가 여기 수십 년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무조건 그 지점에선 돌아오셔야 해요."
"넵! 명심하겠습니다."
정상을 찍고 싶은 욕구가 커서, 아저씨는 분명 일반적인 등산 속도를 생각하고 특정 지점까지 갔다가 오라고 한 것이니, 아저씨가 예상하는 내 속도보다 더 빠르게 뛰어서 갔다 오면 정상도 찍겠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저씨가 안 보이는 곳부턴 헥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재요.. 쪼매만 기다리소 내가 고마 정상까지 갔다올랑께!'
1에 가까워지는 인구
내연산은 입구 주변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시원한 계곡과 아파트만한 높이의 폭포까지.. 바람에 맞춰 춤을 추는 나무들도 정말 예뻤다. 그런 환경 아래 피서객들은 해가 지면 바로 하산하기 위해 입구 근처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등산로에서 마주친 수백 명의 등산객들은 모두 하산하는 사람들뿐이었다. 해가 저물어 감에 따라, 산에 존재하는 인구수는 점점 1에 가까워졌다.
내리막이 있는 오르막
내연산 등산로는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반적인 등산로와는 다르게 가파른 오르막 내리막 두 가지가 함께 공존하는 기형적인 등산로였다. 그래서 오르가슴을 느끼면서 '하앍... 정상으로 가버려..!' 할 때 내리막길이 나타나서 '줬까 븅신아ㅋㅋㅋ'하면서 내리가즘을 강제로 느끼게 만들어주는데 메이플 인내의 숲에서 루팡한테 바나나 맞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르락 내리락을 수십 번 반복하다가 폭포도 만나고 계곡도 만났다. 그 상황에서 문수산 쪽으로 가서 산 능선을 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삥 돌아가야 했기에,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계곡 쪽 등산로를 이용한 것이었다. 계곡 옆을 지나면 비상시에 깨끗한 계곡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도 있고 예쁜 계곡 뷰를 볼 수도 있다는 메리트도 있었으니, 계곡 등산로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계곡 옆으로 나있는 꼬불꼬불 등산로를 타고 가다 보니 워낙 업다운이 많아서 계곡을 직접 가로질러서 가기로 했다. 계곡으로 직접 들어가니 굵직한 바위가 많이 보였다. 그래서 테트라포트를 뛰어다니는 낚시꾼들처럼 바위와 바위 사이를 점프해가며 이동했다. 그렇게 보연 폭포, 은폭포, 북호1폭포, 북호 2 폭포.. 끝없을 것만 같이 펼쳐진 계곡들을 순식간에 지났다. 그리고 이끼 낀 바위들이 보일 때 즈음, 생각해보니 주변에 사람 소리도 안 들리고 갑자기 너무 조용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니 울창한 숲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계곡 옆에 보이던 등산로도 어디로 뻗은 건지.. 찾아볼 수 없었다. 해는 거의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순간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듯한 두려움에 머리가 띵했다. 아드레날린이 상승하면서 동공은 확장되고, 심박수는 최고치를 찍었다.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긴장하게 되자 더운 날씨임에도 공포감에 닭살이 돋으면서 추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계곡은 가면 갈수록 험난해졌다. 절벽에 자란 나무뿌리를 잡고 깊은 계곡 옆을 지나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 수심이 허리춤까지 오는 구간에서 휴대폰과 카메라를 번쩍 들고 이동해야 하기도 했다. 영화 연가시를 보면 연가시가 숙주를 조종해서 미친놈처럼 물로 뛰어들게 만드는데 딱 그 꼴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우 오어 어어어 어!! 하면서 물로 막 뛰어들어서 계곡을 도강했다. 계곡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리고 가지고 온 물과 다이제는 이미 한참 전에 다 먹은 상태였다. 점점 양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배가 고프고, 힘이 풀리고. 이제 그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간다 쳐도 해지기 전까지는 절대 입구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난 오늘 아무런 장비 없이, 내연산에서 맨몸으로 살아남고 다음날 정상을 갔다가 오리라고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다음날 아침에 향로봉을 찍고 하산하기로 했다. 앞으로 해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시간. 딱 한 시간은 어영부영 보내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기로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
배가 너무나도 고픈나머지 힘이 없어서 이동하는데 쓰러질 것 같이 힘이 들었다. 등산로를 이탈했기에 한 번 쓰러지면 구조대가 날 찾을 수도 없는 위치였다. 숲에 고립된 나에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데 그때 하늘이 날 돕는 건지 내 눈 앞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이름 모를 등산객이 던져놓고 간..... 소시지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역시 하나님은 싸롸계십니돠!! 와아아!! 우 오어 어아아 아!!"
"아 진짜 너무 감사해요 하나님.. 아 기분 좋다!! 살았다! 난 이제 살았다!!! 우와 아아아 아아아 아!!"
고작 소시지 한 개였지만 아사하기 직전에 소시지를 천천히 먹자 지금까지 두렵고 힘들었던 모든 것이 바람에 깃털이 휘날려 가듯 잊혔다. 미친 듯이 배고플 때 먹는 소시지의 맛은 정말 달콤했다.
비박
배터리, 먹을 것, 입을 것, 취침 도구 모두 없었지만, 다음 날 변사체로 발견되기 딱 좋은 목숨은 남아있었다. 지근거리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잡고 지금이라도 돌아갈지 고민해봤으나 이 밤중에 배터리가 금세 닳아버리는 LG 지프로 플래시를 켜고 입구까지 뛰어간다면 중간에 배터리가 모두 닳아버릴 게 뻔했다. 그래서 불확실한 방법에 주사위를 던지느니 배터리를 잘 아껴서 비박시 혹시 모를 상황에 요긴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잠자리를 찾기 위해 바람이 많이 부는 계곡보단 나무가 있어서 바람이 막아지는 산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잠시 뒤, 산 중턱에 도착해서 맨몸으로 맨바닥에 누웠다. 돌멩이와 나뭇가지가 잔뜩 흩어져있는 맨바닥에 누우니 허리가 쑤셨다.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누워도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불편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특히 밤이 되자 산모기가 정말 셀 수 없이 달라붙었다. 적어도 500마리는 왱왱거리며 주변을 맴돌았고, 잡아도 잡아도 끝이 안 보였던 산모기들은 순식간에 빨대를 꽂고는 강제로 채혈을 했다. 그 상황에서 모기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실시간으로 물리고만 있었다.
통화
가족들 목소리가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꺼놨던 휴대폰을 켰다. 모기가 화면 주위로 달라붙어서 엄지로 쿡 눌러서 죽였는데 피가 스크린에 쫙 뿌려져서, 옷으로 슥슥 닦았다. 집에 전화를 연결하니 엄마와 아빠는 집에 있었고, 편안하게 TV를 보며 음식을 먹으면서 나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전화를 하다 보니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의 세상은 정말 다른 차원인가? 싶어서 괴리감이 컸다. 마치 끝없는 어둠 속에 있으면서 저 멀리 한 지점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래서 다음에 통화하겠다고 말하고는 얼른 전원을 꺼버렸다. 그래.. 이 지옥 같은 상황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으랴. 그리고 말로 표현한다 해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랴. 그저 해가 서둘러 뜨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음 날 새벽,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미명에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덜덜 떨며 일어나서는 몸 상태를 확인했다. 산에서 구르다가 긁혀서 살점이 뜯겨나갔고 군데군데 피가 맺힌 흔적과, 모기한테 수백 방을 물린 곳들에 독기가 안 빠져서 뽁뽁이처럼 올라와있었다. 거기다가 가장 심했던 고통은 맨바닥에 자서인지 온몸이 근육통에 찢어질 것만 같았다.
향로봉
해가 뜨자마자 내연산의 경치를 모두 감상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계획대로 향로봉으로 향했다. 해발 930m의 경치를 감상했는데 경치가 나무에 가려져서 별로 경치랄 게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정상석을 발견한 것에 위안을 삼갔다. 이틀째만에 만난 '향로봉'이라고 적힌 비석이 어찌나 그렇게 반갑던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양 눈물겨워했다. 정상을 지나선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바윗길을 타고 내려가서 하옥리라는 곳으로 향했다. 정상도 다 봤는데 입구 쪽으로 가지 않고 하옥리로 내려온 이유는 이젠 더 이상 먹을 걸 못 먹으면 죽을 것 같이 배가 고팠는데 입구보다 가까운 게 하옥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옥리에 내려온 시각은 12시경, 1시간 정도 걸으니 상가건물이 몇 개 보였고 다행히도 구멍가게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고열량 식품을 찾아서 다이제를 2통, 소라과자를 하나 구입했다. 마트에서 먹거리가 든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왔을 때의 기분은 마치 무인도에 고립되어서 돌멩이로 SOS 만들고 불 피우고 온갖 난리를 다 피우다 섬 반대편으로 갔는데 마을에 있는 시장을 발견해서 머쓱해진 듯한 느낌... 혼자 영화를 한 편 찍고 온듯한 기분이었다.
짜장면 섭취
밥을 못 먹은 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냥 가기엔 조금 섭섭해서 짜장면집에서 짜장면을 한 그릇을 주문했다. 거의 굶은 상태였기 때문에 허겁지겁 먹느라 짜장면은 씹어지지 않았고 순식간에 흡입되어 뱃속으로 직행했다. 짜장면은 눈물을 질질 짤 정도로 맛이 있었다. 아마 여기 사장님은 짜장면계의 모차르트가 아니셨을까 싶을 정도였다. 짜장면 흡입을 마치고는 다시 내연산 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계곡을 거쳐서 입구로 가는 게 아닌 문수산 능선을 타고 내연산 입구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을 되돌아가는 길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개고생을 하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다이제를 먹다가, 아참 시간이 얼마 없지 싶어서 그때부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뛰었다. 산 정상까지 정말 한 번도 안 쉬고 뛰어올라갔고, 문수산 능선을 지날 때도 뛰었다. 결국 내연산과 문수산을 모두 지나서 해가 지기 전에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저씨와의 재회
관리실에 도착하자 아저씨는 내가 돌아온 걸 얼마나 반가워하시던지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하루가 지나서 왔냐고 눈물 섞인 어조로 물어보셨다. 관리실에 앉아서 차근차근 상황을 말씀드리니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말라고,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아저씨의 말씀을 들어보니 아저씨는 내가 오늘 밤에도 돌아오지 못한다면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들과 함께 수색작업을 벌일 계획이었다고 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고,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굉장히 죄송스러웠다. 또다시 자전거 여행을 지속해야 했기에, 아저씨와의 가슴 아픈 눈물의 재회를 뒤로하고 인사를 드리고 자전거를 끌고 가려고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아저씨는 잠시 기다리라며 관리실로 뛰어가셨다. 그리고 관리실에 있는 과자, 물, 수박 등 모든 음식들을 싸오셔선 굶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며 짐받이에 모두 실어주셨다.
교회로
그 날 해가 완벽히 지기 직전에 한 교회에 도착했고, 목사님께 '이러이러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를 거둬달라고 부탁드렸다. 다행히도 목사님께선 정말 따스하게 맞이해주셨고,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아서 전 날 축적한 피로를 모두 풀 수 있었다.
라이딩 돌입
다음날, 비가 왔지만 하루 더 묵는 건 너무 민폐인 것 같아서 인사를 드리고 교회를 떠나 곧장 빗길을 달렸다. 등산만 아니라면 뭐던 환영이었다. 빗길을 달리는 길에 마트를 계속해서 지나쳤는데 전 날까지만 해도 구멍가게 하나 찾으려고 기를 쓰고 다녔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오후가 되니 하늘이 온통 먹 섞인 비구름으로 뒤덮이고 장대비가 총알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이 말이다. 체온이 떨어져서 입술이 퍼레진 상태로 비를 맞고 달리는데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우비를 입긴 했지만 일회용이라 비가 다 셌다. 옷을 말리고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비를 맞으며 멍청히 서있을 순 없으니 대피할만한 정자나 건물이 나올 때까진 계속 달려야 했다. 바람은 심했고 차량들은 쌩쌩 내달리며 물을 튀기고 지나갔다. 해는 어느새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저 멀리 십자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염치없게도 따스한 주님의 은총을 또 한 번 기대하며 이틀째 교회 숙박을 소망한 채로 십자가를 향해 달렸고, 하수구 생쥐처럼 쫄딱 젖은 채로 교회에 도착해서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을 똑똑 두들기고 들어갔다. 그곳엔 목사님이 앉아계셨다. 그리고 조금 놀라신 것 같았다. 목사님은 인사를 하시더니 저녁예배시간에 설교할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고 계시던 참이었다고 하셨다. 차근차근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과 현재 사정을 말씀드렸는데 감사히도 목사님께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사모님은 이렇게 추운데 자전거를 타고 밖을 돌아다니냐고 하시며 곧바로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을 끓여와 주셨다. 호로록 먹는데 온몸이 녹아내렸다. 입에선 방언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맛있는 라면은 세상에서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 사모님께선 분명 라면계의 바흐이심이 분명했다.
예배 참석
식사를 마치고 교회 사택에서 짐을 풀고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예배에 참석할 의사를 여쭤보시기에 참석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씻은 뒤, 시간을 맞추어 저녁예배에 참석했다. 은혜로운 저녁예배 설교는 감동스러운 찬송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뒤엔 교회 광고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아프리카에 학교를 지으려고 전국일주 중인 청년으로 소개되었고 교회 분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머쓱하게 일어나서 인사를 하자 교회당에 있던 분들은 박수와 우렁찬 아멘으로 인사를 받아주셨다. 그렇게 광고시간이 끝나고 기도시간이 되었을 때, 누군가 내 옆으로 온 듯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바지 주머니에 종이를 쑤셔 넣어서 깜짝 놀랐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교회 권사님들 중 몇 분께서 기도시간에 몰래 오셔서 헌금 낼 돈을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일에 후원하려고 내 주머니에 쑤셔 넣으신 것이었다. 총 네 분이 후원해주셨고, 그렇게 학교 건축자금에 익명으로 4만 원이 보태졌다. 다음 날 목사님에게 감사드린다고 꾸벅 배꼽인사를 드리고 교회 밖을 나섰다. 아침에 다시 밟게 된 페달은 전 날보다 훨씬 새로운 느낌이었다. 포항 기북 교회 권시혁 목사님.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립니다.
학교 지을 사람 구합니다
그 뒤로 난 계속 자전거를 타고 남하하면서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어서 홍보를 하고, SNS 팔로워분들을 만나서 후원금을 받았다. 적은 액수였지만, 비정기적으로 몇 만 원씩은 쌓였다. 물론 목표액인 2천만 원엔 한참 못 미치는 액수였지만, 그럼에도 언젠간은 채워지겠지 하는 소망이 있었기에 가슴에 품은 소망을 원동력 삼아 여행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