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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Aug 17. 2019

걸어서 한라산 100km

이동거리 100km, 등산코스 6.3개 정복, 4박 5일의 여정길


다음날 아침

다음날 아침, 꿈속에서 고라니가 찢어 죽일 듯이 쫓아오길래 치타로 빙의해서 황량한 들판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라니와 끝없는 레이스를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서 잡혔다. 결국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털을 쥐어뜯기고 있었는데 작업자 분들이 휴양림에 있는 잔디를 깎으려고 예초기를 웅웅 돌리시는 소리를 내셔서 그 소리에 악몽에서 깰 수 있었다. 눈을 떠보니 옷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고, 몸은 마치 몽둥이로 한 대 맞아서 사후 경직된 활어처럼 경직된 상태였다. 젠장.. 도대체 이 자리엔 수맥이라도 흐르는 걸까? 아니면 고라니 그 자식의 꿈을 꿔서 그런 건가? 밤잠을 이루지 못함에 원통함을 숨길 수 없었다. 


늦잠을 자서라도 피곤함을 풀고 싶었지만 소리가 시끄럽고 날이 미치도록 더워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치 WD-40이 미처 뿌려지지 못해 끼익 거리는 생활관 문처럼 삐걱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 물티슈 한 장을 뽑아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버틸 수 있게 실전에 꼭 필요한 장비들만 엄선하여 드라이백에 주섬주섬 챙겨 담았다. 보조배터리, 타프, 버그 넷, 등산스틱, 침낭, 고글, 헤드라이트, 바람막이, 우비 상하의, 양말, 전 날 만든 비빔밥, 생라면, 티타늄 포크 숟가락, 물티슈 등을 챙겼고, 물은 2L만 챙기되 사용을 최대한 줄이기로 했으며 가스를 포함하여 토털 700g~1000g 정도 되는 취사도구는 무게 경량화 목적으로 제외했다. 이 장비들은 식사/수면/배설/우천/벌레퇴치/야간 시야 확보 등을 모두 고려한 것으로, 식량의 양을 고려하면 한라산에서 하루 혹은 이틀을 버틸 수 있는 세팅이었다. 장비 준비는 이렇게 끝났다. 


영실코스 진입

헬멧과 짐을 모두 사람들이 볼 수 없는 1100 도로 옆 숲에 던져놓고, 위치 기억용 사진을 찍은 뒤 가벼워진 자전거를 타고 영실입구로 갔다. 곧이어 한라산국립공원영실관리팀이라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여기가 입구인 줄 알고 국보 980310호인 자전거를 자전거 보관함에 묶어두고 딸랑 배낭 하나만 들쳐 메고 걷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빤스가 땀에 젖어들어갔는데, 점점 기력이 빠지면서 점점 시야도 느리게 따라오는 것 같고, 마치 닭 장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골골거리는 병든 닭처럼 비틀대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 한 휴게소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산 중턱에 웬 휴게소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휴게소가 진짜 영실코스 등산로 입구 부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전거를 쭉 타고 편하게 와도 됐었는데 입구를 착각해서 한참을 뙤약볕으로 걸어온 것이었다. 순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생각과, 땅바닥에 코를 박고 죽을까 하는 생각이 번갈아서 들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휴게소라도 발견했으니 다행이지. 뭐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500ml 물통에 스틱커피 넣고 얼린 게 4천 원, 그냥 생수 얼린 것도 4천 원. 물 두 번 사 먹었다간 대대손손 20대까지 빚쟁이한테 쫓겨다니며 살 것 같아서 물보다 저렴했던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영실코스로 들어갔다. 햇볕은 쨍쨍했고, 매미들은 시끄럽게 울었고, 바람은 솔솔 불었다. 라디오 기계에 트로트를 크게 튼 노인들이 간혹 매우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쳐가기도 했다.



So Big..

한라산은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벌도 크고, 모기도 크고, 새도 무지막지하게 컸다. 거짓말 안 치고 팔다리가 영덕대게같이 긴 잠자리만 한 모기가 다니는데 한 번 물리면 미라가 될 때까지 헌혈당하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지나갈 때 표정을 보아하니 "걸리면 뒤질 줄 알아" 하는 표정으로 안 물고 그냥 옆으로 뽈뽈뽈 날개 흔들면서 쓱 쳐다보고 지나가는데,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마치 롤러코스터가 땅바닥을 향해 수직 낙하할 때 심장이 바닥에 더 빨리 도달하는 것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그리고 중간에 가만히 계셔도 괜찮으실법한 오장육부가 말썽이라서 등산로를 이탈해서 대나무처럼 생긴 조릿대 밭에서 대변을 보고 있었는데, 볼일을 마치자 1분도 안 되어서 일반 파리의 3배 사이즈 되고 몸에 윤기가 좔좔 흐르면서 형광색 색감을 내는 파리들이 100마리는 꼬였다. 이 파리들은 옛날 재래식 화장실 주변에 날아다니던 똥파리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몸집이 컸다. 똥으로 파리를 유인해서 몇십 마리 잡아서 태양빛에 익혀먹고, 그걸 또 소화시킨 후 배변을 싸서 파리를 또 유인한다면 배도 부르고 무한 재생에너지처럼 평생 한라산의 괴인처럼 생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굵직한 파리들이 우글우글하게 모여서 내 똥을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그렇게 영양가 있게 먹었나 싶어서 머쓱했다. 그렇게 원래 있던 등산로로 돌아와 보니 까마산 중턱 상공에 어린애만한 까마귀들이 마치 허리케인이 도는 것처럼 웅장하게 빙글빙글 날아다니는데 와.. 이게 한라산이지 싶었다. 이처럼 한라산의 동물들은 우람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파계승

1시간쯤 뒤, 영실기암 쪽 나무데크에 경량 의자를 설치해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배가 반쯤 찼을 때쯤 머리를 빡빡 밀고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이 내가 있던 데크로 올라왔다. 스님과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스님은 씩 웃으시더니 난데없이 "에헷!" 하는 추임새와 함께 내 바로 옆에 앉았다. 한여름이라 데크 바닥이 엄청 뜨거울 텐데 거기에 앉아서 아무런 내색도 안 하고 저 먼 곳을 바라보며 경치 구경을 하시던 모습이, 와 역시 수행하시는 분들은 달라도 뭔가 다른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스님은 갑자기 포켓소주와 훈제 삼겹살을 꺼내서 먹기 시작하셨다. 몹시 놀랐다. 생각해보니 그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는 조금 달랐다. 얼굴부터 일반적인 스님들의 퍽퍽한 얼굴과는 달리 마치 미시시피강의 강물이 흐르듯, 산유국의 기름이 터지듯 기름기가 얼굴 가득 흘렀고, 고무신은 앞창이 모두 닳아서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뭔가 보면 볼수록 이상한 스님이셨다. 너무나도 신기했던 나머지, 용기 내어 스님께 말을 건네보기로 했다. 


"스님이세요?" 


스님은 대답도 안 하고 씩 웃으시며 끄덕끄덕거리셨다.


"저기... 스님이신데 고기 원래 드셔도 되시는 건가요? 하하.." 


스님은 또 입에 삼겹살을 한가득 쑤셔 넣으시고 대충 씹으시더니 소주 두 모금 꿀떡꿀떡 마시고 웃으시면서 끄덕끄덕 거리셨다. 그 뒤로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서 대화는 끝이 났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파계승이셨던 것 같다.




안갯속 추억

한라산은 하루에도 비가 왔다가, 해가 떴다가, 눈이 왔다가, 안개가 끼는 곳이다. 영실코스를 따라서 쪼르르 올라가는데 영화 미스트처럼 안개가 온 세상을 덮을 듯이 밀려오더니 곧이어 한라산이 모두 안개에 잠겼다. 가시거리는 고작 5m. 산이 솜사탕이 된 것처럼 안개에 완전히 갇혔다. 잠시 뒤,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생각보다 강하게 내렸다. 새끼손가락 반 정도 굵기의 비가 후두두 떨어지는데 하산하는 사람들 표정을 보니 비에 젖어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작지왓에 도착했을 때, 산 중턱에서 마주친 아줌마들과 애기 한 명이 선작지왓에 먼저 도착하여 떨어지는 빗속에서 휴대폰으로 무엇인가 다급하게 찾아보고 있었다. 아마 내려갈 때 걸리는 시간을 검색하고 어떻게 하면 빨리 내려갈 수 있을지를 상의하는 것 같아 보였다. 비를 맞으며 서있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에, 그저 애기한테 손을 죔죔 하면서 방긋 웃어주고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애기는 큰 소리로 "아까 그 아저씨다!" 하며 나를 쳐다봤다. 애기가 소리치니 아줌마들도 누구인가 싶은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아마도 이게 오늘 사람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나: "나는 아저씨 아닌데~"

아줌마들: "ㅇㅇ아 아무한테나 아저씨 하면 어떡해. 삼촌~ 아니면 오빠라고 해야지."

나: "하하, 요즘은 원빈 닮으면 다 아저씨라고 하나 봐요? 크하하ㅋㅋㅋ" 

아줌마: (바퀴벌레 보는듯한 표정으로)"네 뭐라고요?ㅡㅡ" 

나: "아.. 아닙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원빈 드립을 쳤다가 한라산에서 생을 마감할뻔했다.



휴식

아줌마들은 애기와 함께 하산했고, 한라산엔 이제 나 혼자뿐이었다. 선작지왓에서 전망대로 올라가니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떨어지고 비바람까지 강하게 몰아쳤다. 우산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비밖에 없었기에 전망대에 헬리녹스 체어를 설치해놓고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아서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좋아지길 간절히 바라며 거의 30분가량 겨드랑이에 팔을 찔러고 앉아있었다. 아직까지도 이때를 생각하면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저 높은 하늘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렇다. 30분이 지나자 도저히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30분 만에 모든 안개들이 걷혔고, 아까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환상적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식물들은 잠에서 깨어나 햇빛을 받으며 물기를 툴툴툴 털어냈고, 이 산의 진짜 주인인 고라니들이 나타나 조릿대 위를 뛰어다녔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구름은 표백제를 넣고 세탁기에 돌린 듯이 깨끗해졌다. 공기청정기로 수백 번 걸러낸 듯이 흠없이 맑은 공기가 흐름을 타고 폐에 들어오는데 몸의 모든 세포들이 10년은 젊어지는 느낌이었다.



판단 오류

비가 완전히 그쳐서 기쁜 마음으로 윗세오름 윗세오름-남벽 쪽으로 해서 백록담에 가려고 했는데, 길이 없었다. 그제야 웹 검색을 해보니 영실코스는 백록담으로 가는 코스가 아닌, 백록담을 살짝 비껴가는 코스이고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없는 코스란 걸 알게 됐다. 영실코스로 온 가장 큰 목적이 백록담을 밟기 위해서였는데 후.. 지도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이젠 어떡하지? 이대로 돌아갈까? 순간 낙담하기도 했으나 백록담을 못 본 것이 너무 아쉬워서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며 앞으로 며칠이 걸리던 백록담은 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나서 야간산행을 3시간 정도 했을까, 배터리를 아끼려 광량을 줄여놓은 헤드라이트의 희미한 불빛을 등불 삼아 축축이 젖은 산길을 걸어서 잠자리를 찾아 헤매었다. 레이저 빔을 쏘는 동물도 보고 저 하늘에 초승달도 보고, 고라니 울음소리를 듣고, 개 짖는 소리도 듣고, 별의별 소리들을 다 들으며 신나게 걸으니 어느새 둔비 바위 부근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잠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나뭇잎이 수십수백 년 동안 쌓이고 부패하고 하는 과정을 거쳐 매우 두꺼운 나뭇잎 매트리스가 깔린 곳이었다. 그래서 나무들 사이에 평평한 공간이 있는 곳에 타프를 치고, 푹신한 바닥에 침낭을 깔아놓고 비박 세팅을 끝낸 후 눈을 감았다. 산 정상 부근인데 비까지 오고 밤이 되니 기온이 얼마나 떨어지던지. 어마어마한 추위가 비박지 주위를 맴돌았다. 다행히 침낭이 겨울 침낭이라 참 다행이었다. 이 날 하루 총 20km의 일정을 이렇게 마쳤다. 정말 고달픈 하루였다.



성판악

다음 날 아침, 커튼처럼 햇빛을 가려주던 나뭇잎들 틈으로 여러 줄기의 햇빛이 들어왔다. 기분 좋게 일어나서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다 보니 삼성 무풍 에어컨에서 나올법한 상쾌한 바람이 몸을 휘감았고, 어젯밤 그렇게 피곤했는데도 온몸 구석구석 피톤치드가 들어가서 개운함의 극치를 경험할 수 있었다. 3일 차인 이날의 계획은 이러했다. 한라산을 하산하여 돈내코지구 안내소를 지나 산록남로 타고 이동, 516로로 갈아타고 성판악에 도킹하는 것. 원래 오늘쯤이면 영실로 다시 돌아가야 했을 계획이 이젠 며칠이나 걸릴지 모르는 여행이 되었다니. 굉장히 설렜다. 장비를 다 수거해서 배낭 들쳐 메고 일어났다. 그리고 오후 2시, 음수대가 있는 돈내코지구 안내소에 도착했다. 음수대에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서귀포시 충혼묘지 쪽으로 내려가서 산록남로를 걷고 있었는데 나에게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노래 가사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파란색 포터가 끼익 멈춰 서고 유리창이 내려가더니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아리따운 미인분께서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거신 것이었다.


"저기 hoxy.... 어디까지 가세요?"

"성판악까지 가려고요."

"어? 저도 그 방향이에요. 얼른 타세요 태워드릴게요!"


뒷집 도령이 앞집 낭자를 볼 때 심장이 뛰듯, 심장이 쿵쾅쿵쾅거렸다. 그렇게 예쁜 미소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뽀얀 피부부터 부끄러운지 나올 듯 말듯하게 생긴 애교 살까지. 버스정류장의 유혹도 쿨하게 뿌리친 나였지만, 어째서인지 이미 머릿속으로는 결혼까지 해서 손주까지 보면서 "다음 생에도 당신일세.. 껄껄" 하며 늙는 상상을 턱관절이 빠지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심장 펌핑으로 인한 단전부 혈액 쏠림까지 추가되어서, 그녀의 제안은 마치 사과하나 잡숴보라고 꼬드기는 뱀 새끼의 유혹처럼 다가왔다. 이미 마음 한편엔 그녀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다.


"아... 저...."


한 2초간 어버버버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찰나의 순간에 생각해보니 이미 도보로만 다니기로 다짐한 나였기에 차량 탑승은 떳떳하지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엔 그녀를 떠나보내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도로를 선택하기로 했다.


"감사하지만 걸어갈게요. 도보로만 다니는 여행이라서요."

"하하, 고행을 하신다니 제가 어찌 말릴 수가 없네요. 차 쌩쌩 달리니까 조심히 다니세요~"

"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차가 붕 떠난 뒤엔 향수 냄새가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우듯 흩날리면서 콧잔등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 독하지도 않고, 딱 사랑스럽다 느낄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향. 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며, ‘과연 잘한 걸까’ 한참을 멍한 상태로 쳐다보다가 걷기 시작했다. 이 날 나의 머릿속엔 온통 그녀의 미소뿐이었고 폐엔 방금 전 그녀가 남기고 간 향수 냄새가 타르처럼 달라붙어 도저히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차가 떠난 방향으로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구멍가게가 보여서 초코파이며 라면이며 먹을 것을 구입하고, 가게에서 나와서 또다시 도로를 걸었다. 총 이동거리는 20km. 거리는 얼마 안 됐지만 계속 오르막만 있어서 칼로리 소모가 엄청났다. 처음엔 자신만만하게 출발했으나 땀은 삐질삐질, 다리는 후들후들. 발의 모든 부분에서 후끈후끈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고 어깨끈이 닿는 어깨 부분은 근육이 찢어지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턴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고, 목이 타들어갔다. 군대 행군도 이렇게 안 힘들었던 것 같은데 폭염에 오르막인지라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죽을 둥 살 둥 걸어야 했다. 치졸 비열 비굴 비겁 졸렬 간사 옹졸 추악한 뱀 새끼의 유혹도 다시 찾아왔다. 엄지손가락 하나면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세울 수 있는데 편하게 가자, '히치하이킹'도 '하이킹' 아니냐 라는 옹졸한 생각과, 아까 포터녀도 거절한 나의 뚝심이 서로에게 칼을 켜누며 맞서 싸웠다. 


여전한 친구

문득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가 생각이 나서 기운을 얻고자 전화를 걸었다. 이 친구는 학교 다닐 때 맨날 "이상해.."이러면서 곁눈질로 음흉한 미소를 짓는 걸 유행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목소리를 들으며 위로라도 받아볼 겸 통화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그렇게 친구에게 아까 포터녀 만났는데 거절한 이야기, 오늘 오르막만 20km 걷는다는 이야기를 하니 친구는 여전히 몇 년 전과 동일한 반응을 보여줬다.

 

"아 이상해~~ 그걸 왜 거절해~ 그 여자 포터 내가 타고 간다~"

"얘는 맨날 말만 하면 이상하대, 이상하면 치과에 가야지 x친놈아! 그리고 네가 그 포터를 왜 타, 됐고, 끊는다."

"뭘 벌써 끊어?"

"오늘 너무 힘들어서 네가 맨날 하는 이상하다는 말만 듣고 끊으려고 전화한 거야. 담에 또 전화할게."

"그래." 


세월이 무색하게 변함없이 유행어를 전파하는 친구와, 변함없이 그 친구의 "이상해~" 유행어를 조금도 받아주지 않는 나였다. 몇 년이 지나도 우린 똑같구나 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힘든 것이 조금은 완화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부지런히 걸어서 성판악코스 입구에 도착했다. 성판악에 도착하니 휴게소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식당도 있고, 데크도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다들 차량으로 왔다가 등산만 하고 가기 때문에 저녁이 되니 사람도, 차도 없었다.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래서 혼자 전세를 내기라도 한 듯이 공중화장실에 충전기를 꼽아놓고, 조용한 나무데크에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아까 그녀와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게 3일 차의 밤이 찾아왔다. 


백록담으로

다음 날 아침, 성판악 휴게소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순대국밥을 하나 먹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어지간히 식당밥이 그리웠던 것 같다. 며칠간 생라면을 부셔먹고 비닐봉지 밥을 먹고 다녔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성판악 코스 매표소에서 정상까지 산행거리는 왕복 20km, 산행 시간은 왕복 9시간다행히 편의시설이 하나도 없는 영실코스와는 달리, 컵라면이나 연양갱 등의 품목을 판매하는 진달래밭 대피소가 있어서 중간에 컵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쉬엄쉬엄 오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내가 정상에 올라왔다니..’


4~5시간의 산행 끝에 해발 1950m인 백록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록담엔 안개가 계속해서 지나가면서 분화구를 덮었다 말았다를 반복했는데 그 경치가 정말 예술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뭉쳐져 있었고 땀이 한가득이었지만 백록담의 경치와 내가 목적한 바를 이뤘다는 성취감에 며칠간 누적된 피로가 쭉 내려가는 듯싶었다. 그래서 2시 30분까지 백록담에서 세상 편하게 신선놀음을 하다가 등산로 입구로 되돌아왔다. 내일 걸을 것도 더 걸어볼까? 고민이 되었지만 이미 20km를 넘게 이동했던 터라 더 이상은 가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서 내일 휴게소가 영업을 시작하면 구입을 해야 하는 물품도 있었고, 충전을 해야 하는데 여기 화장실만 한 곳이 없어서 전 날 잤던 데크에서 또 잠을 청했다. 그렇게 4일 차가 지나갔다.



한라산 노숙 5일 차. '복귀'

성판악 입구에서 대략 해발고도 1000m쯤까지 내려가면 수악길이라는 둘레길이 시작되는데, 수악길-동백길-하원 수로길-영실코스 이렇게 이어져있어서 이 코스대로 영실코스로 복귀하기로 했다. 혹여나 이 날 하루 만에 복귀를 못 할까 봐 막 뛰어다녔는데 그러다가 실수로 뱀 꼬리를 밟아서 골로 갈 뻔했다. 다행히 등산스틱으로 후들겨패서 숨통을 끊어놓아서 물리진 않았지만.. 그 뒤로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전력질주를 했더니 딱 해가 거의 다 졌을 때 영실코스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운이 쭉 빠진 채로 4박 5일간의 개고생을 끝내고 나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자전거와 짐을 찾아서 하산하고, 천제 2교라는 다리 옆으로 가서 씻고 빨래하면서 지난 며칠을 되돌아봤는데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에 행복에 젖어들었다. 총 100km를 이동하고, 등산코스 6.3개 정복한 길고 길었던 4박 5일의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잘 있어라, 한라산에 얽힌 이야기들아, 그리고 한라산아.





제주를 떠나며

나에게 크나큰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면, 과도한 스트레스와 대인기피증 증상을 주기적으로 겪었단 것이었다. 사람을 많이 보고 만나긴 하는데 내 몸에선 냄새가 났고 머리도 덥수룩하니 볼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 남이 어떻게 의식할지 신경을 쓰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경이 과도 해지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말을 더듬게 되었고, 몸을 떨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등의 증상이 심해졌다는 것이었다. 정도가 심할 때는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사 먹으려고 줄을 기다리는 것도 다른 사람들 눈초리가 신경 쓰여서 주문을 할 때 말을 더듬으면서 했고 식은땀까지 흘렸다. 정말 최악이었다. 증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숨어버리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면서 웅크리고 있으면 그게 더 정신상태를 악화시킬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잘 씻고 다니려고 노력했고, 용기를 내서 낯선 사람과의 조우를 계속해나가면서 정신건강을 회복해가기로 했다. 그래서 여행을 시작할 때쯤 SNS로 알게 되어 오랜 기간 학교 건축 프로젝트를 응원해주신 인규 형이 얼굴을 보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을 때 한치의 고민 없이 콜을 외쳤다. 위치는 제주시 부근, 자전거 끌고 만남의 장소로 갔다. 낯선 이를 만나는 것이 좋으면서도 긴장되었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도로가에서 만난 인규 형과 나는 제주에서 만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음에도 페이스북으로 서로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봐왔기에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서로를 반가워했다. 짧은 반가움의 시간이 지나고,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인규형네 집에다가 자전거를 들여놓고 밖으로 나갔고, 말고기에 한라산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투명한 불판에 구워지는 말고기와 말고기 초밥, 말고기 국, 말고기 육회 등을 안주로 인당 3병씩이나 마셨다.


"시현아 형 집에서 며칠 묵었다가 가는 게 어때? 제주 떠나기 전에 마음 정리도 하고 몸도 회복하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푹 쉬었다가 가."

"우와 정말요? 그럼 저는 정말 감사드리죠 형."

"그래. 며칠 힐링하고 가."


그렇게 형네 집에서 며칠 묵기로 했고, 다음날부터는 일주일 이상을 형네 집에서 머무르면서 함께 여행을 다녔다. 차량으로 제주도를 드라이브하며 1100 고지, 애월항 부근, 중문 시장 등 이미 자전거로 갔었던 곳들을 재방문했는데, 형이 치킨, 고기국수, 스파게티, 스테이크, 대왕 추로스, 햄버거 등을 계속해서 사주셔서 살이 다시 올라왔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떠나는 날. 나에게 15만 원짜리 통 갈치구이, 8만 원짜리 태국 마사지, 일주일이 넘는 숙박과 음식 등 며칠간 수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신 인규 형은 나지막이 말했다.


"시현아, 내가 이렇게 해주는 건 공짜가 아니다. 다 빚으로 생각해. 나한테 갚으란게 아니라, 나중에 커서 돈 벌고 하면 너같이 다니는 애들한테 갚으란 거야. 그렇게 돌고 도는 거지.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이 이야기를 듣고 참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도 나 같은 놈을 언젠가 만나서 이런 멋진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고 제주를 떠났다.



제주에서 만난 팔로워분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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