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 만에 집으로.
"할머니~ 둘째 손자예요! 네 요즘에도 여행 다니고 있죠. 밖에서도 잘 자요. 집엔 당연히 들어가야죠. 예? 글쎄요, 언제 들어갈진 확실히 모르겠는데 한 번 밖에 나온 김에 많이 다녀보려고요. 네, 당연히 여행 빨리 끝내고 직장도 잡고 해야죠. 최대한 빨리 집에 들어가려고 저도 노력은 하는데 쉽진 않네요. 할머니, 손자가 왜 이렇게 여행을 안 끝내는지 아세요? 저기 멀리 있는 나라에다가 학교 선물해주려고 그러는 거거든요(고함과 함께 통화 종료.). 여보세요? 하..."
여행이 밥 먹여주냐, 언제 돌아오냐, 직장은 어디로 잡고 돈은 어떻게 벌 거냐. 매번 듣는 지긋지긋한 할머니의 잔소리다. 당연히 손자가 걱정이 되셔서 그러셨을 것이다. 하지만 조언하는 방식은 걱정하는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고, 선을 넘어서 지나치게 간섭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얼마 뒤부턴 매 통화마다 고함을 지르셨다. 누구는 집에 안 가고 싶어 하는지 아시나.. 그렇게 한 달에 두 번씩, 강원도 지역번호인 033)으로 시작하는 할머니 집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머리가 지근거렸다. 전화를 할 때마다 늘 좋게 해 드리던 대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단답형으로 변해갔다. 평소에 할머니와 전화를 할 때면 알랑방귀도 뀌고, 나름 애교도 부리면서 통화를 했는데, 이젠 전화를 걸면 일방적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으시다가 소리만 지르시니 일일이 대꾸해드리기도 싫어졌다. 심지어 전화를 거는 사람이 나였음에도 전화를 건 내가 욕을 먹는 상황이다 보니, 점점 전화번호부에 할머니를 검색해서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싫어져 갔다. 물론 할머니 딴에선 아끼는 손주가 인생의 황금기에 외딴데 나가서 히죽히죽 페달이나 젓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셨을 테니 할머니 입장에선 받아줄 만큼 받아주셨다 느끼셨을 수도 있으셨겠지만, 반대로 내 딴에선 내 인생 내가 설계해서 가치 있게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 사는 건데, 전후 사정을 모르신 채로 비판하시고 삶을 통제하시려고 하는 것으로 느껴져서 굉장히 불쾌했다.
매번 이렇게 같은 레퍼토리의 통화를 하다간 관계도 악화될뿐더러, 할머니의 말에 점점 세뇌를 당하여 꿈도 못 이루고 패잔병처럼 집으로 복귀할까 봐 더 이상 통화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로 할머니와 나 사이에 이루어지는 통화는 없었다. 할머니와 통화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나니 속이 암덩어리를 제거한 것처럼 시원했다. 지금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서 생긴 암세포에 암이 걸려 암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 뒤로 계속 이 지역 저 지역을 옮겨 다니며 여행을 다녔다. 그리고 중간중간 의도치 않게 할머니가 머릿속에 떠올라서 할머니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기분이 묘했다. 나의 처지가 처량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의 1등 손자로서 입지를 탄탄히 굳히며 살아왔는데 여행을 나온 게 무슨 죄라고.. 이렇게 갑자기 다트판이 된 것처럼 미운털이 콕콕 박히다니. 할머니가 하루 종일 집 걱정 건강 걱정 경운기 걱정 아궁이 걱정 개미 걱정 나비 걱정 달팽이 걱정 등 온갖 세상 걱정을 혼자 다하시니까 이런 일이 생겼다며 할머니를 원망했다. 그 뒤로 또 몇 개월이 지났다. 난파선 선원들이 갈증을 못 이기고 바닷물을 마시고 싶어 하듯 할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웠다. 이 정도 전화를 안 드렸으면 할머니도 어느 정도 내 마음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하고는 전화를 드렸다. 그렇게 다시 이루어진 통화에서 할머니는 전보다 많이 유순해지셨고 화도 안 내셨다. 내 귀의 캔디 같은 통화를 마치고 서로 기분이 좋아서 다시 할머니와는 가끔 전화하며 안부를 묻는 사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혹시나 할머니가 또다시 노파심을 품으셔서 이전과 같은 일이 생길까 봐 한 달에 한 번을 초과하는 전화통화는 하지 않기로 했다. 나름 신경 써서 적당한 거리를 가지며 지낸 것이다.
통화를 하면서 느꼈다. 내가 겉으로는 고향이 그립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솔향과 바다향이 동시에 나는 삼척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학교 건축비 2천만 원 중 고작 400만 원 정도밖에 안 모였는데 이런 저조한 성과로 고향에서 낯짝을 들고 다닌다 생각하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갔다가 여행지로 돌아오면 힘이 들 때마다 집을 그리워할 것이고, 집에 가고 싶어 할 때마다 여행은 점점 뒷전이 될 것만 같았다. 그걸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자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실행에 옮기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듯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처럼 고향을 고향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나에게 고향이란, 목표를 다 이룰 때까지 돌아갈 수 없는 종착역이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쓸쓸히 여행을 다니면서 향수병의 합병증인 조울증, 소화불량, 두통을 단 채로 여행을 다녔다. 더 비참했던 건, 이렇게 속앓이를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내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싫어서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이야기 한 마디를 꺼내지를 못했단 점이었다. 이렇게 옹졸한 생활이 500일 이상 지속되었다. 고민이 참 많았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금 같은 시간을 하수구에 쏟아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는 내가 과연 목표를 이뤄낼 수는 있는 건지.
소식
몇 개월 뒤, 전라남도에 있는 생일도라는 섬에 들어갔을 때였다. 육지로 가는 배가 오후에 뜰 예정이었고, 섬을 빠져나가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어서 해먹에 대롱대롱 매달려 늦잠을 자고 있었다. 깊은 잠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11시,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시하고 자려고 하니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 휴대폰이 어디에 있는 지를 몰라서 계속해서 손으로 옷가지 사이를 뒤적거렸다. 결국 눈곱도 제대로 안 뜬 상태에서 휴대폰을 찾아서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넘어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어무이로 저장된, 늘 밝은 목소리의 엄마였다. 그러나 이 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굉장히 어두웠다. 직감적으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막내야. 할머니가 지금 상태가 위독하셔서 중환자실로 옮기셨는데, 숨이 가쁘셔서 산소 호흡기를 차고 계시고 말씀도 제대로 못 하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이제 살 날이 얼마 안 남으셨대."
여행을 마칠 때까진 절대 집에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엄마의 전화 한 통에 여행을 출발한 지 500일이 넘은 상황에 고향에 잠시 들리기로 했다. 할머니가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곧바로 올라갈게.'라는 말을 하고 나서도 슬프지 않은 기색으로 무덤덤하게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시 돌아올 테니 일주일만 자전거를 맡아달라며 자전거를 맡겼고, 생일도에서 제일 빠른 아침 배로 빠져나와 광주로, 광주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삼척으로 꼬박 하루가 걸려서 집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할머니는 중환자실에 누워계셨고, 표정의 변화 없이 숨만 겨우 쉬고 계셨다. 아빠가 할머니의 귀에 대고 내가 왔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처진 눈을 힘겹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셨다. 몇 초간 서로 말이 없었지만 마주 보는 눈동자 안엔 그간 하고 싶었던 말들이 모두 담겨있는 듯 느껴졌다. 옆에 있던 사촌누나는 하염없이 펑펑 울었는데, 눈물도 전염이 되는 건지 나도 그만 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렸을 적 할머니가 자주 만들어주신 계란밥 이야기를 능청스레 꺼냈다.
"할머니, 얼른 일어나셔서 계란밥 해주세요. 계란밥도 해주시고, 명절이 다가오는데 전도 좀 부쳐주시고, 할머니 만두도 먹고 싶어요. 의사 선생님이 몸상태가 괜찮아지고 있다고 그랬으니까 금방 일어나셔서 해주실 수 있으실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나으실 거예요.”
당시 말씀을 하지 못하셨던 할머니는 만두피처럼 얇은 피부로 덮이고 퍼렇게 뻗은 핏줄이 도드라지게 깡마른 오른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할머니는 결국 해도, 달도 뜨지 않던 명절 전 날 새벽에 토끼 같은 손주들 얼굴도 보지 못하시고 계란 세 판 무렵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명절 전 날 돌아가셨기에 명절 당일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오른쪽 팔뚝에 완장을 차고, 설날 세배가 아닌 조문객들에게 하는 맞절로 명절을 보냈다. 그 뒤로 이틀간 입관, 발인, 하관의 모든 절차가 마쳐졌다. 매해 명절마다 가족들이 다 못 모인다고 슬퍼하셨는데, 이번 명절엔 증손주들까지 족히 50명은 넘는 대가족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두 모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날 만큼은 검은색 사선의 테이프가 발라진 영정 속 할머니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엔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아무런 감정을 못 느낄 줄로 생각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고향땅에 올라가야 하니 번거로울 줄로만 생각했고, 슬픈 감정도 못 느낄 줄 알았다. 그간 할머니한테 받은 것만 있었지 준 게 없었던 내가 그제야 여러 감정에 휩싸여 영정 앞에서 질질 짤 모습 자체가 어처구니없고 궁색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정말 돌아가시자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면서 그간 있었던 할머니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옥수수를 삶아 주시던, 사탕 사 먹으라고 용돈을 쥐어주던, 형이랑 싸웠다고 야단을 치시던 그 모습들. 그 한순간 한 순간들이 너무나도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에, 왜 벌써 가셨나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메리
할머니가 예뻐하신 강아지 메리. 귀가 참 귀여운 녀석, 애교를 잘 부리는 똘똘한 녀석이었다. 메리는 할머니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 넌 이제 자유의 몸이니 원하는 곳으로 떠나도 좋다고 당부를 하면서 목줄을 풀어주었는데, 어째서인지 도망을 가지 않고 오히려 씩씩한 모습으로 외딴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렸던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할머니 대신 가족들이 메리를 만나러 왔다. 결국 메리는 가족들을 따라서 할머니의 가족 신분으로 장례식에 참가했다. 하관식을 할 때 무덤 주변을 뱅글뱅글 돌면서 슬픈 얼굴 두 눈으로 장례를 끝까지 지켜봤던 메리. 이날 밤 메리의 눈가가 유난히 촉촉해 보였다. 이런 메리를 불쌍히 여긴 가족들은 밥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양껏 담아주었고 메리는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다음 날, 메리는 무려 시가 2만 원가 량하는 15kg짜리 대형견 사료를 할머니의 유산상속 명분으로 받게 되었는데, 매끼마다 밥그릇에 정량을 나눠서 먹을 능력이 없는 점을 감안하여 아빠가 주기적으로 사료를 나눠서 밥그릇에 담아주셨다고 한다. 그걸 다 먹고 난 뒤의 행적은 묘연하다. 일각에서는 '이웃집 강아지와 바람이 났다.', '남의 집 개밥을 임꺽정처럼 훔쳐먹고 다닌다'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카더라가 난무하였으나 가족 중에서 직접 메리의 근황을 확인한 자가 없으므로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른다'식의 불가지론적 추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추억
양념병들을 모두 꺼내서 버렸다. 이걸로 정말 많은 요리들을 해주셨는데 사용하지 않는 양념들을 치우고 나니 이젠 할머니 손 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생전에 담그신 고추장뿐이었다. 잡다한 양념들과 주방용품은 싹 버렸고 고추장은 각자 집에 가져가서 먹을 만큼 챙겨가는 걸로 하고, 나머지는 장독대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옷장은 사용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방을 깨끗이 정리할 겸 밖으로 꺼내서 아빠와 함께 부수었는데 나프탈렌 냄새가 심하게 났다. 그 부서진 옷장은 아궁이 옆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가족모임을 할 때 아궁이에 불을 때는 용도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 날 저녁에도 그 옷장으로 불을 때었는데 MDF 소재라서 그런지 이쑤시개처럼 재도 안 남기고 순식간에 연소되었다. 한쪽 구석에 걸려있던 벽걸이 시계의 시곗바늘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정확한 시각인 5시에 멈췄다. 가족들은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 날까지만 해도 잘 돌아가던 벽걸이 시계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걸 보며 정말 이상하다며 입을 모았다.
"이게 뭐꼬? 우리 어머니 지갑 아이가?"
"맞다 맞다! 여기 있었나."
"시현아, 이런 건 발견한 사람이 임자 데이. 이거 니 해라. 할무이 마지막 용돈이다."
저녁쯤, 고모들이 자잘한 유품을 거의 다 정리할 때 즈음 할머니의 지갑을 발견했고, 꼬깃꼬깃 접혀있던 7천 원과 백 원짜리, 십 원짜리를 마지막 용돈으로 받았다.
상갓집
장례식에서부터도 그렇고 할머니 집에 모여서도 술을 참 많이 마셨다. 상막할 줄로만 알았던 상갓집 분위기는 생각과는 다르게 감정이 많이 절제된 모습이었다. 모두들 가끔 술잔에 슬픈 기색을 내비치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만나서 좋다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들에게 계속 내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내가 싫어할까 봐 더 자주 전화를 하지 못하셨다던 할머니, 그 마음을 너무 늦게 생각한 건 아닐까 싶어서 죄송했고, 이젠 말 안 듣는 손자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할머니, 이젠 맘 편히 쉬세요."
다시 여행지로 떠나면서, 버스 창밖의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간 있었던 할머니와의 추억들을 곱씹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는 복잡한 감정에 속이 풀리지 않아서 줄담배만 뻑뻑 피웠지만, 며칠이 지나니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괜찮아졌다. 그렇게 슬퍼하던 나였는데, 고작 며칠 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변했다니. 분명 할머니는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소중한 사람인데 며칠 만에 괜찮아진 나 자신이 굉장히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괜히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더 슬퍼해야 하는데 더 슬퍼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나는 할머니 없는 세상에 익숙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