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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초시현 Nov 18. 2019

세월호의 발자취를 따라서

당장 내일이라도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이야기

아침 댓바람부터 타프를 강하게 흔드는 바람소리에 단잠을 설쳤다. 이 날은 전남 진도에 위치한 관매도에서 세월호 인양작업을 보기 위해서 동거차도로 가는 여객선을 타기로 한 날이었다. 이 여객선은 하루에 한 번 뜨기 때문에, 세월호 인양작업을 지켜보기 위해서라면,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꼭 타야 하는 배였다. 기나긴 하품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쭉 켜고 물티슈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기지개도 몇 번 켜고 해먹에서 빠져나왔다. 치적 치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연한 표정으로, 해안가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비에 젖어서 거뭇해진 해변가 모래 위에 서니 세탁기에 한 번 빨아주고 싶도록 꾸질꾸질한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고, 해상은 짙은 해무로 가득 차있는 게 보였다. 이에 질세라 흙이 섞여 혼탁해진 황톳빛 파도는 섬을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강풍의 힘을 받은 파도의 높이는 족히 5미터가 넘어 보였다. 완벽한 저시계(low-visibility) 상태였다. 참 을씨년스러웠다. 이런 날씨에 결항이 될 확률은 9할이 넘어갈 정도로 뻔하기에 해먹에 계속 누워있었는데, 옷이 해변가에서 맞은 비에 젖었음에도 갈아입기엔 애매하게 축축한 데다가 몸살감기로 인해 몸이 부서질 듯 아파서 뭐든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체온으로 말려볼까 하고 환복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누워있기로 했다. 그리고는 마치 시리아에서 폭격을 겨우 피해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종군기자처럼, 부르르르 하고는 온몸을 떨었다.


외딴섬에 덩그러니 놓여서 아침 댓바람부터 무료한 시간만 계속 보내다 보니 배 시간이 다가올수록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배가 오길 내심 바라게 됐다. 혹시 기상현황이 좋을 때 출발해서 풍파를 뚫고 오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시간은 점점 흘렀고, 유튜브를 시청하던 나의 시선은 자꾸만 영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알림바의 시간창으로 향했다. 결국 배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가보기라도 하자면서 장비를 모두 패니어에 잘 정돈하여 넣고는, 우두두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서둘러 선착장으로 향했다. 


머리까지 착 조여지는 우비를 입었음에도 안면부에 강타한 비는 턱을 타고 흐르며 상의를 적셨고, 비옷 안에선 후끈후끈한 습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촉촉이 스며들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온몸이 비와 땀에 쫄딱 젖어서 영락없는 생쥐꼴이었다. 다행히도 처음 왔을 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승선대기실을 발견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대기실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민망한 곳이었다. 우선 안내해주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고, 선박에 대한 어떠한 정보조차 알 수 없는 초라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심지어 유리창으로 배가 오는 방향이 보이지 않아서 내부에선 정말로 선박에 관한 어떠한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 한 가지는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몇 분 간격으로 밖에 나가서 여객선이 오는지 확인하며 비를 피하기로 했다. 대기실은 정말 춥고 조용했다. 무심코 붙잡은 의자 쇠붙이의 냉기에 신경 안쪽까지 아리도록 시렸다. 감기몸살로 정말 몸져누울 것 같았는데 차가운 걸 만지니 코에서 뜨끈뜨끈한 콧김이 나갔고, 머리가 뜨거워지더니 코피가 터질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체온이라도 유지해야겠다 싶어서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쑤셔 넣었다. 목과 얼굴도 한쪽 어깨로 기대서 빈틈을 최소화했다. 다른 건 몰라도 겨드랑이에 끼운 손이 굉장히 따뜻해서 추위에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핫팩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추위와 싸우는 와중에, 여객선은 한참이 지나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시간이 꽤 오래 흐르자 이젠 잡고 있던 지푸라기조차도 모두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미네이터 영화 주인공처럼 알몸으로 세상에 버려지면 이런 느낌일까? 헬기에서 떨어져서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에 혼자 덩그러니 놓이면 이런 느낌일까? 알래스카에서 연어 낚시하다가 곰한테 쫓겨서 야산에 조난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춥기만 하고, 얼른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결국 새 옷으로 갈아입고, 축축한 옷들은 쭉 짜서 말리고, 잠이라도 더 자면서 감기몸살이 낫도록 셀프케어해주는 게 여기서 오지 않을 여객선을 기다리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다음 건물을 나섰다. 손 날 빗겨치기로 안장 위에 있던 빗방울들을 싹 훔쳐버린 다음, 안장에 올라타서 페달질을 부지런히 하여 마을로 향했다. 



'뿌우우우----'

'이 소리는..?' 마을로 가던 중에 너무 놀라서 고개를 바닷가 쪽으로 휙 돌렸다. 순간 동공에 진도 8.0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건 분명 뱃고동 소리인데...?' 너무 놀란 나머지 안구가 적출될 듯이 땡그랗게 눈을 뜬 채로 해무 낀 해상을 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금 떠나간 배는 없었으니 이 섬에 오려는 배가 섬에 거의 다 도착했다는 의미의 뱃고동 소리였다. 인상을 찌푸려서 눈의 초점을 억지로 맞춰가면서 안개가 가득한 해상일대를 유심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정말 말도 안 되게 폭 하고 안갯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풍랑과 해무, 높은 파고의 악조건들을 모두 뚫은 저 물체는 바로 어선도, 바지선도, 예인선도, 화물선도, UFO도 아닌.. 동거차도로 가는 여객선이었다! 


"퍖샽휖퉐곫핤!!!!" 


너무 기쁜 나머지 뇌에 런타임 에러가 떴는지 알 수 없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날씨만 맑았더라면 빤스라도 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선착장으로 쏜살같이 되돌아가기만 하면 배에 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여객선은 멀리 서봐도 매우 빠른 속도로 바닷물을 밀어내며 선착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마을로 가던 핸들을 꺾어서 방향을 틀고, 오늘 이 기회를 놓치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에 크랭크와 스프라켓의 기어비를 가장 묵직하게 해 놓고 엉덩이를 들고일어나서 분노의 질주를 시작했다. 후... 하마터면 배를 못 탈 뻔했지만 미친 듯이 밟으니 간발의 차로 여객선보다 선착장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객선은 선착장에 다 달아서 선수 출입 도어를 개방하고 급정지하면서 굴뚝같은 매연을 하늘 높이 내뿜었다. 그리고 곧이어 요란하게 철 긁는 소리를 내며 접안하는 철판떼기로 도킹을 시도했고, 그 와중에 어마어마한 강풍 때문에 배 전체가 오뚝이처럼 좌우로 크게 흔들리느라 접안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가 선착장에 닿자마자, 숨 고를 틈도 없이 1층 주차 데크에서 헐레벌떡 뛰어온 비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빨리 타요!"


그들의 표정은 모두 일그러져 있었고, 우중충한 구름은 여객선 굴뚝의 매연으로 인해 더 시커메졌다. 하늘에선 천둥소리까지 울려 퍼졌다. 사실 탑승객이라고 해봐야 고작 한 여자와 나뿐이라 서둘러서 탈 것도 없었지만, 갑자기 소리를 지르셔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생각을 해보니 이건 그들의 서비스 정신과는 무관하게 분초가 다르게 변하는 최악의 기상현황 때문에 사람이 급박해진 것이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순발력을 발휘하여 자전거를 쭉 밀고 갑판에 올라갔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다가 밧줄로 자신을 꽁꽁 묶었듯, 갑판 기둥에다가 나의 분신인 자전거를 흔들리지 않게 꽁꽁 묶어두고는 배값을 지불하기 위해 직원분께 다가갔다. 통상적으로 남/서해의 섬을 오가는 여객선들은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여 탑승하거나, 표값을 탑승과 동시에 지불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선실로 카드기를 들고 가겠다는 직원들의 안내를 받고 나중에 결제하는 게 관행인데, 값을 지불하기 위해 동거차도로 간다고 말씀을 드리니 "아니 나중에 나중에!" 하시면서 두 분 다 어디론가 뛰쳐나가버리셨다. 뭐가 저리도 급하시나 싶었는데 이따 선실로 오시겠지 싶어서 일단 선실로 들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비에 젖은 철판이 어찌나 미끄럽던지, 혹여나 미끄러져 넘어질까 봐 종종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선실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마자 따스한 바람이 히터를 풀파워로 틀어놓은 듯 뿜어져 나왔다. 내부엔 등산복을 몇 겹씩이나 껴입은 할머니들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누워있었다. 귓불에 자란 솜털까지 모두 뽀송뽀송 말려버리는 따스함에, 자연스레 눈이 스르르 감겼다. 돌 틈에 끼어서 잠을 자는 돌문어처럼, 할머니들 틈에 끼어서 얌전히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 배에서의 시간은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내일이랑 모레는 풍랑주의보라 배 안 뜨니까, 알고 가쇼."

"예 감사합니다!(하..........)"


연거푸 내뱉은 희뿌연 한숨은 이내 비에 구멍이 송송 뚫려 찢어져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무인도에서 세 턴 쉬어야 탈출할 수 있는 부루마블도 아니고, 이곳에 무조건 이틀간 표류해야 육지로 갈 수 있다니. 벌써부터 육지에서 먹은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육지가 그리워서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배는 모습을 감춘 뒤였고, 휑한 바다엔 비가 마치 우유 광고에 나오는 왕관 모양의 흔적을 만들며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후두두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마을에 진입하니 주택 서른 채 정도가 게딱지처럼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대부분 폐가이거나, 노인분들이 여름에만 임시로 거주하면서 미역을 따서 말려서 판매하고는 육지로 떠난 뒤엔 사용하지 않는 집들이었다. 마을 중간엔 보건소가 있었다. 이런 오지엔 관공서 하나만 있어도 마을의 정보를 모두 관장하는 정보통의 구실을 톡톡히 하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보건소의 문을 두들겨보기로 했다. 


"아악!! 어머 어머!!" 


천둥번개가 치는 날씨에 비에 쫄딱 젖은 외간 남자가 미친놈처럼 낄낄 웃으며 인사를 해서인지 검은색 터틀넥을 입으신 40대 중단발의 여성분이 깜짝 놀라셔서 소리를 지르셨다. 순간 내 뒤에 누가 있나? 살인마가 서있나? 싶어서 놀라서 뒤를 쳐다봤는데 아무도 없었다. 근데 그 여성분은 내가 뒤를 살피다가 다시 여성분을 쳐다보자 더 깜짝 놀라셔서는 뒷걸음질로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는데, 보건소에 사람 들어온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이쯤 되니 나 또한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설마 나도 모르게 내가 큰 범죄를 저질렀나? 아니면 전생에 저분과 나는 경찰과 도둑으로 만난 사이인가?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우선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어필해야겠단 생각에 손을 앞으로 쭉 뻗어서 거리감을 형성했다. 다가가지 않겠다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뭐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를 시작으로 물꼬를 틀어서, 난 절대 살인마나 강도 등의 범죄자가 아님을 호소했다. 제자리에서 바디랭귀지까지 쓰며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자 겨우 안심하신 그분은 알고 보니.. 그 보건소의 소장님이셨다;; 소장님께선 잠시 후 미안하단 눈빛으로 믹스커피 한 잔을 찐하게 타 주셨는데, 달콤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섬에 대한 잡다한 정보들과 세월호 인양작업을 볼 수 있는 감시 캠프에 가는 방법, 그리고 폐교된 학교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는지(누구의 허락을 받으면 되는지) 여부 등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온몸이 몸살 기운에 으슬으슬거렸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다. 많은 정보를 알려주신 소장님께 감사하단 말씀과 함께 인사를 드렸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보겠습니다~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날 쳐다보는 소장님의 표정이 갑자기 천사처럼 밝아지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다시 한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짜 날 범죄자처럼 생각하시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뭐 꾸리꾸리 한 날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자신의 건물로 들이닥치면 혼자 있는 여성분 입장에선 놀라셨을 수도 있겠거니.. 하면서 허탈한 마음으로 이해하자, 이해하자, 되뇌면서 나왔다. 능선 진입로엔 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통나무 펜션이 있었다. 이 통나무집주인분이 대기업 회장이신 '홍 회장'이라는 분이신데, 동거차도 마을의 소유였던 병풍도를 5억에 사셨고 감시 캠프에 필요한 전기를 본인의 집에서 끌어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들었다. 통나무집 오른쪽 골목을 통해서 뒤로 가보니 정말 전기선이 능선을 따라 쭉 깔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능선으로 향하는 길

능선으로 향하는 길엔 감시 캠프로 안내표지판은 없었지만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같은 노란 팻말이나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몇 미터 간격을 두고 계속해서 깔려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는지 오솔길이 비교적 뚜렷하게 보였다. 갈대밭의 질척 질척한 진흙길을 뚫고, 가로등 하나 없는 대나무밭을 지나고, 오솔길을 지나고,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서 동육마을 뒤 능선에 위치한 감시 캠프에 도착했다. 다만 아쉽게도 이 날은 해상에 해무가 자욱하게 껴서 인양작업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로 감시 캠프의 텐트들만 둘러보고 내려와야 했다. 내려가는 길에 전선이 아닌 플라스틱 파이프관을 밟고 넘어지면서 옆구리가 바닥에 닿으면서 넘어졌는데 하필이면 진흙탕, 하필이면 돌부리 위로 떨어져서 효도르에게 바디샷을 맞은 듯 고통스러워했다. 누가 날 밀친 것도 아니고 사람도 없었는데 "아 제발 좀!!" 하면서 진흙을 툴툴 털어내고 심리적으로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마을로 내려왔다. 폐교에서 잘 수만 있다면 비도 피하고 아픈 몸을 추스를 수 있을 것 같아서 보건소장님의 말씀대로 이장님 댁에 찾아가서 폐교에서 자고 싶은데 가능한지를 여쭤봤다. 알고 보니 이장님은 동거차 교회 사모님으로, 여성분이셨는데, 폐교에서 자는 건 안 되나, 자신이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으니 거기에서 자고 가라고 하셨다. 하루에 얼마냐고 여쭤보니 4만 원이라고 하셨다. 나그네 처지로 1박에 4만 원이라.. 순간적으로 '2박 3일을 묵으면 이거 지출이 심하겠는데..' 하면서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신 듯이 "조카 같아서 자고 가라고 한 것이고 숙박비 받을 생각이 없으니 그냥 편하게 묵었다 가라"며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몸이 정말 아팠는데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날 저녁 함께 했던 식사자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마트표 훈제 오리고기와 함께 직접 동거차도 바다에서 따신 돌김을 구워주셨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돌김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환상적인 맛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목사님의 안내를 받아서 민박집으로 갔다. 민박집 방 안의 공기는 냉동트럭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차가웠다. 한 걸음 걷는데도 몸의 열기를 모두 빼앗기는,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었다. 다행히도 전기장판은 있어서 온도를 강하게 틀어놓고 얼른 드러누웠다. 장판이 점점 따뜻해졌고, 세상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착용한 것처럼 고요했다. 누워서 보니 한쪽 벽면엔 길쭉한 창문에 사각형으로 잘린 하늘의 별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는 전등이 하나 있었는데,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필라멘트가 힘겹게 달아올라 마지막으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조용한 민박집 방 안에서 따뜻한 장판에 몸을 뉘인 채로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아 Tlqkf 불을 안 껐네"


다음 날

다음 날 새벽, 동거차 교회에서 열리는 새벽예배에 초대해주셔서 목사님 내외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감사와 은혜를 주제로 설교를 하셨다. 옆집 진돗개가 얼마 전 목사님 댁 오골계를 2마리나 잡아먹었지만 아직 몇 마리 남아서 다시 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몇 마리의 오골계를 남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이야기였는데, 아직 많이 미련이 남으셨는지 아니면 서러우신 건지 '그래도 괜찮다'는 말씀만 세 번 이상 반복하시면서 눈물 없이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애절한 설교를 하셨다. 그렇다. 많이 서러우셨던 것 같다.강단을 내려오신 후엔 함께 아침식사를 나누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엔 세월호 인양작업을 보기 위해 능선에 한 번 더 올라가려고 했는데, 목사님이 대뜸 절구통을 만들러 가자고 하셔서 따라가게 됐다. 밥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아침부터 찬바람을 맞으며 함께 산으로 향했다. 목에 칼이 들어오듯 찬바람이 다가오는데 순간 둘 다 움찔한 채로 어깨를 높이 들어서 가오나시처럼 변신하여 걸어갔다. 산 중턱에서 톱으로 나무를 베고 절구통을 자른 후엔 목사님 집으로 복귀했는데,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인양작업을 보러 가야 하는데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재방문

오후 3시쯤, 질척한 진흙물을 신발 옆으로 튀기며 쏜살같이 능선으로 향하여 갈대밭을 지나고, 대나무 길을 지나고 진흙길을 지나서 능선으로 뛰어올라갔다. 능선에서 해상을 바라보니 다행히 해무가 싹 걷힌 상태로, 동거차로부터 1.6km 떨어진 잭킹 바지선에서 세월호 인양작업을 진행 중인 모습을 나안시력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능선에 앉아서 멍하니 인양작업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그때까지 세월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고, 그냥 슬프다고 안 하면 분위기상 쳐맞을 것 같아서 영혼 없이 아 정말 슬프다 라고만 하고 말았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저기에 시신이 아직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 슬픔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세월호가 운항한 항로는 맹골수도(孟骨水道)'라는 항로로서, 조류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센 항로인데 그 항로로 오던 도중 병풍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기 시작하여 70분간이나 북쪽으로 표류하면서 가라앉다가 병풍도보다 북쪽에 있는 동거차도 앞바다에 와서 완전히 가라앉은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유가족들은 인양작업이 제일 잘 보이는 이곳 동거차도에서 직접 인양 과정을 감시하고 기록하기 위해 시민들과 함께 동거차도 능선에 돔형 텐트 2동과 일반텐트 1동으로 이루어진 초소를 설치했다고 한다. 신형 돔텐트엔 유가족들이 인양작업을 감시하고 녹화하기 위해 돔형 텐트 벽면을 렌즈 구경에 맞게 오려서 설치해놓고 설치한 카메라가 있었는데, 카메라는 렌즈만 밖으로 빼꼼히 내민 채로 중국 상하이 샐비지 사의 인양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으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텐트 내부에 들어가 볼 생각은 없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져서 텐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안에 계시던 유가족 한OO양의 아버님께서 입장을 허락해주셔서 운 좋게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돔형 철제 프레임에 타포린 소재의 방수 천으로 되어있는 텐트의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내부엔 카메라 가방과 담요, 현수막, 전기매트 등의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홍 회장이라는 분의 집으로부터 올라온 전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보다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곳 생활은 어떠신지 궁금하기도 해서 아까 능선에서 텐트를 보며 생긴 궁금한 것들을 하나씩 여쭤봤다. 생활은 어떠신지,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는지, 카메라는 24시간 작동하는 건지, 안산에서 여기까지 오시면 힘들진 않으신지. 궁금한 것들을 여쭤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월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친해져서 페이스북 친구도 맺게 됐고, 다음날 여객선을 타고 동거차도를 빠져나갈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님께서 내일 진도까지 가는 배가 결항일 수 있으니 자신이 타고 가는 쾌속선으로 섬을 함께 빠져나가자고 하셨다. 날씨가 안 좋아서 여객선이 뜨지 않더라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전세를 내서 빌린 유가족 전용 배가 일주일에 한 번씩 교대하는 날짜(금요일)에 오기 때문에 같이 나가자는 말씀이셨다. 그 말을 듣고 섬을 무조건 빠져나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기뻤다. 그 날 저녁 목사님 사모님껜 유가족 분과 내일 함께 떠난다고 몸 건강히 잘 지내시라고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씀을 전달하고 또다시 민박집에 가서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누웠다. 그리고 전 날처럼 네모나게 오려진 밤하늘과, 천장에서 타들어가는 필라멘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 tlqkf 불을 또 안 끄고 누웠네."



다음 날 아침

다음 날 아침 아버님께서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을 주셨다. 쾌속선이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을에 있는 어느 집으로 찾아오라는 말씀이셨다. 동거차도 마을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씀하신 집을 힘겹게 찾아서 아버님을 만났다. 그 집은 강아지 두어 마리쯤을 기르던 집이었는데, 어제 아버님께서 주무신 곳인 듯했다. 그 집에서 아버님과 함께 모닝커피 한 잔으로 아침 끼니를 때우고, 시간이 다 되어서 항구로 나갔다. 파도가 철썩이는 항구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야 하는 쾌속선에선 2명의 유가족 어머님들이 교대를 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섬으로 내려오셨다. 어머님 두 분은 아버님 다음 순번으로 교대를 해서 캠프에 올라가는 당번이시라고 하셨다. 그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싸들고 오신 생필품들을 차로 옮기려고 하시기에 머슴처럼 묵묵히 차로 짐을 실어드리는 걸 도와드렸다. 어머님들이 이곳에 온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하시길래 기쁘게 몇 장 찍어드린 후, 자전거를 배에 싣고 쾌속선에 탑승했다. 선장님은 지금 파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황급히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서둘러 출발 준비를 하셨다. 출발 직전엔 마치 오늘 배가 침몰하기라고 할 듯이 바다의 상태에 대해 한 말씀을 하셨다. 며칠 전에 병풍도 앞에서 배가 불타는 사고가 있었고, 이곳은 해풍이 매우 심하기 때문에 전문 다이버들이 들어가서 수색을 하려고 해도 죽는 경우가 계속 생기고 있고, 운 좋게 깊이 들어간다고 해도 남해안의 물은 사실상 똥물인 곳이 많아서 수색이 매우 힘들다고. 그리고 여긴 원래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오면 안 되는 뱃길인데 오늘은 정말 억지로 몰래 들어온 거라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진도

굉음을 내며 출발한 쾌속선은 정말 미친듯한 속도로 파도를 뚫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파도는 배를 집어삼킬 정도로 높게 일렁였는데, 쾌속선은 종이배처럼 약하게만 느껴졌. 배는 파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집히기 일보직전으로 오뚝이처럼 이쪽으로 휘청, 저쪽으로 휘청거렸다. 배가 한 번 휘청일 때마다 배의 한쪽 면은 파도에 반쯤 잠기면서 거의 잠수함처럼 바닷물에 입수다. 그러는 순간에도 선장님은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잭 스페로우라도 되시는 듯이 죽음의 방향키를 잡고 지옥의 항해를 이어나가셨다. 나와 아버님은 조타실 뒤편에 있는 선실에서 대기했는데, 혹시나 배가 좌초되면 선실에서 헤엄쳐서 빠져나오기 위해 선실 입구를 개방해두었고, 입구 문 코앞에서 숨을 조리며 각자 기둥이나 선반을 잡고, 디스코팡팡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중심을 잡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중간에 정말 배가 좌초되어 바다에 삼켜질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즈음 진도 VTS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버님께선 헤어지기 전 팽목항 분향소 옆에 있는 유가족 전용 사무동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헤어지자고 하셨다. 아마 말동무를 이대로 딱 잘라 보내기가 아쉬우셔서 그러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좋은 생각이라고, 뒤따라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자전거로 아버님 차량을 열심히 따라갔다. 사무동엔 미수습자인 고 허ㅇㅇ 양 어머님이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다행히도 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셔서 유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컨테이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님께선 잘 왔다며 돼지감자 차를 끓여주셨는데, 거기서 대략 한 시간 가량 함께 차를 마시면서 마음에 맺힌 한풀이를 들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드릴 수 있었다.



분향소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팽목항엔 분향소가 있었다. 반기문, 표창원 등 수많은 정치인들이 다녀간 곳이었다. 작은 컨테이너를 개조하여 만든 가건물인데 굉장히 규모가 작았다. 분향소 내부엔 세월호 참사로 인해 사망한 304명의 고인들의 영정이 걸려있었고, 한쪽 벽면에 설치된 티비엔 아직 미 수습된 사람들의 영정사진이 슬라이드 쇼로 한 장씩 지나갔다. 영정들 앞에 있는 테이블엔 향로와 영정, 꽃, 리본, 그리고 과자가 놓여있었는데, 고인의 친구가 놓고 간 술병이나, 각종 추모작품과 세월호 관련 책들도 있었고, 그 주변은 어마어마한 양의 리본들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영정들을 하나씩 유심히 살펴보다가 보니 304명 모두가 학생들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교사, 일반인, 심지어 외국인도 있었다. 그중 '슬라바'라는 외국학생의 영정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슬라바는 아빠가 한국분이시고 엄마가 러시아분으로, 이중국적자이다. 열 살 때 한국으로 넘어왔고, 단일 국적 소유를 위해 귀화 신청을 했는데 9월이면 주민등록증이 나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4월 16일, 수학여행차 세월호에 탑승했는데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이중국적을 가진 채로 사고 닷새 만인 21일에 77번째 사망자로 시신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데 민증을 받기도 전에 사망하다니. 이 외에도 슬라바의 이야기처럼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도를 떠나며

분향소 밖으로 나와서 등대 쪽까지 쭉 걸으며 바닷바람을 맞았다. 팽목 방파제를 따라 등대 쪽으로 걷다 보니 철제 펜스 밑에 고인들의 축구화가 놓여 있었고, 셀 수 없이 걸려있던 리본들과 전국 각지에서 제작된 추모작품들이 보였다. 바람에 날리는 노란 리본들을 보니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에 표정이 굳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모두 장례식에 온 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다. 세상의 바닷물이 모두 잉크로 변하고, 세상의 갈대가 모두 붓으로 변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글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아픔을 모두 기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배를 집어삼킬 듯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선박이 기울기 시작하고, 방송으로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말을 듣고 혼란에 빠지고, 갇혀있던 객실에 물이 차올라 숨통을 점점 조여 오고, 눈물을 훔치며 가족들에게 사랑하고 미안하다며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패닉에 빠져서 손톱으로 철제 벽에 스크레치가 날 때까지 피가 나도록 긁다가 바닷물을 마시고, 더 이상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가 없단 걸 깨닫고 옆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의식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나 맨 처음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고등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탑승객들의 일부가 구조되고 나머지를 수색해봐야 한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도, 침묵했다. 

나는 구조대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탑승객들의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침묵했다. 

나는 정부기관의 책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이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할 때도, 침묵했다. 

나는 유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제 2의 세월호에 내가 탄다면, 그땐 날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

염치가 없지만 혹시라도 하늘에서 날 지켜보고 있다면, 그 순간에 함께하지 못한 나를,  

이제라도 그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는 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길 바란다.


진도를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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