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강원(도) 삼척(시) 남자
본좌 약력
-1998년 3월 10일 生 / 174cm / 73kg
-18살에 고졸검정고시 패스(최종학력 피자스쿨)
-자전거 여행 경력 828일(15-07-27~17-10-31)
-루사, 매미 등 수많은 태풍에서 생존(재난 생존자)
-핵공격 시 대처법 이미지 트레이닝 수십 회.
-대한민국 특전사 생존훈련 영상 수회 시청.
-걸어서 세계 속으로 다큐 수회 시청.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꿈 수회 경험.
-초2 때 바지에 세계지도 완성함(글로벌 리더).
-한국어 원어민급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3번 읽음.
-여자 친구 없음
본좌 한 말씀
Dream the impossible,
do the impossible love,
fight with unwinnable enemy,
resist the unresistable pain,
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아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라.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당신이 미친 거요?(돈키호테 中..)
진정한 행복이란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 속에서 트랙 위를 내달리는 경주마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다. 경주마의 행복은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잊힌다.
진정한 행복은 맑은 눈빛으로, 붉은 노을에 비추인 황금빛 갈기를 거칠게 휘날리며, 우렁찬 콧소리와 함께 푸른 초원을 자유롭게 질주하는 야생마의 전유물이다.
만약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와, 온갖 시끌벅적한 소음들이 난잡하게 울려 퍼지는 경기장 안에서 당장 뛰쳐나와라. 거기엔 값비싼 안장이나 비싼 장식품 같은 허영 덩어리들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환호성만 존재할 뿐, 경주마를 위한 행복이라곤 한 움큼도 남아있지 않다.
만약 삶의 아름다움에 정답이 있다고 한다면 야생마 또한 트랙 위를 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생마는 트랙 위를 달려야 할 의무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 야생마를 끌고 가 트랙 위를 억지로 달리게 할지라도, 길고 일정하게 잘린 트랙 위의 야생마에겐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 미신에 불과하다. 이미 수많은 경주마들이 증명했듯, 트랙의 끝엔 행복은커녕 자기 자신이 왜 사는지도 모르게 되는, 흔해빠진 투입과 뻔한 산출만이 존재한다.
행복의 불문율을 알고 싶다면, 행복의 열쇠를 얻고 싶다면, 야생마가 되어라. 맑은 눈빛으로, 붉은 노을에 비추인 황금빛 갈기를 거칠게 휘날리며, 우렁찬 콧소리와 함께 푸른 초원을 자유롭게 질주하라.
푸른 초원은 이제 당신의 것이다.
본좌 어렸을 적
필자는 1998년도 3월, 인구 8만의 강원도 삼척시에서 태어났다. 살던 곳의 위치는 삼척 시내와 거리가 멀고 면소재지와도 거리가 먼, 삼척시 중에서도 첩첩산중이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집에선 마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보이는 것은 허름한 이웃집 몇 채와 길게 뻗은 밭, 모내기로 심은 모종의 허리춤까지 물이 찬 논, 저 너머에 두리봉이라고 불리는 해발 천 미터의 산이 전부였다. 마을은 그 흔한 가로등조차 없었고, 경운기와 트랙터를 제외하면 차량의 왕래조차 없는 곳이었다. 편의점, 병원, 우체국, 영화관, 피시방 같은 시설은 꿈도 꿀 수 없었으며, 혹여나 밤에 밖을 나갈 일이 생길 때면 큼직한 배터리를 넣어서 작동시키는 굵직한 노란색 손전등을 꼭 챙겨나가야 했다.
이곳은 어린 왕자가 장미꽃 한 송이와 살던 사막 한복판처럼 드넓은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환경이 환경이다 보니 낮에는 잠자리들과 논밭을 뛰어다녔고, 개울에서 바위를 뒤집어가며 민물가재를 주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면 부모님께선 직접 기르신 감자와 호박잎을 솥단지에 쪄주셨는데, 호박잎을 손에 얹고, 그 위에 감자와 된장 그리고 겉절이 김치를 얹어서 먹으면 세상 그렇게 달콤한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면 해가 지기 전까지 집 앞마당에서 친형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마당에서 뛰어다니며 장난을 쳤고,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마치면 모빌처럼 바쁘게 돌아가며 밝은 빛을 내뿜는 별빛 아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이 되면 새들은 집 앞 목련나무에 앉아 짹짹거리면서 학교에 갈 시간에 맞추어 모닝콜을 해주었다.
학교는 자그마한 분교에 다녔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총 학생수가 10명도 채 되지 않았던 분교였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학생이 없어서 폐교했지만, 당시엔 매일 약 4km 정도를 산을 넘고 계곡을 넘어서 강아지들과 함께 등하교를 하며 다녔다. 졸졸졸 따라오는 강아지들과 함께 등교를 하면 강아지들은 동네 강아지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놀았고, 나는 학급에 유일무이한 학생이었으므로 선생님으로부터 1:1 개인수업을 들으며 교육을 받았다. 나는 이러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도시 아이들이 뒷산에 올라가 시골 체험한답시고 운동화로 밤송이를 비비적거릴 때 밤송이로 저글링을 돌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됐고, 호기심 많고 장난기 많은 자연인으로 성장해나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턴 시내로 거처를 옮기면서 시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다. 친구들이 생겨서 좋았지만, 나는 첩첩산중에서 야생동물처럼 자유롭게 살다왔는데 상대적으로 공기도 안 좋고 시끄럽고 다닥다닥 들어선 건물들 틈에 살아야 했던 시내 생활은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스포츠에 관심이 갔고, 여름만 되면 집 앞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즐겼고, 무에타이와 우슈를 배워 시합에 나가기도 했다. 학교 체육수업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다가 어쩌다 보니 자전거의 매력에도 빠지게 되었는데, 너무 깊게 빠진 나머지 시간이 남을 때마다 친구들과 함께 시내를 질주하거나, 당일치기 자전거 여행을 다녀오면서 자전거 마니아로서 행복한 시간을 즐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