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1100km의 여행
자전거 국토종주의 꿈
중학교 때, 한 달 용돈 3만 원을 받았다. 하루에 천 원꼴이었으니, 피자빵 하나를 사 먹으면 고작 300원이 남는 액수였다. 피시방을 가려면 며칠간 좋아하는 피자빵을 포기하거나 판치기 혹은 포커로 돈을 따야 했으니,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전거 타기는 궁핍한 나의 주머니 사정에 있어서 체력향상은 물론이거니와 성취감과 정복감까지 안겨주는, 최고로 매력적인 취미활동이 되어주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해안을 내려가다 보면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계속해서 보이는 항포구들과 빨간 등대들, 그리고 로드킬을 당해 납작한 쥐포가 되어버린 동물들과 가스불을 켜놓은 듯 도로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처럼 볼거리도 끝내주게 많았지만, 무엇보다 고향이라는 멤브레인을 찢고 저 너머 타지로, 타지에서 또 다른 타지로 부랑자처럼 떠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왔다. 답답한 일상에서 탈피하여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생수를 온몸에 쏟아부으며 달리다가 정자에 대자로 뻗어서 낮잠을 자고, 저녁에 시장에서 산 옛날통닭 한 마리와 어렵게 구한 막걸리 한 병으로 소소한 일탈을 즐겨도 누구 하나 뭐라고 나무라지 않는, 그 자유의 시간들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떠나기 전 날엔 매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자유의 향기를 맡으며 샛별과 함께 달릴 생각을 하면 너무나도 설레었기 때문이었다. 첫날 스타트를 일찍 시작해서 많이 달려놓으면 그다음 날들은 그냥 술렁술렁 넘어가는 느낌도 들었다.(일화로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떠난 여행에선 무식하게 무거운 MTB 짐받이에 학교 가방을 칭칭 감아서 10kg 남짓의 짐을 챙긴 채로 첫날 새벽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무려 2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한 적이 있었다.)
자전거를 선물 받다
중학교 3학년, 매번 고물 자전거 하운드 500을 끌고 나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오는 나를 부모님께서 안쓰럽게 생각하셨는지 어느 날 뜬금없이 날 자전거 매장으로 데리고 가셔서 거금 60만 원을 들여 입문용 로드 바이크인 트렉 마돈 1.1을 선물로 사주셨다. 사이클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했고 그런 건 부르주아들이나 타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한순간에 무려 60만 원에 육박하는 로드바이크로 기변을 하게 되다니, 마치 신분상승이라도 한 듯이 기뻐서 활어처럼 파닥거리며 춤을 췄다. 자전거 한 대에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로드바이크를 손아귀에 넣고나서부턴 강릉을 자주 다녀왔다. 해안길을 따라 왕복 150km를 당일치기로 자주 다녀오면서 내 체력과 자전거의 성능을 계속해서 체크했다. 당일치기 강릉여행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이 자전거로는 충분히 더 먼 거리도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여름방학
여름방학이 오기 전, 내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지, 이 자전거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에 조금은 길어질 수 있는 자전거 여행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매일 하교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어떤 장비를 구입할지 고민했고, 자전거 여행자들의 글을 수 십 개씩 정독하다가 잠에 들었다. 그렇다 보니 수업시간에도 자전거 여행에 관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으면서 수업에 집중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 허벅지가 터지도록 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꿈에 젖어 루트와 계획을 짜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눈 깜짝할 새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여름방학을 장식할 여행 계획은 간단했다. 삼척에서 출발하여 동해안 해안길을 타고 부산에 가고, 부산에서 633km짜리 사대강길을 타고 대구, 충주 등을 거쳐서 인천까지 가는 1100km짜리 루트였다. 살면서 1100km라는 어마어마한 거리를 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많이 긴장되었지만, 침착하게 필요한 장비를 인터넷으로 구입해서 장비 세팅을 마치고 출발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출발 전 날, 늘 그래 왔듯 설레는 마음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얼른 새벽이 되어 알람 소리가 모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 적막을 깨고 울려 퍼지길 바랬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새벽
여행 출발 당일날. 새벽 4시에 시끌벅적한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잠에서 완전히 깨기 위해 잠옷 차림으로 거실로 뛰쳐나갔다. 거실엔 통유리창 옆쪽으로 철제 테두리가 둘러지고 세로로 길쭉하게 생긴 작은 창문이 있었는데, 기름칠이 되어있지 않아서 항상 끼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창문이었다. 창문을 끼익 소리와 함께 열자 시원한 새벽 공기가 방충망을 뚫고 훅훅 들어왔다. 구레나룻을 흔들고 지나가는 새벽 찬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해서 기분 좋게 잠 기운을 덜어냈다. 창문 밖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주황 점멸등이 깜빡깜빡거리는 시청 앞 사거리는 늘 그렇듯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창문을 열고부터 한 10분쯤 뒤에 쓰레기차가 와서 쓰레기를 집어갈 때만 잠시 시끄러웠다. 이 시각에 일어난 이유는, 여행 첫날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모범적인 라이딩을 해야 다른 날들도 첫 날을 본받아서 순조롭게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전거와 장비들은 이미 전 날 모든 점검을 마쳤다. 하지만 괜히 노파심이 들어서 재점검을 했다. 괜히 라이트도 한 번 더 켰다 꺼보고, 휴대폰 배터리도 다시 체크하고, 헬멧 턱끈도 다시 한번 꽉 조였다. 거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다보니 부모님께서 잠에서 깨셔서 방에서 나오셨다. 테이블에 앉아 물 한 컵씩을 드시면서 부스스한 눈으로 짐을 챙기는 모습을 신기한 듯이 지켜보셨다. 난 짐들을 더 꽉 조여매고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잠옷에서 라이딩 복장으로 환복하고 고글을 썼다. 기다란 일자 거울로 비추이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라이더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계획을 열심히 짜더니 오늘 진짜 출발하는구나. 차 정말 조심해야 해. 헬멧 꼭 쓰고.. 네가 아무리 조심해도 차들이 너를 못 보고 치면 정말 크게 다치니까, 답답하다고 벗지 말고 꼭 쓰고 다녀. 알겠지?"
"항상 조심하죠~ 걱정하세요. 헬멧 절대로 안 벗고 다니니까. 안전은 저한테 항상 최우선이에요."
"그래. 그렇게 안전을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엄마 아빠가 마음을 놓지."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대답 이후 엄마의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 '정말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유서라도 써놓을 걸 그랬나?'같이 괜한 생각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이 여러 안 좋은 상황에 대한 상상 때문에 완전히 뒤죽박죽이 됐다. 그 상태로 인사를 나누고, 자전거에 올라타서 페달을 젓기 시작했다. 자전거에 몸을 맡긴 채로 1m, 2m, 3m..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고작 몇 미터였지만 1100km라는 목표에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떨렸다. 계속해서 뒤를 돌아서 부모님의 모습을 확인했는데, 내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손을 흔들어주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점점 작아 보이더니 어느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 어??"
부모님의 환호 속에 출발해서 전속력으로 달린 지 고작 18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친구야 타이어 주걱이랑 펑크패치 좀 줄래? 펑크수리 후딱 하고 가자. 넌 잠깐 쉬고 있어."
"안 챙겨 왔어."
"응? 그건 네가 챙겨 온다 그랬잖아.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걸 안 챙겨 오면 어떡하니.."
함께 간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이 날 약속시간에 전화도 안 받고 계속 자느라 일정이 많이 지체됐다.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마친 나로선 굉장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열도 받고 해서 나 혼자 갈까 하다가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서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함께 간 것이었는데 분담해서 챙기기로 한 수리 키트도 안 챙겨 왔다고 하니 속이 정말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아침부터, 여행 첫날부터 얼굴 붉히기가 싫어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우선 가져온 숟가락을 타이어 주걱처럼 활용하여 타이어 탈착 하려고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숟가락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져서 실패했다. 그 뒤로 젓가락, 가위 등.. 가지고 있는 도구들을 모두 활용해서 타이어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결국엔 10여 분 만에 타이어를 탈착 했고 타이어 스레드에 박힌 철심을 뽑아냈다. 그리고 구멍 난 튜브는 다행히 예비용 튜브를 챙겨 온 게 있어서 예비용 튜브와 사용한 튜브를 교체하는 것으로 정비를 마쳤다. 예비용 튜브가 없었다면 정비를 못 해서 큰 어려움을 겪었을 뻔했다. 그 뒤로 잠시 동안 친구와 나는 말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일방적으로 묵언수행을 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친구가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여서 굉장히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입을 열면 쌍욕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 묵언으로 화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시현아 나 자전거가 이상해."
"왜? 아.... 하..ㅎㅎ 이런 C발 오늘 뭔 날이냐?"
또! 또!! 캐러멜 마끼야 또..!! 내 자전거를 정비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펑크가 또 나고 말았다. 이번엔 내 자전거가 아닌 친구의 자전거였다. 도로 한복판이라 어찌 대처를 할 수 없어서 공기를 지속적으로 넣어주면서 안전한 곳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바람은 밑 빠진 독처럼 10분도 안 되어 모두 빠지기를 반복했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금메달 휴게소라는 곳에 도착해서 친구의 자전거를 어떻게 해보려고 장비를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가방 속에서 라면을 발견했다.
"일단 라면부터 먹고 보자."
"응. 나도 배고파."
"키야~ 맛이 기가 막히네!"
"그나저나 내 자전거 어떡하냐."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일단 라면 불으니까 빨리 먹고 생각하자."
바다를 앞에 끼고, 큼직한 소나무 아래에서 양은냄비에 라면 4개를 넣고 끓여서 먹었다. MSG의 알싸한 맛이 혓바닥을 휘어 감는데 그 매혹적인 맛에서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에다가 둘 다 배가 고픈 상태여서 한 젓가락 남김없이 싹싹 건져먹었다. 냄비 끝부분을 후후 불어서 뜨거운 국물까지 둘러마셨다.
"아니 내 자전거는 어떡하냐고.."
"(속마음: 니 자전거를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ㅄ아) 후... 친구야 진정하자. 응? 화부터 내지 말고, 침착하게 현실적인 방법을 생각해보자고, 오케이?"
속으론 한 번 더 혈압이 올랐다. 본인 자전거가 펑크 난 건데 왜 나한테 해결하라는 식으로 따지는 건지, 평소에 유별난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는데, 이걸 지금껏 모르다가 여행 1시간 만에 알아버리다니 참.. 여행을 마치면 이 친구와의 관계는 매우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손절할 생각은 없었다. 이왕 나온 거, 안 싸우고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전거 가방에서 물건들을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테이프를 꺼냈다. 테이프를 꺼낸 이유는 왠지 테이프를 라이터로 녹여서 펑크 부위에 떨어뜨리면 테이프 녹은 물이 굳으면서 펑크패치와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그 행위가 아무런 효과가 없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되었다. 테이프 녹인 물은 너무나도 쉽게 갈라졌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열이 받았는지 쌍욕을 하다가, 끝내 자기 분을 못 이기고는 타이어를 길 가 도랑에 던져버렸다.(버린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지 마 제발
"친구야 그래도 타이어를 버리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타이어라도 있으면 대충이라도 탈 수 있잖아."
"몰라 C발! 저거 타이어도 진짜 개 X신이야! 저딴 건 던져버리는 게 나아! 그냥 버리고 가!"
"아니 타이어를 떼고 어떻게 가겠다고. 혹시나 네가 나중에 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저거 다시 주워서 가자. 내가 챙겨주면 될 거 아니야."
"아니 챙기지 마. 저딴 거 못쓴다고."
"하.. 그래(넌 진짜 손절이다.). 근데 림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테이프로 조금 감아줄게. 그건 괜찮을까?"
"그러던가."
친구의 자전거 앞바퀴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주었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끌고 갔는데도 테이프는 림 모양대로 금세 찢어졌다. 친구의 자전거가 타이어 없는 벌거숭이가 되었기에, 자전거가 멀쩡한 나 또한 자전거를 타지 못하고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가야 했다. 삼척에서 울진을 가는 도로엔 오르막 내리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자전거 전용 신발(클릿슈즈)을 신고 자전거를 끌면서 가다 보니 신발 가장자리에 있는 스터드가 모두 닳았다. 결국 발을 디디면 클릿 부분이 닿았고, 발이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철판 긁는 소리가 났다. 클릿 슈즈를 신은 상태로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3시간 넘도록 자전거를 끌고 무더위 아스팔트 위를 걸었다.
중간에 자전거 여행객들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우리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시더니 멈춰 서서 무슨 문제가 있냐며, 자신들은 펑크패치도 있고 예비 튜브도 있어서 도와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셨지만 친구 자전거의 앞바퀴를 가리키며 타이어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 아쉬워하며 떠나갔다. 이제 사람을 원망하게 만드는 친구 녀석의 행동에 점점 지쳤다. 친구가 수리킷만 챙겨 왔어도, 아니면 타이어만 안 버렸어도 지금처럼 양말에 구멍이 나도록 땀 흘리며 걷는 상황은 겪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화가 나다가도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이별여행, 손절 여행을 다니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어느새 미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안 보게 될 사이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포항 도착
결국 3시간 넘게 걷다가 막바지에 히치하이킹도 하고 임원에서부턴 버스도 타서 포항까지 도착했다. 포항에 도착하니 시간이 꽤나 늦어서 이 날의 라이딩은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날은 친구의 새 타이어를 구입할만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날의 잠자리는 포항의 형산강 어느 다리 밑이었다. 원터치 텐트를 설치한 뒤 홈플러스에서 구입한 치킨과 OB맥주로 굶주린 배를 겨우 달래고 마른 목을 축였다.
"내일은 꼭 아침 일찍 일어나서 타이어부터 구입하자. 타이어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안 되네. 알겠지?"
"그래."
그렇게 둘은 곯아떨어져서 잠을 청했다. 여러모로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