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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May 05. 2019

KBS 라디오, 한민족 네트워크

소중했던 기회


"여보세요?"

여행을 떠나 개고생을 시작한 지 한 달째, 해변가 정자에서 자고 일어나서 바다를 보며 초코파이를 먹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KBS에서 근무하는 작가였다. 작가는 현재 한민족 네트워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는데,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코리언들을 소개하는 시간에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해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순간 당황한 나머지 잠시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린 후 전화를 끊었다. 고민이 됐다. 


'어떡하지?' 


생각해보니 법적인 문제가 마음에 걸려서 나가기가 조금 꺼려졌다. 미성년자가 후원금을 모금하는 건 불법이었다. 그리고 난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정말 하고 싶은 꿈이었고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기에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런데 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가서 괜히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을 방송에서 이야기했다가 혹시라도 누군가 법적인 부분을 건드린다면 프로젝트 무산은 물론이요, 몰매를 맞으며 사회적으로 공개처형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을 때 즈음, 두 번째 전화벨이 울렸다. 


"시현 씨, 라디오에 출연하시면 지금 하고 계신 프로젝트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한 번 나가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그렇긴 하죠. 저도 한 번쯤 나가면 좋을 거라 생각했고 고민도 많이 해봤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법적인 부분에 걸려서 방송에 나가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이요?"

"(생략) 이러이러한 부분이 마음에 걸리네요."

"음..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피해서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아니.. 그게 가능할까요? 혹시라도 그런 부분에 예민한 사람이 청취자로 있다가 좋지 않게 생각하면 문제가 커질 것 같은데요."


꽤 오랜 시간을 대화했다. 작가분은 꽤나 끈기 있게 날 설득하려고 했다. 대화를 계속하면서 생각해보니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부분은 언급을 잘 피해서 전달하면 될 것 같고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싶어서 진행하기로 했다. 


"후... 그래요. 그럼 작가님 말씀대로 잘 피해서 한 번 해보죠 뭐."

"네. 좋은 결정 하셨어요.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준비

KBS 측에선 곧바로 메일로 인터뷰 협조공문을 보냈다. 협조공문엔 라디오 진행자가 인터뷰 시간에 나에게 할 예상 질문들이 모두 나와있었다. 그것에 맞추어 대답을 조리 있게만 하면 미션은 끝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괜찮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라면,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부족한 말주변으로 방송에 나가서 조리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어버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매일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차며 평생 괴로워할 게 뻔했다. 때문에 주제를 흩트리지 않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선 시간과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피시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공문에 예상 질문으로 나온 부분을 조리 있게 답변하기 위해서 예상 답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26시간 동안 잠 한 숨 안 자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로 있었다. 변했던 건 컴퓨터 앞에 쌓인 라면 빈껍데기와 과자 포장지들이 계속해서 쌓여만 갔다는 것뿐이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작성한 답변 내용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호흡을 끊어야 할 부분은 슬러쉬 표시로 끊어서 리허설을 수 차례 진행해보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 작성한 게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서 타이핑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고 완전히 새롭게 작성한 적도 한 번 있었다.


네가 있다 없으니까~ 숨을 쉴 수 없어~♪곁에 없으니까~ 머물 수도 없어~♪나는 죽어가는데~♪너는 지금 없는데 없는데 없는데~♪

하루가 꼬박 가고 다음날 아침, 약속한 날짜 약속한 시간에 당시 히트곡이었던 씨스타의 '있다 없으니까'가 휴대폰 전화 벨소리로 흘러나왔다. 작가분께 전화가 온 것이었다. 거의 졸도할 정도로 피곤했기 때문에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바짝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ㅇㅇㅇ작가인데요, 이따가 시작할 건데 미리 전화드리는 거예요. 이따 전화드리고 나서 바로 전화가 갈 테니 준비해주세요!"

"지금 바로 하는 건 줄 알고 엄청 긴장했네요. 하하. 알겠습니다."


곧 있으면 녹화방송이 시작될 거고 진행자로부터 인터뷰 전화가 올 것인데, 그전에 한 번 더 전화를 할 것이니 잘 대기해달라는 전화였다. 괜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리에 기운이 없어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또 걸려올 전화를 받기 전에 혹여나 체크할 게 있을까 고민을 해봤는데 전화 인터뷰를 하면 분명 피시방 옆자리 사람들의 잡음이 섞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전이라 피시방에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혹시나 열심히 준비한 인터뷰에 흠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쓰레기들을 허겁지겁 치우고 제일 조용한 구석자리로 자리이동을 했다. 자리이동을 마치고 잠시 후, 벨소리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이번엔 작가분이 아닌 정말 진행자분으로부터 전화가 왔고, 곧바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26시간 동안 준비를 잘해서인지, 그만큼 안 자고 피곤해서인지 예상과는 달리 방송이 시작되니 긴장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컴퓨터 모니터에 내가 준비했던 자료들도 띄워놨겠다, 이미 수십 번을 읽으며 준비한 내용이라서 말 꼬이는 것 하나 없이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다행히 큰 문제없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작가분께서 방송이 끝나고 말을 그렇게 잘하냐며 위로 섞인 칭찬을 해주었다. 그저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겠지만 당시 인사치레가 뭔지 몰랐던 순수 청년이었기에 화면에 띄워진 한글파일을 보면서 굉장히 뜨끔해했다. 왜냐하면 즉석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타이핑한 걸 읽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통화가 끝날 무렵, 작가분이 출연료를 지급해줄 예정이니 계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계좌번호를 넘겼다. 그 뒤로 2주가 지났을까, 계좌에 출연료가 찍혔다. 날 한참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던 출연료의 금액은 4만 원. 피시방 요금과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출연료가 들어온 그날 밤 기분이 좋아서 양념치킨 한 마리를 뜯으며 금액을 떠나서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며 기분 좋게 누웠다. 이걸로 후원을 받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밤하늘이 어찌나 그렇게 아름답던지. 세상이 내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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