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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Jun 06. 2019

차디찬 첫 번째 겨울

생존의 계절.

차디찬 첫 번째 겨울

유리창 하나 없이 360도가 뻥 뚫린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날씨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하루 24시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부터 지금껏 수십 일간 찜통 날씨가 지속되었는데, 며칠 사이에 바람이 선선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찬바람과 함께 기온이 쭉 떨어졌다. 이제 낮에도 반팔만으로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날씨가 변하자 수온도 내려갔다. 시끌벅적했던 해수욕장은 어느새 텅텅 비었고, 계곡물도 말라서 물놀이를 하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드디어 처음 경험하는 외로운 계절의 시작이었다. 겨울은 외로움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지금껏 겨울 날씨에 수십일 이상 주행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낯선 겨울의 등장은 굉장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당시 지갑엔 20만 원도 없었다. 구멍이 뚫릴 정도로 바닥을 드러내는 실정에 혹여 한겨울 무전여행을 해야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일단 경비를 아낄 방법부터 찾기로 했다. 



라면

경비 지출에 있어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식비였다. 즉, 식비를 줄일 수 있다면 더 오래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저렴하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깊은 고민 끝에 식단을 하나로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바로 라면이었다. 그것도 일반 라면이 아닌, 300원짜리 라면사리와 온라인에서 구입한 대용량 라면수프의 조합이었다. 수프가 동봉되어 있는 일반 라면은 몇백 원 더 비쌌기 때문에 수프가 없는 라면사리를 마트에서 개당 300원 이하에 구입했고, 대용량 라면수프를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씩 퍼서 끓여먹은 것이었다. 고작 2천 원에 주고 산 대용량 수프의 양은 굉장했다. 그래서 아무리 먹어도 수프 값은 거의 들지 않았다. 면사리도 한 개에 300원이니 한 끼에 아무리 먹어도 600원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라면을 먹으며 다니다 보니 모든 게 라면값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식당밥 6천 원은 라면사리 20개에 달하는 사치로 보였고, 1000원짜리 음료수는 라면 다섯 개를 포기해야 마실 수 있는 사치로 말이다. 나중엔 천 원짜리가 동전으로 쪼개지는 것도 싫어져서 화장실 물이나 음수대 물을 받아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하루 식비는 그렇게 1000원 정도밖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3만 원에 한 달을 버틸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세이브 더 칠드런 광고에 내가 나와도 될 판이었다. '3만 원이면.. 이 청년이 한 달을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을 도와주세요...' 하며 말이다. 그렇게 식비를 극적으로 줄이면서 여행을 지속했다.



지붕 없이

청도 얼음골 케이블카 주변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저녁이 되어 한 등산로 앞에 있는 공터를 지나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왕래하지 않기에, 여기다 싶어서 푹신하게 낙엽이 많이 쌓인 한쪽 구석에 비닐과 침낭을 깔고 잠을 청했다. 안타깝게도 그날 밤,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산에 있던 모든 나무들이 바람에 뒤흔들리는 소리에 몇 번씩이나 잠에서 깼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새벽 미명이 되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속하게도 비는 보슬보슬 내리지 않고 영화 300에서 화살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미친 듯이 쏟아졌고 지리상 깡촌 한복판이었기에 어딘가로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기 시작하는데 자는 도중에 얼굴로 차가운 비를 맞는 그 심정은 마치 스트레스 원액이 있다면 물에 타지 않고 원액 그대로 목 뒤로 넘기는 것만 같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우비를 입으니 침낭은 젖었고 가방엔 물이 들어간 상태였다. 머리도 비를 맞아서 얼굴을 타고 또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도로로 나가보니 온 도로가 빗물에 젖어서 떨어지는 비가 왕관 모양으로 튀기고 있었다. 나는 일회용 비닐 우비를 뒤집어쓴 채로 도망가듯 달렸는데, 가다 보니 한 버스정류장이 보이길래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버스정류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너무 추운 나머지 가스버너를 꺼냈다. 불을 켜고, 손을 불 쪽으로 내밀어서 떨어진 체온을 달랬다.


쿠콰광!! 쿠컹!! 콰콰쾅!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다 보니 이젠 번개까지 쳤다. 부탄가스도 다 떨어져서 가스불이 꺼졌다. 몇 번 흔들어서 불을 다시 살렸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제엔장... 가스버너가 완전히 꺼지자마자 정자가 냉동 보관될 정도의 추위가 온몸을 감쌌다. 몸은 얼어붙었고, 살고 싶단 생각에 두뇌가 풀가동됐다. 그러던 중 때마침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를 살릴 일본의 한 연구결과뇌리를 스쳤다. 그것은 바로.. 88.2 파스칼이었다. 


그렇다. 88.2 파스칼..! 88.2 파스칼이었던 것이었다. 일본의 한 실험에서 D컵 여성의 가슴을 만지면 손에 느껴지는 압력이 88.2 파스칼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60km/h로 달리는 자전거에서 바람에 의해 받는 압력이 87.87 파스칼이니 자전거를 타고 시속 60km로 주파하며 이 미친듯한 바람을 맞으면 온몸이 가슴에 파묻히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설레는 마음에 심박수가 180까진 치솟을 것이고, 혈압이 평상시의 수축기 때보다 40∼100㎜Hg, 확장기 때보다 20~50mmHg 상승될 테니 체온이 자연스레 상승할 수밖에 없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정리하자면 허벅지가 터질 듯 페달을 밟으면 가슴에 파묻히는 효과를 보게 되고, 그 때문에 체온이 올라가서 목숨을 건질 수 있단 것이었다. 그리하여 앞기어를 2단으로 걸고 빗길을 폭주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체온은 88.2 파스칼의 원리에 의해 펄펄 끓기 시작했고, 빗물을 마치 모세 홍해 가르듯 양쪽으로 가르며 밀양 쪽으로 나아갔다.



안인리 유원지 체육공원

빛의 속도로 아리랑의 고향인 밀양으로 향했다. 밀양 시내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밀양 상동면 안인리에 위치한 유원지 체육공원에 도착했을 무렵, 때마침 소나기가 잠시 멈춰서 서둘러 자리를 폈다. 앞으로 비가 또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밤까지도 누울 자리를 못 마련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누울 자리를 준비하고 나니 비가 보슬보슬 떨어졌지만 전과 비교하면 잠시 주춤한 상태였다. 비가 잔잔히 떨어지는 타프 아래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한 편 봤고, 생존일기를 작성했고, 그간의 추억들을 되돌아보며 회상에 잠겼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 비가 또 쏟아지는 바람에 자리를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한 채로 이틀 밤을 보냈다. 누워서 하루 종일 있으려니 허리가 배겨서 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망할 비.. 그만 좀 와라!'

 


이재민

이틀 뒤 이른 아침, 태풍이 온 것처럼 바람이 많이 불었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지더니 장대비가 타프를 찢어버릴 듯이 내렸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간 타프가 정말 날아가버릴 것만 같아서 얼른 눈을 떴다. 휴대폰을 찾기 위해 손을 옆으로 뻗어서 휴대폰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손이 바닥 쪽에 닿았을 때 첨벙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뭐지? 싶어서 보니 바닥이 수영장이 되어있었다. 잠을 잤던 곳의 지대가 낮아서 밤새 내린 비가 웅덩이를 형성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깔고자던 에어매트리스 덕에 몸이 물에 젖진 않았으나, 대용량 배터리와 휴대폰 배터리, 침낭 등.. 바닥에 내려놓았거나 바닥에 한 번이라도 내려간 적이 있던 모든 장비가 물에 침수되었다. 영화 박하사탕에서 나온 설경구의 나 돌아갈래 한 마디가 깊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당장 경비가 얼마 없었고 겨울 장비도 없었다. 옷가지와 장비들은 모두 침수되었다. 해라도 떴으면 건조할 수 있었겠지만 며칠째 내리는 비에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계속 전진을 한다면 앞으로 며칠간 찬바람을 맞으며 덜덜 떨면서 다닐 것은 물론이요, 그 뒤로도 헌 옷 수거함에서 겨울옷을 가져다가 입고 무전여행을 하면서 동냥으로 연명하지 않는 한, 여행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결국 고민을 하다가 이참에 밀양 시내에 정착해서 돈을 벌어서 재출발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는, 정착을 목표로 10만 원대의 고시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수중에 20만 원도 없어서 10만 원대로 찾아본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고시원을 알아보다가 전화드렸는데요, "

"예 안녕하세요. 방 보러 오세요."

"금액대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10만 원이요."


네이버 지도를 통해 밀양의 고시원들을 알아보면서 몇 번의 전화 끝에 가장 가격이 저렴한 곳을 찾아냈다. 가격은 한 달에 10만 원. 한 달에 10만 원을 받는 그 고시원의 시설이 어떤 지는 눈에 훤히 보일 듯이 그려졌지만 그저 비만 피하면서 잠을 잘 수 있고, 주변 인력소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기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10만 원짜리 고시원

"아까 전화드린 사람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방을 보여주며)이 방이에요. 어떠신가요?"

"괜찮네요. 한 달 사는 걸로 할게요."

"그럼 오늘부터 하시겠어요?"

"네. 월세를 선불로 지금 바로 드릴게요. 여기 10만 원이요."


엘리베이터 없이 4층에 위치한 고시원에 올라가서 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1평짜리 방을 안내받았다. 공간도 널찍하니 괜찮았다. 비록 화장실은 밑에 층에 키를 가지고 내려가야 했고 샤워시설조차 없었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비를 맞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됐다. 짐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모든 짐을 다 끄집어내 보니 방안이 꽉 찼다. 몇 시간 만에 짐을 모두 정리하고, 한쪽엔 에어매트리스를 깔아놓고, 한쪽엔 자전거를 세워놨다. 매트리스에 누워서 천장을 보다가, 문 위쪽으로 모기장이 길게 쳐져있는 곳이 보였는데 쭉 찢어져서 모기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이런 곳에 사람을 받는구나 싶어서 정말 놀라웠지만 10만 원에 뭘 바라냐는 생각에 그 정도는 감안하기로 했다. 그날 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경비가 없어서 한동안 정착을 해야 하는데 정착해 있는 동안 경비를 벌 거라서 집에 있는 안전화를 보내달라고 말씀드렸다. 며칠 뒤, 부모님이 보내주신 안전화가 고시원으로 도착했다. 택배가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인력소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하루 9만 원, 10만 원씩 벌어나가며 재출발의 날만을 손꼽아 준비했다.

 


고시원 이야기

쭉 찢어 모기장으로 모기가 들어와서 귀에 에에엥 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잠에서 깨고, 물리고, 뜯기고, 부어오르고, 정말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어서 물고 도망가는 모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나는, 엄두가 안 나서 방충망을 수리할 생각은 못하고 에프킬라를 계속해서 칙칙 뿌리며 버텼다. 그뿐만 아니라 방음력이 제로에 가까웠던 것이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었다. 복도 건너편 방에 쉬는 사람들과 구구단을 할 수도 있는 정도였다. 거기에 하수구 냄새도 끊임없이 올라왔고, 샤워시설과 세탁기가 없어서 공용 식당 옆에 딸린 발코니에 외부로 돌출된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사람들 몰래 씻었다. 빨래 또한 비누로 손빨래를 했다. 생활에서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사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간이야 뭐 계속 자라니까 간이라도 조금 떼다가 팔고 300에 30짜리 월세방을 잡아야 하나 생각 정도였다. 결국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못 팔았고 매일 에프킬라를 뿌려가며, 스트레스 한계치를 넘겨가며 살았다. 물론 좋았던 점도 있었다. 10만 원짜리 방이지만 공용 주방에 김치가 무료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매일 라면을 먹을 때 김치를 듬뿍 넣고 김치라면을 해서 먹을 수 있단 점이 굉장히 맘에 들었다. 


레깅스의 여고생 썰

앞 호맨날 똑같은 레깅스 차림에 떡진 머리를 하고 살던 여고딩 2명이 있었다. 고시원에 샤워시설과 세탁기가 없어서 씻기에 제약이 있는 건 맞긴 하는데 그걸 핑계 삼아 작정하고 씻는 걸 포기한 건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쉰내를 풍기던 무자비한 고딩들이었다.. 게다가 뚫린 모기장으로 대충 들어보니 현재 가출한 상태고, 인구가 얼마 없는 지역 특성 때문에 그런 건지, 똑같은 동네 남자애들을 번갈아가며 만나면서 "걔랑 사귀어? 내가 걔 그전에 사귀었는데 별로던데" 하면서 잘 나간다, 잘 논다 하며 사는 애들인 듯싶었다. 맘 같아선 반달가슴곰처럼 생긴 자식들이 그 얼굴에 돈도 없으면 새벽 6시에 인력소 대기실에서 커피 뽑아먹으면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지 어디서 셀룰라이트 벅벅 긁으면서 고시원에서 떠들고 자빠져 있어? 하며 참교육을 시전 해주고 싶었지만 저 우람한 마인부 두 명을 감당할 용기가 도무지 나질 않아서 쒸익쒸익 거리며 참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 처자들의 생활패턴이 바뀌었는지 밤마다 낄낄거리고 소리 지르며 노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고 심기에 상당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며칠씩이나 시끄럽게 돌고래 소리를 삑삑 지르다 보니 마찰이 생기게 되었는데 나와의 마찰이 아닌, 고딩들이 사는 호수 바로 옆 호에 있던 형님과의 마찰이었다. 형님은 동네 이장처럼 생겨서 맨날 헤진 와이셔츠를 입고 방 안에서 티브이를 보면서 소주를 마시고, 지나갈 때마다 토할 것 같은 겨드랑이 찌든 내를 풍기50대 중반(추정)의 호리호리한 남성이셨다. 


답 없는 핑돼 마인부 처자들의 소음이 정확히 나흘째 지속되는 날 새벽이었다. 형님의 분노 게이지가 옥황상제의 똥꾸녕을 찔렀을 때 드디어 천지가 촥 열리며 개벽되고 저지먼트 데이, 심판의 날이 찾아왔다. 친애하는 형님께선 새벽에 기분 좋게 몽정하시다가 방해를 받으셨는지 갑자기 난데없이 씨발!! 하면서 일어나셔선 고등학생들이 살고 있는 소굴 입구를 문을 부술 듯이 주먹 가지고 쾅쾅쾅 쾅 때리면서 "야!!! 이런 씨발!!! 개년들아!!!! 조용히 안 하나! 야!! 개간년들아!!! 이런 개 같은 년들!!!" 하면서 사자후를 내뱉으셨는데, 나는 밤중에 화들짝 놀라서 깼는데도 너무나도 신이 나서 방 문을 1mm 정도 빼꼼 열고 그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형님은 술기운에 휘청거리시면서 발로 고딩소굴의 입구 밑부분을 걷어차셨다. 그리고는 "에이 씨팔!" 한마디 하고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복도에 나오지 않고서 그 상황을 엿듣고 있었고 그 장면은 마치 자기들도 맞을까 봐 찍소리 못하고 대항하지 못하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조연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그  이이제이라는 뜻밖의 성과를 이룬 나는 행복감에 젖어 그 형님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를 코리안 조커, 즉 영웅으로 존경하게 됐다. 그게 고시원 사람들 모두의 행복이 될 줄로 알았다. 이젠 다시는 안 그러겠지 생각하면서 문을 잠그고 바닥에 누웠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레깅스 여고딩들은 개념을 상실한 건 정신을 못 차리고 오히려 도발 수준을 격상했다.


닭을 산채로 끓는 물에 처넣을 때 내는 소리..

톰이 쥐 덫을 밟았을 때 내는 소리...

지금이 백악기인가 싶은 익룡 소리까지... 


그럴 때마다 형님은 멘탈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폭발해서 문 앞에 서서 사자후 한 번 시원하게 뱉어주셨고, 고딩들은 내성이 생겼는지 잠깐은 조용했지만 또 소리 지르고 또 욕 쳐 먹고 또 소리 지르고 또 욕 쳐 먹고 이걸 정말 하루에도 세 번은 반복했던 것 같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황은 끝날 줄 모른 채 나락의 수렁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주방에서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복도를 지나고 있었는데 형님이 뚜껑이 제대로 열리셨는지 배때지 열고 순대 줄줄 뽑아먹을 포스로 입에 거품 물고 반쯤 남은 소주병을 휘휘 돌리면서 방구석에서 기어 나오시는 걸 보게 됐다. 형님이 처자들을 조져버리겠다고 술기운을 무기 삼아서 강제로 잠긴 문을 열려고 문을 발로 차셨는데 이건 정말 경찰을 부를 상황으로 번지겠다 싶어서 호다닥 달려가서 저지하기 시작했다.


"아이~~ 고마 이 정도 했으면 됐십니다 행님~~ 고마 됐어요~ 예?"

"아니 놔봐! 저 씨발련들이 어? 동생야, 넌 내가 잘못한 거라 생각하냐?"

"아니죠 형님! 전 무조건 형님 편이죠! 저분들이 잘못하셨네!"


결국 형님은 주옥같은 표정으로 허리에 양손을 딱 얹고 오만 욕을 다 하셨다. 그래서 그대~로 방으로 데리고 가 결국 형님은 10분간 신세 한탄하시면서 강소주 반 병을 꿀떡꿀떡 원샷하셨고, 바닥에 누우면서 상황이 종료됐다결국 미친년 두 명 못 이겨서 쩔쩔매다가 며칠 뒤에 "개씨팔련들.." 하면서 퇴실한 걸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는데, 후 3일쯤 뒤 인력소 일이 없어서 공용 부엌에서 소소하게 라면 끓여먹으면서 쉬고 있을 때 여고딩 두 명이 자기들도 뭘 먹으러 왔는지 아니면 저번처럼 내 계란 두 개 훔쳐서 프라이 하나씩 해 먹으려 했는지 암튼, 부엌에 와서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 이제 친구 자취방에서 살려고요"

"아 그래요? 왜요?"

"저 아저씨 하는 거 봤어요? 스트레스받아서 못살겠어요."

"예? 하하.. 네. 좋은 환경으로 가신다니 잘 된 거죠."


걔네는 결국 그 말을 하고 정말로 방을 비웠다. 형님은 이미 며칠 전에 방을 비우신 상태였는데, 여고생들은 아마 형님이 계속 계신 줄로 알고 떠난 것인 듯했다. 결과적으론 난 홀로 남겨지게 되었고, 한동안 조용해서 매우 좋았지만 가끔은..... 가끔은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져서 그립기도 했다.



고달픈 농업

밀양이라는 도시는 건설현장보다는 농업 쪽에 일거리가 많았다. 매일 인력소를 가면 밭으로 끌려 나갔는데, 농사일이란 게 육체노동 중에 가장 힘든 일임을 몸으로 배웠다. 공사장에선 흙먼지 좀 마시다가 자재 좀 날라주고 삽질만 잘해주고 5시쯤 안전화 먼지 탈탈 털고 시마이! 외치면 그게 하루 일과 끝이었는데, 밭에선 손 가는 과정이 한두 개가 아니고 몸져누울 정도로 몸을 써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서 힘쓰는 걸로 치면 공사장에 2배는 힘들었다. 게다가 현행법은 농축수산업에 대해 법정 근로시간, 휴게시간, 주휴일, 가산임금 등을 모두 배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퇴근시간도 농장주 마음대로였다. 그래서 밤 8시에 퇴근하고 일당을 받아가고 그랬는데, 며칠 그렇게 다니면서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고용노동부에다가 민원 넣어서 이거 초과근무수당 미지급으로 신고 가능하냐니까, 고용노동부에선 농업은 일당만 잘 챙겨주면 시간 제약 없는 직군이라 얼마나 부려먹던지, 저녁 몇 시에 끝내던지 신고도 못한다는 답변을 듣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옛날 흑인 노예 목화솜 따는 문화를 수입한 건지 신안군 염전 노예를 벤치마킹한 건지 제기랄.. 규제 없는 현대판 노예 양성에 힘써주는 정부에 리스펙을 보냈다. 뤼스펙! 


눈에 대추 맞은 썰

대형 대추농장에서 며칠 일한 적이 있었다. 이 농장에선 몇몇 사람들은 대추를 털었고, 몇몇은 대추를 주웠고, 몇몇은 대추를 운반했고, 몇몇은 대추를 세척, 건조, 냉동하는 작업을 나눠서 했다. 대추를 딸 때는 대추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는 장비로 대추를 바닥에 떨어뜨려서 땄다. 엔진에 갈고리 하나 달린 막대기가 달려있어서 그걸 어깨에 들쳐 매고 갈고리로 대추나무 가지를 잡은 뒤 엔진의 힘으로 덜덜덜 떨면서 대추나무를 흔들면 대추가 땅에 떨어지는 기계였는데, 그게 장비가 워낙 무겁기도 하고 진동이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근육이 떨리고 팔이 저리기에 보통 막일 밥 20년씩 먹은 작업반장이 해도 저녁 되면 x발 x발 하면서 다음날 못 나온다고 인력소 사장한테 찡얼거리고, 다음날은 다른 반장이 하다가 또 못 나온다고 찡얼거리는 걸 반복하는 장비였다. 그래서 그걸 잡는 사람은 일당+3만 원을 더 받아갔다. 힘이 무척이나 드는 일이었기에 보통 짬이 좀 찼다 싶은 아저씨들이 잡았고,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사업에 실패해서 인력소에 처음 나왔다는 형이 "왜 아저씨만 단가 높은 거 하죠? 나도 좀 합시다. 좋은 건 좀 나눠가며 해야지 혼자 욕심부리지 마소." 하면서 자신도 하고 싶다고 툴툴대기에 결국 반장이 "여기 해보쇼 그럼" 하고 장비를 줬는데 1시간 만에 팔 근육에 경련이 왔다면서 오늘 일 그만하고 병원 가게 자기 1시간 일한 거 돈 달라고 해서 2만 원인가 받아서 택시 타고 빤스런 했다. 다른 반장들이 그 꼴 보고 실없이 웃다가 나보고 장비를 잡아볼 생각 없냐길래 내가 저 형보다 노가다 짬을 얼마나 먹었는데.. 하면서 "3만 원 가즈아~!!"를 외치고 대추를 털기 시작했다. 지금껏 나름 막일짬도 몇 개월 먹었고 운동도 열심히 했기에 체력은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작 3분 만에 대추 한 알이 눈으로 정확히 떨어져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고.. 눈물이 앞을 가렸고.. 심봉사가 되는 줄 알았다. 당시에 안전 고글은 무슨 안경도 안 끼던 때라 괜히 대추 한 알을 더 맞을까 봐 반장 아저씨한테 장비를 바로 넘겼다. 


막걸리

작물 하나에 들어가는 작업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쉴 틈 없이 바쁘게 일했는데,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 있었다평화롭게 코딱지를 파던 농장주에게 인부들이 농민봉기를 일으킬 듯이 달려가서 근무 중에 왜 참(브런치)도 안 주고 일 시키냐, 이건 아무리 동네 일이라고 해도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입에 거품을 물어가며 따질 때였다. 그럴 때가 되면 사장이 아휴 알았다~ 하고 '참시간'을 허락했다. 가부장적인 형님들이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한테 막무가내로 막걸리를 가져오라고 시키면 아줌씨들은 옛날 분들이라서 아주 순종적으로 막걸리를 가져오셨는데, 난 그동안 눈치껏 대추 담는 플라스틱 박스를 뒤집어서 아재들이 앉을 수 있게 만들고, 박스를 또 뒤집어서 테이블도 만들었다. 그다음 눈치껏 대추를 몇 개 가져와서 그걸로 안주를 세팅했고 아줌마 아저씨 모두 삼삼오오 모여들어서 대추 박스에 앉으면 준비 완료였다. 대추밭은 그때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변해서 다들 여기가 잔치집이라도 되는 양 헤벌쭉해서는 기가 막힌 잔소리와 함께 막걸리 몇 잔을 크으으 하며 들이켰다. 취기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이 되면 농장주가 와서 뭐 같은 표정으로 "이제 꽤 많이 놀았는데 시작하지요?" 했는데, 싹 다 죽을상으로 한 명씩 일어나면서 농장주는 쉴 틈을 안 주는 x새끼라면서 한 마디씩 하면서 작업하러 가고 그랬다.


초과근무

해가 넘어가도 창고 안에서 대추 적재작업을 하다가 해산하는 때가 종종 있었는데 사람들이 작업을 끝내고 임금을 받을 때 이 시각까지 부려먹는데 돈을 이렇게 주는 건 아니지 않냐고 불만을 제기하면 농장주가 만 원짜리를 다발로 들고 와선 한 장씩 나눠주면서 에이 좀 봐줘하는 식으로 어르고 달래서 인부들을 위로했다. 나는 돈이고 나발이고 빨리 고시원에 들어가서 모기 물리면서 쉬고 싶었는데, 택시도 안 잡히고 버스도 없는 곳이라 혼자 가지도 못하고 제기랄.. 초과근무를 할 때마다 정신적으로 힘들어했다.


배어서 개꿀맛

청와대에도 납품한다던 1등급 배 농장에 간 적이 다. 밭이 비탈진 산에 있어서 배를 빠르게 운반하기 위해 설치된 레일을 따라 트레일러가 다녔다. 트레일러는 한라산에 설치된 것과 동일하게 사람도 타고 물건도 싣는 그런 트레일러였다. 이 배밭은 풀이 무성하고 길이 매우 험해서 무조건 트레일러를 이용해야 이동할 수 있었는데, 농장주 아재가 중턱쯤에서 트레일러를 스탑 시키면 노예들은 알아서 특수부대원처럼 배밭으로 다이빙을 했고, 배밭에서 노동요를 틀어놓고 배를 따서 박스에 적재했고, 배가 담긴 박스를 트레일러에 싣는 작업을 했다. 나는 밀양을 얼른 떠나고 싶다우물 밖을 나가고 싶은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면서 부지런히 배를 따고 있었다. 그런데 배 박스를 들고 트레일러에 실으려고 트레일러 쪽으로 달려갈 때, 풀 숲에 있던 뭔가를 밟고 전방으로 미끄러지면서 배 박스에 정통으로 턱을 찍었다. 턱을 찍을 때 혀를 씹어서 정말 눈물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는데, 같이 갔던 형이 이 x끼 배 따다가 왜 쳐 울고 x랄이냐며 웃었다. 그러다가 너무 웃어서 미안했는지 내가 들고 있었던 배 박스에서 본인 것도 아닌 배를 예쁘게 먼지 털어서 건네주더니 "일하다가 다쳤는데 배 하나정돈 먹어도 돼! 이거 먹고 털어내라!" 이랬다. 순간 당황해서 "아 진짜요?" 이러면서 배를 넙죽 받아 들고는 "음 이거 청와대 납품하는 거라고 했죠? 엄청 맛있네요?하면서 배를 먹었다. 먹다가 생각해보니 배 하나에 기분 좋아하는 내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을 헤벌쭉 웃다가 다시 배를 따러 갔다. 그 뒤로 심심할 때마다 그 형이랑 몰래 배 서리를 해서 먹고, 씨는 안 보이는 곳으로 던져버렸는데 그 배 농장에 배나무 몇 그루 더 생기면 백퍼 내가 던진 게 자란 거다.(사장님께 죄송..)



돈을 모았다

그렇게 밀양에서 정착해서 생활하면서 두어 달쯤 일해서 구멍 나기 일보직전인 타이어도 새로 갈고, 패딩도 저렴하게 한 벌 맞추고, 겨울장비 몇 개 사고, 경비도 마련해서 다시 출발했다. 겨울 시즌이 시작되었지만 경험이 없기에 하루하루 잠자는 것도 어설펐고, 먹는 것도 어설펐고, 시간관리도 어설펐지만 고된 일에서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추위

자고 일어나면 신발이건 패딩이건 밖에 내버려 둔 건 모두 서리가 내리거나 얼어붙어 있었고, 전 날 신발이나 헬멧 턱끈에 흘린 땀이 그대로 얼어서 냉동신발 냉동턱끈이 됐다. 그걸 그냥 착용하는 것 말곤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서 착용할 때마다 얼음고문을 받는 듯한 추위를 항상 느꼈다. 특히나 패딩을 입고 라이딩을 하다 보면 땀이 발생하는데 패딩 지퍼를 내려서 땀을 식히자니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이 추웠고, 입자니 땀범벅에 더웠다. 겨울철 의류 레이어링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다니다 보니 제대로 씻지도, 따뜻하게 잠을 청하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날들은 물티슈로 대충 닦고 자거나 공중화장실에서 새벽시간에 수건을 들고 가서 물을 조금씩 뿌려가며 땟국물을 벗겨냈다. 잠은 늘 밖에서 잤기에 하루하루 잠자리를 찾기 위한 전쟁, 추위에 이기는 전쟁을 치렀다. 충전은 공중화장실 콘센트에 주인이 있다는 메모를 남긴 뒤 배터리들을 꼽아놓고 했고, 빨래는 물기를 꼭 짠 뒤 잠을 잘 때 등에 깔고자거나 품에 안고 자면서 체온으로 말렸다. 물론 잘 안 말라서 이틀씩 끼고 자야 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노숙의 여러 가지 형태

어떻게 자야 할지 몰라서 텐트도 쳐보고, 해먹도 사용해보고, 바닥에서 자기도 했다. 부지런히 달리면 달릴수록, 경비가 들어있던 통장의 잔고는 0을 향해 힘차게 달려갔고 점차 무소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됐다. 하늘은 살을 파고드는 바람을 쏟아냈고, 경비를 아끼기 위해 몇 달간 라면만 먹어서 얼굴이 퉁퉁 부었다.






무전여행 시작

밀양에서 두어 달 일하면서 매일 출근했던 게 아니었고, 모은 돈을 생활비로도 사용했고 겨울장비를 구입하는 데 사용했기에 경비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미역으로 유명한 기장군을 지나고 있었을 무렵엔 경비가 거의 20만 원밖에 남지 않았는데, 농협에 가서 모든 돈들을 인출해서 5만 원권으로 4장을 뽑고, 기장군 행복지역아동센터에 가서 아이들 교육하는 데 사용해달라고 부탁한 뒤 20만 원을 기부했다. 센터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센터 관리자 분과 추억사진을 한 방 찍고 무전여행을 시작했다. 


아직 신에겐 부탄가스와 깃발이 남아있사옵니다

20만 원을 기부하고 남은 돈 만원을 사용해서 "자전거 무전여행, 배고파요!"라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만들었다. 이 깃발은 어떻게 하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다가 고안한 것이었다. 무전여행에서 살아남으려면 보통 식당 같은 곳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노동력을 제공한 뒤 그 대가로 밥을 얻어먹거나 양심 없이 그냥 앵벌이를 하곤 하는데 그건 민폐 수준이 지하철 앵벌이와 다르지 않기에 그렇게 하긴 싫었다. 때문에 민폐를 안 부리고 다니기 위한 제작의도를 담아서 깃발을 제작한 것이었다. 깃발에 적힌 문구를 보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은 도와주고 도와주기 싫은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준비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자전거 안장 쪽을 보면 부탄가스가 무려 4통이나 실려있다. 물론 자살용은 아니었고, 물을 끓여먹거나 긴급하게 가스불로 체온을 유지해야 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기 위해 구입한 것이었다. 부탄가스까지 구입하고 나니 이젠 정말 빈털터리가 됐다.


한겨울이라서 그런 것이었을까, 깃발의 홍보효과는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컸고,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훌륭하게 작동해주었다. 시장을 지나가다가 상인들이 깃발에 적힌 문구를 보고 먹을거리를 챙겨주기도 했고, 밤이 되어 깃발을 텐트에 꼽아놓고 자고 일어났는데 아침에 먹거리가 한가득 텐트 앞에 놓여있었던 적도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뜬금없이 며칠째냐고 묻더니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끼 든든하게 먹으라며 만 원짜리를 쥐어준 적도 몇 번씩이나 있었다. 물론 무전여행의 맛을 살리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금전적으로 물질적으로 도움을 받을 때마다 대한민국의 아이덴티티란 이런 걸까 싶기도 했고...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이지만 아직 따뜻하다고 느꼈다. 내 여행 다니는 모든 순간들 중에 제일 배고프고 가난한 순간이었지만, 제일 감사한 순간들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다 한들, 역시 무전여행은 그야말로 가난한 여행, 생존을 위한 버티기 그 자체였단 것엔 변함이 없었다.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 페달을 밟아대니 배는 등짝에 붙을 정도였고, 뭔가를 먹는다 해도 땀범벅에 찬바람을 계속 쐬이다보니 소화가 제대로 안 되고 배탈이 자주 났다. 그럴 때마다 '일반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오늘 밤 따뜻하게 잘 곳이 있고, 가족들이 있고, 집에 가면 김치 한 조각에 밥 한 숟갈이라도 먹을 것들이 있는 사람들 말이다. 문구점에 가서 짤짤이로 100원짜리 과자를 사 먹는 초등학생들도 부러웠고,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중학생들도 부러웠고, 피시방 건물에서 나오면서 낄낄대던 고등학생들도 부러웠다.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특히나 더 부러웠다. 나는 오늘 저녁 굶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들은 오늘 저녁에 식사를 할 것이 분명히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들은 최소한 밥투정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정말 부러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일상이란 게 얼마나 감사한 건지 계속해서 느꼈다.


힘들었던 점이라고 한다면..

심리적으로 조금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다들 자전거 뒤에 꼽혀있는 깃발을 보면서 "무전여행 중이에요?" "며칠째예요?"같은 동일한 질문을 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겉으론 늘 웃으면서 "OO일 째에요~"라고 친절히 대답했지만 그런 식으로 똑같은 질의응답을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3일쯤 가서는 한편으론 사람들의 온정을 바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다들 틀에 박힌 질문밖에 못 하나 싶어서 기피하고 싶어 졌다. 특히 어딜 가나 어르신들을 마주치면 '나도 젊었을 때 해봤다', '힘 좋을 때 누가 못하냐'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정승처럼 세워놓으시고 아무도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즐겁게 하셨는데, 그게 정말 미친 듯이 힘들었다. 찬바람은 계속 불어오는데 멀뚱멀뚱 서서 이야기에 끼지도 못하고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그저 하나의 안줏거리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에 자괴감과 현타가 밀려왔고 굉장히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후원 감사합니다!

한 겨울에도 감사히 후원이 들어왔다. 물론 자주는 아니었지만 근근이 들어오는 후원금은 이 여행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계속해서 상기시켜주었다. 먹거리 후원도 들어왔다. SNS 팔로워이신 이 분께선 겨울에 무전여행을 하면 얼어 죽는다며 반찬을 직접 하시고 마트에서 장을 보셔서 택배로 보내주셨다.(하은이 누님 감사합니다.)



기장군 대항 교회 이야기

기장군 대변항에 있었을 때였다. 커다란 축구공 조형물이 있는 등대 밑에 텐트를 쳐놓고 잠을 자려고 했는데, 야밤에 사람들이 "앞에 두고 갈게요~~" 하면서 텐트 앞에 두고 간 음식들로 허기를 달래고 잠을 잤다. 그날 밤, 내가 잠든 사이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매우 저렴한 텐트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바닥 부분에 방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차디찬 빗물이 내가 자는 사이에 텐트 바닥천을 뚫고 올라와서 침낭을 적셨고, 입고 있던 옷과 장비들이 모두 침수됐다. 텐트부터 시작해서 가지고 있던 모든 장비들이 비에 젖은 것이었다. 그때 바로 주변 민가로 가서 도움을 청해야 했지만, 때는 늦은 밤이었고 다음 날 비가 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하룻밤을 버티고 다음날 오후쯤이나 젖은 것들을 해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랬고, 그다음 날도 그치지 않았다. 지옥 같은 3일 동안 젖은 옷을 입은 채로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던 것이었다. 밤에 체온이 떨어져서 임시방편으로 체온을 높이기 위해 가스불을 틀어서 텐트 내부 공기를 데웠고(물론 텐트 문을 열어놓은 채로), 가스불에 유단포를 데워서 젖은 침낭 위에서 유단포를 꼭 끌어안고 잠을 자며 3일을 겨우 버텼다. 안타깝게도 그 3일간은 비가 계속 내려서 사람의 왕래가 없었고, 먹거리를 두고 가는 사람도 없었으며, 3일째엔 물까지 다 떨어져서 수분 섭취까지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비는 3일이 지나도 끝내 그치지 않았다. 결국 4일째에 축축이 젖은 장비들을 챙긴 뒤 어디던 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장비를 챙기던 손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엄청난 추위를 느끼며 덜덜 떨렸고, 감기 기운과 몸살 기운에 머리가 뜨끈뜨끈해진 게 느껴졌다. 배가 너무나도 고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일단 목적지는 없어도 어디던 가야 한다는 생각에 페달을 밟고 미친 듯이 달렸다. 입고 있던 옷가지도 젖어있다 보니 핸들이 덜덜 떨리도록 추웠다. 달리다 보니 한 교회가 눈에 들어왔고, 거지 같은 꼴로 축축이 젖은 옷을 입은 채 무작정 교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사님께 며칠간 있었던 일과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하룻밤만 재워주길 간곡히 청했다. 목사님은 나의 거지꼴을 보시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시더니 하루쯤은 괜찮을 것 같다며 들여보내 주셨고, 덕분에 그동안 밀린 빨래와 세면, 수면, 식사 등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목사님의 안내에 따라 샤워를 하러 들어가려고 할 때 목사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며 "구석구석, 빡빡.. 온수 오랫동안 틀어도 되니 깨끗하게 씻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로 거지꼴이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씻겨놓으니 이렇게 이쁠 수가 없다며 웃으시는 목사님과 함께 사택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사모님과 아드님도 계셨다. 그렇게 4명이서 식사를 하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껏 여행을 다니는 목적, 출발하게 된 이유, 여행을 통해 배운 것들, 삶에 대한 생각 등 많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목사님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내가 마음에 드셨는지 잠을 자기 전 코코아 파우더를 주시면서 며칠이건 교회에서 머물다 가도 되니 편한 대로 교회에서 지내고, 특히 주일까지 있을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아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해달라고, 그럼 아이들에게 참 좋을 것 같다고 요청하셨다. 아쉽게도 계속 머물러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날 빨래를 걷고 출발했다. 목사님이 출발하기 전에 가면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고 하시며 5만 원을 쥐어주셨는데, 나를 정말 아들같이 생각해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 큰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목사님 가정에 축복이 있길 바라면서 기도를 하 부산방향으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무전여행 기억 조각

"저 사람 저거 뭐라 써놓은 기고?"

"야 인마 저기 무전여행이라고 써놓은 거 안 보이나. 빨리 먹을 거 꺼내라."

-텐트 앞에 사과를 놓고 간 사람들의 말-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우리 손자를(나를) 밥을 주고 할 수 있는 건, 배고픈 걸 아는 사람만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알기 때문에 그래.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겪을 거 다 겪어보고 살아서 그 서러움이 뭔지 알지, 배부르고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런 거에 대해 잘 모른다니까. 어서(어서) 먹어. 밥 식는다."

-부산 광안리에서 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시래깃국과 김치, 김, 명란젓, 탕국으로 밥을 차려주시고 가다가 배고프면 먹을 걸 사 먹으라며 만원을 쥐어주신 할머니의 말씀-


"거 안에 누구 있소? 이 날씨에 제길.. 이런 날씨에 여기서 자면 사람 무조건 얼어 죽는다니까.. 거.. 사람 있으면 빨리 대답 좀 해보쇼! 이런 진짜 죽은 거 아이가!! 이보쇼!!"

"(피곤한 목소리로)네~ 안에 사람 있습니다~"

"이봐요, 그러지 말고 빨리 나와서 커피라도 한잔 하고 같이 불이라도 쬐고 있어요. 그러다가 죽는다니까!! 이런 날씨에 무전여행으로 그렇게 댕기면 죽어요 죽어!"

-부산의 한 공원, 텐트 밖에서 말을 걸어와 밥을 챙겨주고 커피를 끓여준 배드민턴 동호회 사람들과의 대화-


기장군에서 양산, 김해를 들려 부산까지. 바닥에 차가워서 지푸라기를 주워다가 깔고 자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던져준 음식으로 연명하던 생활이 거의 2~3주가량 지속되었고 결국 그렇게 부산에 도착하게 됐다. 무전여행의 본질을 지키겠단 의도로 여행 중간에 사람들이 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었는데 지갑을 열어보니 그 돈이 9만 원이나 모여있었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니 도대체 이 한 겨울에 깃발 하나 꼽고 어떻게 먹고 버텼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바퀴벌레 같은 생존능력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재밌었고, 힘들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흙 파먹고 광합성하며 사는 것처럼 소비생활을 안 할 순 없었기에 또다시 정착해서 열심히 경비를 모아서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목표는 봄이 오기 전까지 경비를 벌어 여행 준비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산의 고시원들에 전화를 돌려서 가격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다시 정착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다행히 하루 만에 구할 수 있었던 보수동 책방골목 속 고시원의 가격은 15만 원이었다.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서 금세 고시원에 도착하게 되었고, 원장실로 가서 원장님에게 아까 전화드린 사람이라고 소개를 한 후 사정을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자전거 여행하는 학생인데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지금 9만 원을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마련되는 대로 드리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원장님은 편한 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자전거를 고시원 베란다에 옮겨놓고는 원장님의 안내를 따라 방을 배정받았다. 부산에서 제일 싸다 싶은 곳이었는데 밀양에서 생활한 고시원에 비해 월세는 더 비쌌고, 공간은 상당히 비좁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사람 한 명이 서있기도 답답한 곳이었다. 물론 지금껏 무전여행을 다닌 것에 비한다면 비가 와도 비 걱정 없이 잘 수 있고, 추위 걱정 없이 잘 수 있는 천국이었다. 심지어 밥과 김치도 무제한이었고 모기도 없었다. 거기다가 도보로 2분 거리에 깡통시장 국제시장이 있어서 먹거리를 해결하기에도 매우 편했다. 반경 1km 이내에 사진관, 피시방, 마트, 농협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모두 있어서 나에게 그곳은 에덴동산의 한국형 모델로 느껴졌다. 


입실을 해서 짐을 정리하기 전에, 제일 먼저 샤워를 하기로 했다. 거의 씻지 못했던 내 몸에선 산 노루나 야생 멧돼지의 살코기에서 날 법한 야생스러운 잡내가 어마어마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강력했던 냄새는 치약으로도 지울 수 없었다. 비누는 더더욱 안 되었다. 오직 흐르는 시간과 공기의 흐름 저항만이 그 냄새를 지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렇게 나는 공용 샤워실에서 혼자 1시간가량 비누와 샴푸를 들이부어가며 몸을 빨다시피 씻었.



노동의 미학

샤워실에서 한바탕을 한 뒤, 맨밥에 김치로 저녁 끼니를 해결하고 집에 전화를 걸었다. 무전여행을 끝내고 부산에 도착해서 고시원 방을 잡았고,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막일을 할 예정이니 안전화와 각반을 보내달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엄마는 돈을 조금 보내주고 싶다고 했지만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엄연히 내가 벌여놓은 것들이고 나이도 벌써 열아홉이나 먹었기에 내 행동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싶다고 말하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자려는데 인생은 왜 이리 고달픈 걸까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막 흘렀다. 그러다가 한 이틀이나 지났을까, 밖에서 사 온 라면과 무료 제공하는 김치로 끼니를 때우며 살던 중 안전화와 각반이 고시원으로 도착했고, 그다음 날부턴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추운 1월의 새벽 날씨 속에서 입김을 용처럼 뿜어대며 하루 품삯을 받기 위해 인력소로 향했고, 노동을 했다.




부산 막노동 시장

부산은 인력시장이 치열하고 인건비가 저렴했다. 이른 새벽에 인력소에 나가봐도 일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다만 일거리가 없어서 대부분 데마찌를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데마찌란, 일거리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일컫는 막노동 용어다. 그렇게 며칠은 일을 하고 며칠은 일이 없어서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걸 반복했고, 밀린 월세 10만 원을 해결한 뒤 인력소를 갈아타는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돈은 쉽게 벌리지 않았다. 한겨울에 건설현장, 부산항, 부산극장 등의 장소에서 땀나도록 빗자루질, 뿌레카로 얼음깨기, 배수리 조공 등의 일을 했다. 하루 고작 8만 원 정도를 받아서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피곤한 탓에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는데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온몸에 근육통이 생겼고 늘 파스를 붙여야 했다. 매일 새벽 고시원을 나가서 얼어붙을 것만 같은 찬바람을 쏘이는 게 정말 힘들었다. 몸은 날이 가면 갈수록 만신창이가 되었고 일거리가 많지 않아서 정신적으로도 힘이 들었다. 날씨는 추웠고, 면역력이 약해졌는지 감기에 걸려 며칠을 방에서 드러누워 끙끙대던 날엔 멘탈까지 부서졌다. 이젠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 싶어서, 다른 방법으로 경비를 마련하고 싶었다.


공사가 한창이었던 부산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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