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초시현 Sep 24. 2019

감자튀김 때문에 죽을뻔한 썰

8일 만에 실려간 응급실


감자튀김을 만들자

산란기의 연어 떼처럼 때는 바야흐로 16년 9월 23일, 소매물도를 가기 하루 전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난 사실 3일 전에 뭐 먹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븅신 붕어 대가리인데 3년 전에 겪은 그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통칭 쿠크다스 섬이라 불리는 소매물도에 가기 하루 전 날, 노을빛 해변에서 바다 짠내를 맡으며 해변 뒤쪽에 있는 캠핑장에 텐트를 쳤다. 영화를 한 편 딱 때리고 나니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텐트 밖 들판엔 벌써 별들이 가득했고 사람들은 그저 철썩이는 파도소리 속에서 고기나 굽고 모닥불이나 쬐며 밤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배고파..'


배가 고픈 나머지, 나도 사람들처럼 뭐 좀 만들어먹고 잘까 싶어서 준비한 재료를 꺼내어 텐트 입구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오늘의 메뉴는 무엇이죠? 네 감자튀김 되시겠습니다. 처음엔 방법을 몰라서 감자를 기름에 퐁 하고 던져 넣다가 튀김가루랑 감자랑 따로 분리되면서 이상하게 튀겨지길래 몇 개를 갖다 버리고, 뭐지? 뭐지? 하면서 에디슨처럼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 노력한 끝에 기름에 감자를 천천히 넣으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완성된 감자튀김을 본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서 역시 고난이 불후의 명작을 만드는 법이랬다면서 눈물을 그렁그렁...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크리처를 탄생시켰을 때처럼 감격이 북받쳐 올랐고 아니나 다를까 맛 또한 뱀 새끼처럼 혀를 칭칭 휘감으며 미각세포들을 흥분시켰다. 훈훈해진 가슴속엔 어느덧 조상님의 공덕에 대한 감사함까지 느껴졌는데 다들 어디 누워계신지 감이 안 와서 동서남북으로 절을 올리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손은 자꾸만 명월이 치마 속으로 슬금슬금 손 들어가듯 감튀를 찾았고, 감튀는 목구녕으로 구렁이 담 넘듯 사르르 넘어갔다.


다 먹어 갈 때쯤 아쉬운 마음에 사진이라도 한 컷 더 남겨놓고 싶었다. 카메라를 찾으려고 상체를 휙 돌렸는데 직장인의 주말보다 짧은 그 찰나의 순간에 냄비가 엎어졌다. 그리하여 펄펄 끓는 식용유를 하반신에 뒤집어쓰게 되었고 불이 기름에 옮겨 붙으면서 다리에 불이 붙었다. 사람이 극한의 패닉을 겪을 때는 오히려 얼음장 같은 이성만이 남는다고 했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음장보다 차가운 이성이 제기능을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엔도르핀-아드레날린이 폭증하여 두뇌가 풀가동됐다. 뇌 속에선 뉴런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응책을 마련했고, 물을 부으면 불이 더 거세질까 봐 바닥에 깔린 모래를 다리에 뿌려서 불을 껐다. 불이 훅 하고 올라온 지 3초도 안 된 시간이었다. 다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으로 불을 끈 것 외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펄펄 끓다가 불까지 붙었던 뜨거운 기름이 아직 다리에 남은 채로 식질 않았고, 양초공예시간에 파라핀을 녹이듯 피부를 계속 녹여냈다. 저만치서 염라대왕 실루엣이 보이는데 정말 이대로가 다간 죽겠다 싶었다. 때마침 하늘이 도운 건지 반쯤 찬 생수병이 핀 조명을 받은 듯이 눈에 딱 들어오는데 아 이걸로라도 온도를 식혀야겠다 하고는 바로 손으로 낚아채서 뚜껑을 휙 따고 환부에 물을 콸콸콸 들이부었다. 그제야 기름의 온도가 서서히 내려갔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인간의 눈은 적게는 초당 10 프레임에서부터 집중할 때는 초당 100 프레임 정도까지 높아진다는데, 촬영 버튼을 실수로 꾸욱 눌러서 연속 촬영으로 수십 장의 잉여 사진들을 찍듯, 마치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다리가 불타던 그 모습은 100 fps로 뇌에 선명하게 저장되었다.



고통 시작

그때까진 몰랐다. 그게 시작인 줄은..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고통은 이제 시작이었다. 마치 불알을 장구채로 진짜 쌔게 때린듯한 느낌.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인가 싶을 정도였다. 작열통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고통이라던데 그 말 지어낸 새끼는 정직한 새끼... 진짜 피닉스처럼 불타 봐서 그 고통을 아는 새끼... 헬스장에서 음료수 내기 팔씨름하다가 회전근 부분 파열된 이후로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아픈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학원 다닐 때 대가리 에밀레종 체벌이라고 해서 숙제 안 해오면 소화기 뒷부분으로 머리 타종하고 당구채 부러진 걸로 다섯 대씩 맞았는데 그것보다 더 아팠다. 이 고통이 상상이 안 된다면 라이터를 켜고 다리에 살짝 대보길 권장한다. 털이 다 타기도 전에 아따가워 Tlqkf!을 외칠 텐데 그 고통의 50배 이상이라고 보면 될 듯싶다.


백린탄을 맞은 것처럼 다리가 활활 타들어가는 고통에 의해 고대로 추풍낙엽처럼 바닥에 쓰러져서 다리를 부여잡고 회개기도를 하고, 실핏줄이 터진 눈을 부릅뜨면서 기절만큼은 안 한다며 정신줄을 간신히 붙들었다. 그때 진짜 복싱 영화에서 다운된 주인공처럼 모래바닥에 드러누워서 90도 돌아간 세상을 보는데 저만치서 평화로이 고기 굽는 사람들을 보니 정말 감자튀김 하나 먹으려다가 이런 고통을 겪나 싶어서 서글펐다. 그 사람들한테 큰 목소리로 도와주세요 소리 지를 수도 있었는데 어머 여기 주갤럼 있어요 할까 봐 무서워서 말도 못 했다. 절대 본인이 찐따라서 아무 말도 못 한 게 아니셈..

 

진짜 지금 후회하는 게 지금까지 이렇게 큰 화상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딱지가 생기고 괜찮겠지 생각하고 말았단 거였다. 그래서 다리가 익었는데도 모래 묻은 손으로 남은 감자튀김을 꾸역꾸역 먹었고, 주변정리까지 마치고는 화장실에 가서 대걸레 빠는 곳에 발을 올려놓고 환부를 세척했다. 그런데 뒤늦은 후속조치 때문이었을까,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몇 발자국을 딛다가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발 앞에 지뢰가 깔려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와서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물어보는데 진짜 너무 서러웠다. 다행히 겨우 부축을 받아서 텐트 안까지 들어갔다. 텐트로 다시 돌아와서 상처를 확인해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손바닥 크기만 한 거대한 물집이 잡혔는데 물집이 곧 터질 듯 부풀어올랐고, 레더맨 멀티 툴을 라이터에 소독한 뒤 물집을 찢어서 진물을 빼니 누런 진물과 노란 진물이 종이컵 반 컵 가량이나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거기다 진물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데 그 냄새를 맡다가 속이 니글거려서 토를 할 뻔했다. 그 어마어마한 스멜로 인해 약 300km 거리에 있던 청와대에서는 북한의 대남 화학탄이 터진 것으로 오인했고, 전군 무장상태로 전환과 동시에 행안부 민방위 경보통제소에선 파상음 5초 상승 3초 하강하며 공습경보를 발령하고 수도방위사령부에선 화학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서울시민 대피작전에 돌입했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때라도 응급실에 실려갔어야 했지만 '며칠이면 딱지가 앉고 흉터도 곧 사라지겠지'라는 븅신 같은 생각으로 기다리면 알아서 딱지가 생기고 알아서 나을 줄 알고 무작정 견디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런 화상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단순한 화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다음 날, 메두사가 왔다 갔는지 하반신 근육들이 돌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진물은 송진처럼 굳거나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칼로 진물 꾹 눌러 빼는 걸 반복해야 했다. 다리는 통증이 심해서 오다리처럼 구부려서 걸어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소매물도에 방문해서 경치를 구경하고 다시 거제로 돌아가는 배에 탑승했다. 돌아올 때 2층 선미 쪽에 앉아서 칼로 진물을 빼는데, 50대 무직으로 추정되는 한 남성 접근해서 뻘쭘하게 다리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어이 젊은 양반, 그란데(Grande)엔 소주를 부어라. 그래야 소독이 돼요.이렇게 말하는데 솔직히 처음엔 내가 잘못들은 거거나 얘가 잘못 말한 거라 생각했다. 근데 어깨를 툭툭 건들면서 한 20년쯤 알고 지낸 후배를 대하기라도 하는 듯이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말하는데 내가 잘 들은 게 맞았다. 심각하게 거슬렸다. 가만히 내버려 두니 숨 쉬는 것처럼 이상한 의술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계속 가르치려 드는데 한 5분쯤 듣다 보니 달팽이관에서 핑핑이가 월요일 좋아~ 하면서 가출할까 봐 그런 비과학적인 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딱 잘라서 말했다. 근데 갑자기 얼굴이 시뻘게지고 침까지 튀기면서 어른 말엔 그냥 예! 하란다 예. 그래서 예는 무슨 예.. 뒤지겠는데. "싫습니다. 그만하시죠." 하니까 또 "알려주면 감사합니다 해야지! 예 하라니까 예! 젊은 양반! 나이 든 사람이 지혜를 알려주면 그게 맞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거품을 물길래 그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표정도 안 짓고 노려보지도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면서 노인은 떠났고, 난 배 뒤로 따라오는 하얀 거품을 바라보며 아픈데 스트레스까지 받으니 바닷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라며 원통해했다.



감사합니다!

아주동에 도착하여 SNS로 알게 된 형님네 집에서 묵기로 했다. 이 형님도 페이스북으로 알게 되었고 집엔 형수님도 계셨다. 형수님은 화상전문 간호사는 아니 지시만 상태를 보시곤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근무하시던 수술실? 에 전화하시더니 급하게 다녀오셔서 박티그라, 생리식염수, 거즈, 붕대 등을 챙겨주셨다. 구호물자를 감사히 받고는 화장실에서 과산화수소수로 상처 소독을 하는데 갓 쓴 저승사자가 손잡고 끌고가려길래 바로 어깨로 블로킹하고 초크 걸어서 어깨 탈구시키고 저승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한바탕이 끝나고 박티그라를 얹고 붕대를 감았다. 그래. 이제 소독도 했겠다, 치료에 필요한 물품들도 챙겼으니 모든 게 끝났다



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며칠간 자전거로 이동하고 산도 4번 탔더니 오히려 상처 주변부위가 세균에 감염되어 땡땡하게 부어올랐다. 특히 오른쪽 다리의 화상부위가 발목 부분이라서 페달을 밟거나 걸을 때마다 신발이 화상부위에 파고들며 뼈까지 고통을 전했다. 그렇게 사흘쯤 지났나, 다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신경을 타고 올라가 두통을 만들어냈고, 몸엔 식은땀이 흐르고 힘이 없었다. 특히나 오른쪽 다리에 피가 쏠릴 때면 바로 바닥에 쓰러져 나뒹굴며 다리를 부여잡고 한참 동안 통증이 가시길 기다려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물이 사우디 유전 터진 것처럼 매일 솟구쳐서 물집을 다 뜯어내서 새 살을 돋게 해야지 하면서 뜯어내니 하얀 진피층의 속살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why 인체의 신비'편에 나올법한 수준이었고, 소독을 하고 숯가루와 연고를 섞어서 발라놓고 붕대를 감았는데, 붕대를 감으면서 속살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사람이 쇼크가 오는 이유가 이런 레벨의 통증 때문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죽을 만큼 아팠다. 특히 물집의 경계선 부분을 건드는 건 초주검 그 자체였다.



IZI-응급실

그렇게 잣망한 신체를 이끌고 버틴 지 8일째. 진주시 화광 저수지에서 텐트를 쳤던 날 고통은 최고점에 달했다. 심지어 새벽에 내린 비 때문에 속옷이고 양말이고 신발 깔창이고 모든 의류가 젖어버린 상태에서 저체온증까지 걸렸고, 식량도 다 떨어져서 자살을 앙망하게 됐다. 그래. 더 이상은 naver.. GG 치고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배터리도 다 떨어져서 메모지 하나 들고 사람들한테 물어보면서 다녔다. 가다가 함안군 폐기물 종합처리장을 지나면서 관리자 어르신에게 함안 중앙병원의 위치를 여쭤보니 그 병원은 폐원을 한 상태니 창원에 있는 청아병원에 가야 한다고 알려주셔서 결국 화상을 입은 지 8일째만에 청아병원으로 이동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고, 간호사는 살 속으로 파고든 숯가루가 문신처럼 남으면 안 된다며 차가운 생리식염수를 부으면서 거즈로 다리를 벅벅 긁어냈다. 다리 꽉 잡고 속에 있는 살갗까지 철수세미로 과일 긁어내듯 벅벅 긁어내는데 으아아악! 살갗이 다 찢겨나갔고 나는 그대로 소리를 지르면서 애새끼처럼 울면서 부랄을 찢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숯가루를 모두 제거하지 못했고, 의사는 환부 상태가 굉장히 안 좋고 환부 주변으로 균들이 퍼져서 여기선 이 이상으로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단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조치하겠다면서 약을 발라주고 거즈랑 붕대 감싸주는데 간호사가 슬라이딩하면서 달려와서 갑자기 주사를 한 방 푹 찔렀다. 


순간 당황해서 훌쩍이면서 이건 뭔 주사냐고 물어보니 파상풍 주사란다. ??? 아니 뭔지 말이라도 해주고 찌르지 파상풍 주사는 작년에 10년짜리로 맞았는데 누굴 쑥 당기면 빠지는 홍어좆으로 아나 왜 관련 없는 주사를 말도 없이 찌르나 싶어서, 난 이미 맞았는데 묻고 더블로 갈 이유가 뭐냐 하니까 화상을 입으면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재주사를 받아야 된단다. 아무튼 그렇게 응급처치가 끝났고의사가 병원 명함을 3개 정도 꺼내더니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원하는 대로 선택하라고 했다. 뭔 얘긴진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고 3개 모두 부산에 있는 화상전문병원들이란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대충 카드 뽑기로 한 곳을 골랐는데 잠시 후 엠뷸런스가 오더니 사람들이 내렸다. 나는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렸고침대와 몸을 벨트로 묶인 채로 차에 밀어 넣어졌그러자 침대의 다리가 자동으로 접히면서 엠뷸런스에 접혀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자전거도 엠뷸런스 한쪽 구석에다가 실었다시끌시끌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최고속력을 낸 엠뷸런스는 금세 부산의 한 화상전문병원에 도착했다전문병원 의사에게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했고의사와 간호사들은 미친놈이라는 눈빛으로 화답해주었다그리고는 상처부위를 벗겨내며 숯가루를 제거하는 죽음의 치료를 한 번 더 실시했고항생제 반응 검사와 심전도 검사, 피검사소변검사 등을 차례대로 실시했.



입원

의사는 입원 치료를 한다고 해도 제대로 걸을 정도가 되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릴 거라고 했다그리고 피부 이식 수술을 해야 할 가능성도 있는데 우선 자연적으로 살을 돋아나게 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허벅지 살을 조금 떼어서 피부이식을 하자고 했다콜을 외친 뒤 휠체어에 실려서 병실을 배정받았는데자리가 없어서 4인실 병실에 들어갔다. 침대엔 '김시현, M/18, scalding burn, deep 2˚ 9% ↓'이라는 딱지가 붙어있었고항생제와 비타민 주사, 셀라뉴 등링거를 2개씩 맞으며 병원 천장을 바라보면서, 감자튀김 하나 먹으려다가 참 잘하는 짓이다 생각했다다음날부턴 아침 치료시간에 간호사가 와서 휠체어를 끌어주며 수술실에 데려다줬다. 의사는 인사를 하더니 수술대로 내 몸을 올렸다. 그러곤 다리를 꽉 잡고 거즈로 감싸더니 그대로 발목의 상처부위를 꽉 잡고 있는 힘껏 비틀면서 숯가루며 남은 껍데기며 모든 것들을 벅벅 긁어냈다상처가 깊게 파여서 흰색 살밖에 없는데도 꽈악 잡고 있는 힘껏 비틀었고껍데기 없는 흰색 살에 약을 어마어마하게 발라주었다치료가 끝나니 간호사가 와서 휠체어를 끌어주었다간호사에게 정말 지금 이상태로 숨질 것 같다고 하니 무통주사를 꽂아주었다. 간호사는 주사팩에 연결된 전자기기를 가리키며 버튼을 누르면 주사액이 더 빨리 투입되니 아프면 참지 말고 신속히 누르라고 했다무통주사를 맞으면 통증을 잘 느끼지 못했다다만 온몸에 있던 힘이 쭉 빠지면서 잠에 빠져들게 되는 효과도 같이 봤다링거는 무통주사까지 총 3개가 되었고거즈로 상처부위를 벅벅 긁어내는 치료와 비명소리는 매일 반복되었다.



수술

중간에 수술도 받았다. 수술내용은 전신마취 후 불필요한 피부를 칼 같은 걸로 긁어내서 없애는 수술이었다정말 도살장으로 질질 끌려가는 돼지처럼 수술대에 올라가니 의사가 양 팔을 붕대로 묶어서 결박하고 링거를 꽂는 곳에 핑크색 마취약을 넣었다순간 5초간 시야가 뿌옇더니 마취가 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병실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술이 끝난 것이었다. 그리고 다리엔 기브스가 채워져 있었다. 마취가 덜 풀려서 헤롱헤롱 했고,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그제야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그렇게 주옥같은 병원생활을 2달 정도 했다퇴원할 때 즈음엔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고이제 또 험난한 여행길의 시작이구나라는 생각에 빠이팅을 외쳤다


치료를 잘 받고 퇴원을 할 때쯤, 병원비 수납을 하러 창구로 갔다무통주사같이 비싼 비급여(보험처리 안 되는) 치료 물품들 때문에 병원비가 산더미처럼 나올까 봐 걱정이 조금 되었는데, 나처럼 중증화상환자는 치료비의 95%를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어서 사무장의 도움을 받아 신청을 했추가로 실비보험도 하나 들고 있어서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제도랑은 별개로 중복적으로 보험비를 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병원에서 오히려 돈을 벌게 된 셈이었다. 그래서 그 돈으로 감자튀김을 사 먹으며 회복을 스스로 축하했다. 그리고 겨울 날씨에 퇴원을 한 거라서 며칠간은 추위가 적응이 잘 안 돼서 굉장히 고생했다. 

 


병원 찾아와 주신 하늘이형, 상헌이, 윤수형님 다들 감사합니다 :)







이전 19화 걸어서 한라산 100k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