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밤에 일어난 난투극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으셈ㅋ'
빠이팅 넘치게 경주에 도착해서 천마총과 첨성대, 동궁괴월지같은 유적들을 방문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것들을 직접 보니 신기하기도 했고 관광지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자전거로 이동을 했는데도 보기가 굉장히 편했다. 경주의 명물이라는 황남빵(경주빵)도 먹었는데 어딜 가서나 먹을 수 있는 호두과자 맛이었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먹을만했다. 단점이었다고 한다면 낮엔 많이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사 먹었다는 것이었지만 저녁엔 노을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구레나룻을 스쳐 지나가며 더위를 기분 좋게 식혀주었다.
밤이 되어 어둑해진 시내에 도착했는데, 어느 순간 옛날통닭집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유리에 반사되어 비쳤다. 이 날 이상하게도 식비 지출이 거의 없었기에 예산 안에서 보양식 한 번은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옛날통닭을 포장하고 편의점에서 사포로 맥주 한 캔을 구입했다. 이제 앉아서 먹을만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시내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니 공원같이 조성된 곳에 정자와 벤치가 있었다. 그곳을 발견하자마자 브레이크를 꽉 붙잡고 멈춰 서서 정자에 짐을 풀어놓고 통닭을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름 묻은 손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답잖은 동영상들에 시시덕거리며 닭을 뜯고 있을 때, 정자 주변에서 진행되던 한 행사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해산하여 정자 옆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나를 굉장히 불쾌한 눈으로 보고 지나갔다.
'아.. 민폐구나.'.
그제야 아차 싶어서 널브러진 짐들을 한쪽 구석에 나란히 정돈해놓았다. 치킨에 눈에 멀어 버린 나머지 짐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공간을 차지해던 것이었다. 괜스레 의도치 않게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최대한으로 밀착해서 앉았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치킨을 뜯으며 휴대폰을 응시했다. 그렇게 소소한 행복 속에 사무쳤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이런이런, 노숙자와의 불쾌한 조우를 시작하게 되었군요
"갱주는 앰앤↗히 구역이 있는데, 자↗리 좀 비키지?"
온 사방이 찢긴 나시티를 입고 술 전 내를 풍기는 남자가 대뜸 내 앞으로 왔다. 그리고 어깨를 흔들거리면서 껄렁껄렁한 제스처를 취하더니,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나의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생긴 걸 자세히 보아하니 올드보이에서 군만두만 먹고 15년 버틴 최민식처럼 골골거리는 인상이었다. 순간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똥을 밟아도 코끼리 똥을 밟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과 얼굴을 붉혔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좋게 이야기하고 끝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서 주무시려고 하시나요?"
"기래! 내 자리다!"
"아 저는 자전거 여행 온 학생인데, 제가 더 비켜드리겠습니다. 그쪽 공간이 더 넓으니 그쪽에서 주무시면 될 것 같네요."
제정신이 박혀있는 사람이었다면 "어이쿠! 옆에 자리가 있는 걸 깜빡했네! 미안해요~"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퍼뜩 나와라! 아니면 자릿세를 내던지! 이 주변엔 구역 나눠져 있는 거 모르나!"
이 정도 국어 실력이면 세종대왕님께 무릎 꿇고 사과해라 이 자식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최소한 몇 번은 참을 인내심이 있었기에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최대한 잘 풀어보기로 했다. 여행을 다닐 때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노숙자일 것이다. 도둑질, 폭행, 시비 걸기의 달인들이며 술에 취한 채로 취권을 사용하고, 모든 걸 생떼 부리기로 해결하려는 무논리의 달인들이라서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에게 본인들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심지의 정자들은 웬만해선 피하는 게 맞는데, 이 날은 정말 내가 큰 실수를 했다.
'전 세계사람들 지능을 다 곱하면 저 자식 때문에 0이 된다는 그런 놈인가, 치킨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이구만.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소리를 지르냐. 팍 씨, 확 그냥 경찰 불러버릴까 보다.'
기분이 굉장히 불쾌해져서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했다. 옆엔 빈자리도 많은데 굳이 나에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그놈의 '자릿세'하나였다. 상당히 미친 사람인 건 알겠으니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공손히 '옆에 자리가 많다. 이건 공공재다. 내가 너한테 돈을 줘야 할 의무가 없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눈이 더 돌아서는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이용을 하지 못한다며 거품을 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몸동작도 왜 그렇게 크게 하면서 항의하듯이 하는지 정말.. 누가 본다면 내가 큰 죄라도 저질러서 질타를 받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싫었다. 심지어 이 어메이징한 놈은 박사 석사 학위를 딴 것 마냥 논리적인 척, 뇌에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서 하나도 안 맞는 테트리스를 하며 자릿세를 '지불'하라고 했다. 맙소사! 그의 입에서 '지불'이라는 고난도 용어까지 나왔다니! 역시 공갈협박을 하려면 이 정도는 배워야 하는구나 싶었다. 게다가 예절은 청학동에서 배웠는지 배운 티가 정말 많이 났다.
"빨리 내놓으라고!"
제기랄, 점점 똥으로 샤워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떡하지, 그냥 똑같이 미친 척하고 들이받을까. 아니야. 참자. 그리고 빨리 자리를 뜨자.'
정말 화가 나서 들이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평소에도 목숨을 걸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반인륜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적당히 화를 누그러뜨리고 자리를 떠서 상황을 모면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에 먹으려고 애지중지 아껴둔 닭다리 하나를 기름에 살짝 젖은 갈색 종이 포장지로 꾸깃꾸깃 싸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어디가노? 빨리 내놓으라니까!"
짐을 싸서 가려고 하는데도 고함을 지르는데 그게 사람이 얼마나 열 받게 만드는 건지, 폭발 직전의 나는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김이 새어나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작은 모공에서도 증기기관차처럼 열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점점 참을성의 한계를 느낀 것이었다. 자전거를 던져버리고 주먹으로 옆구리를 가격하여 무료 맹장수술을 집도해줄 용의가 생겼다. 만약 머리가 고압의 가스통이라고 표현한다면 어딘가 구멍이 하나가 뚫려서 가스가 매우 빨리 세는 느낌이었다. 억누르고 또 억눌렀지만 누가 라이터라도 한 번 켠다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이봐요 아저씨, 비켜드리면 되잖아요, 그렇죠? 여기 그쪽 자리고 그쪽 구역이잖아요, 맞죠? 그쪽 '담당구역'이라니 아이코 내가 비켜드려야죠, 평생 여기 담당 열심히 하시면서 빠이팅! 하세요. 아시겠어요? 대답 좀 해보시라고요."
누구나 마음속에 괴물과 천사가 공존한다. 어떤 녀석이 언제 어떻게 발산되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잘잘못을 떠나서, 이 순간 내 몸에선 괴물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내 말을 들은 노숙자는 갑자기 개거품을 문 듯한 표정을 유지하고는, 나를 때리려고 했던 건지 밀려고 한 건진 모르겠지만 주먹을 꽉 쥔 채로 어깨를 앞뒤로 흔들거리면서 내 몸 앞쪽으로 바싹 붙었다. 그리고 눈이 뒤집힌 채로 얼굴을 들이민 채로 나의 두 눈을 가만히 노려봤다. 나도 이 자식은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주먹을 쫘악 말아쥐었다. 왼손은 수면제, 오른손이 황천길이라서 어떤 걸 먼저 저자식 인중에 꽂아줄지를 고민하다가, 수면제를 사용하면 또 일어날까 봐 오늘 이 자식을 황천길로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제발.. 제발 먼저 한 대만 쳐라, 그럼 저승 가는 노잣돈은 니 농협통장에 넣어주마..'
일촉 즉발의 상황이었다.
영화 같은 주인공의 등장
그때였다. 한 시민이 "야!!!" 하고 주변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렀다. 행사를 즐기고 바로 옆 벤치에서 맥주를 마시며 쉬던 시민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노숙자는 '뭐야?' 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정말이지 이 순간은 살면서 겪었던 영화 같은 순간들 중 1위였다. 정말 영화 그 자체였던 것이었다.
"어이, 내가 아까 전부터 저기 옆 벤치에서 상황 보고 있었는데, 여기 잠깐 자전거 여행 와서 정자에서 몇 시간 자고 가겠다는 애한테 그게 뭐하는 짓이냐? 진짜 개처럼 처맞고 뒤져볼래?"
이 말을 시작으로 그 형은 패드립을 시작했다. 노숙자와 형은 서로 부모님 안부를 열심히 묻기 시작했는데, 노숙자의 떨어지는 언어구사능력에 비해 이 형은 패드립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가히 듣던 모든 청중이 바지에 이슬을 촉촉이 적실 정도였다. 반면 노숙자는 그 형에 비해 욕을 잘하지 못했고, 자릿세 핑계로 여행객에게 삥을 뜯으려다가 어미 욕까지 들으니 억울했는지 술기운에 대담하게 육탄전을 시도했다. 노숙자가 먼저 그 형을 밀쳤고, 그 형 또한 주먹을 날렸다. 둘 다 술에 취한 상황이라 개싸움판일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름 모를 형의 압승이었다.
"느려."
알고 보니 형은 취권의 대가였던 것이었다. 노숙자가 날린 주먹을 동체시력으로 다 잡아내고 노숙자 주먹의 회전반경을 계산해서 현란한 무빙으로 피하기까지... 마치 관우가 현시대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청룡언월도로 김치찌개에 들어갈 스팸을 써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형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정교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부드러운 움직임과 부드러움에서 나오는 주먹의 강력함이란 예술 그 자체였다. 형의 주먹질은 폭죽이 사방팔방으로 튀듯 아름답게 뻗어나갔고 유도탄처럼 훼이크를 치며 노숙자의 온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그에 비해 노숙자는 큰 성을 뜯어먹으려는 작은 흰개미 같아 보였고, 결국 형의 몸짓 한 번에 패대기 쳐지면서 러닝 소매가 우두득 뜯어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쿵쿵따 벌칙 의자처럼 붕 하고 날아가는데 하늘이 노랗게 보일 게 분명해 보였다. 술기운 때문인지 쓰러졌다가 좀비처럼 후다닥 일어난 노숙자의 눈엔 가을이 왔는지 벌써 단풍이 들고 있었다. 그렇게 취권의 향연이 한동안 또 이어지다가 지나가던 시민들의 만류로 결국 싸움은 끝을 보게 되었는데, 노숙자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는지 x발 x발 거리면서 정자에 앉아서 다친 곳을 주물럭거리며 우릴 쳐다봤고, 형은 그때까지도 화를 진정시키지 못했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개 줮같은 새끼야 정신 차려!!"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나에게 큰 소리로 "친구야! 너는 형 따라 가자! 형이 재워줄게! 에라이 x발!" 하고는 나를 데리고 한 게스트 하우스로 갔다. 따라가 보니 그곳은 그 형의 친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우리는 낄낄거리며 아까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리고 형들이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사들고 와서 함께 새벽까지 맥주를 마시며 안줏거리로 노숙자를 까고, 또 깠다. 그 재미는 가히 세종대왕급. 속이 다 후련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날 아침, 형들이 음료와 간식거리를 머리맡에 두고 간 게 보였다. 지금 연락처가 지워져서 연락을 할 방법이 없지만, 평생을 살면서 잊지 못할 고마운 형들로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됐다. 나는 고마움을 뒤로한 채 페달을 열심히 밟기 시작했고, 근근이 후원을 받아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 사건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경주에서의 추억이 되었다.
잠을 청했던 게스트하우스와 맥주를 마셨던 테이블, 그리고 내 자전거가 보인다.
그다음 날부터 후원자분들의 성함으로 명소에서 찍었던 사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