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여행을 도피처로 생각하곤 한다
일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 번에 없애줄 진통제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즐길 거리를 찾기에 바쁜 것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은 짧고 일상은 길다
긴 일상 동안 짧은 여행을 기대하거나 추억하며 보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이 여행을 모험이 되게 하고 싶었다
가능하면 새로운 선택을 하고 고되더라도 도전이 되는 길을 가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통제와 자극제.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어쨌든 우리는 합리화할 방법을 찾아낸다
내가 선택한 것은 자극제였을 뿐이다
팔말야에 도착한 뒤 적당한 숙소를 찾아 짐을 풀었다
숙소는 4인실이었는데 내 앞에 두 사람이 먼저 묵고 있었다
그들은 체코에서 온 숙녀들이었는데 자신들도 조금 전에 왔다고 했다
며칠간 씻지 못했던 터라 나에겐 샤워가 간절했다
남자 샤워실을 찾아 한참이나 씻은 후 들어와 보니 그들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적에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겠느냐는 말에 그러자고 했다
카운터에 있는 안내책자를 보니 유적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숙소에서 10여 분 정도를 걸어 도착할 수 있었는데..
( 여기가 아니네.. )
.. 여기가 아니었다
어딜 봐도 협곡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넓은 광야 가운데 오래된 도시가 있었다
체코 숙녀들에게 여기가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장소 맞냐고 물어봤지만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림을 보여주며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 영화를 보지 않은 모양이다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낭패였다
어쨌든 팔말야가 인상 깊은 곳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몇천 년 전의 유적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 규모로 보아 과거에 얼마나 장엄하고 화려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들과 함께 유적을 둘러보고 내친김에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근처의 산 위에도 가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둘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은 고양이와 매운 음식을 좋아했고
그보다 젊은 사람은 불교신자에 채식주의자였다는 것 정도만 기억난다
같이 식사를 하는 중에 둘 중 젊은 사람이 옆의 친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 사실 그녀는 예전 남자 친구의 어머니예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이가 좋답니다 ]
두 명의 숙녀는 언젠가 함께 중동지역을 여행하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 년 전부터 준비했고 마침내 같이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이 약속을 지켜 이곳에 같이 왔다는 게 보기 좋았다
비록 관계가 바뀌긴 했지만 약속은 바뀌지 않았고
오랜 준비 끝에 그 약속은 지켜졌던 것이다
지켜지는 작은 약속들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헛되이 남발되는 거창한 약속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관계가 변할 때마다 그 사이의 약속도 함께 변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약속은 관계들보다 그 무게가 훨씬 무거운 어떤 것이다
한 사람의 말의 무게는 그가 살아온 인생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의 약속이 지켜졌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오늘날같이 약속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이후로도 내가 찾던 곳을 숙소 주인 등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인디아나 존스를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 어떻게 그 영화를 본 사람이 없는 거지 )
다른 것 보다 그 사실이 더 당황스러웠다
어떤 이유가 있어 이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딱히 목적지가 없어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 했다
아무래도 다시 터키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두 숙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다마스쿠스로 가기위한 버스정류장을 찾았는데..
[ 오늘은 표가 없습니다 ]
( 아놔 ! 이러긴가 ! )
정말 이러긴가 시리아여
아침인 데다 사람이 많은 지역도 아니었는데 버스표가 없다니
지금 예매를 하고도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 판이었다
그때 다른 한 직원이
[ 같은 가격으로 운행하는 사설 버스들이 있으니 정류장에 가 보세요 ]
라고 알려주었다
큰 길가에 있는 정류장에는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큰 버스가 있었고
직원의 말대로 그 뒤에 작은 밴이 한 대 더 주차되어 있었다
밴 근처에서 운전자로 보이는 남자에게 물어보니 다마스쿠스에 가는 차란다
잠시 후 출발한다는 말에 냉큼 올라탔다
밴 안에는 두 명의 백인 남자와 현지인 아주머니 한 명
그리고 그의 자녀로 보이는 네댓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영국 억양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꼬마들과 한참 친해진 모양이었다
잠시 후 남자 중 하나가 우쿨렐레를 꺼내서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신나는 포크송이었는데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하자 아주머니마저 신이 난 듯 장단을 맞춰주며 차 안은 이내 작은 공연장이 되었다
음악에는 묘한 함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영어가 들리면 불편한 기색을 하며 눈치를 주곤 한다
하지만 그 언어로 노래를 하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았다
그렇게 몇 곡을 이어 부르고 나자 차 안은 한층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노래가 끝나고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 멋진 노래네~ 제목이 뭐야? ]
어차피 기억도 못 할 걸 왜 물어봤을까..;
그냥 대화를 트기에 적당한 말 같았다
그는 우쿨렐레가 영국에서 대중적인 악기이고 연주를 배우기 위한 모임 등도 많이 있다고 했다
자기는 몇 년 전에 연주를 시작했는데 여행을 다니며 연주할 수 있어서 참 좋다고 했다
내 생각에도 여행을 다니며 연주하기에 그보다 좋은 악기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리코더나 하모니카 등도 있겠으나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까지 부르면 좀 추해 보일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들은 어쩌면 내가 찾는 곳이 어딘지 알지도 모른다
지도 뒤에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물어보았다
[ 뭐 좀 물어보세,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니? ]
[ 페트라네, 거길 가려면 요르단에 갔어야지 ]
1초 만에 대답이 나와 조금 당황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 앗, 이 나라에 있는 게 아닌 거야? ]
이 나라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름도 팔말야가 아니라 페트라였다
게다가 요르단이라니 거긴 또 어디 붙어있는 덴가
( 하아.. )
이제 페트라고 뭐고 귀찮아졌다
그냥 터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근데 이놈의 차는 왜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무렵 운전자가 나타나 나와 영국인들에게 이야기한다
[ 다마스쿠스에 가는 분들 맞죠? 요금은 1,500 파운드입니다 ]
이 양반은 첫 판부터 장난질인가
버스요금은 200 파운드인데 무려 7.5배나 높게 부르고 있었다
[ 잘 못 말씀하셨군요. 요금은 200 파운드인데요 ]
[ 아니요. 1,500 파운드입니다 ]
[ 저희도 요금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어요. 200 파운드죠 ]
잠시 후 운전사가 얘기한다
[ 그건 앞에 있는 큰 버스가 그렇고 이 차는 1,500 파운드요 ]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 그럼 뒤에 앉은 이들에게도 그렇게 받을 생각인가요? ]
[ 그렇소 ]
[ 만약 그렇다면 얼마가 됐든 그들과 같은 금액을 내겠습니다 ]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그들에게 돈 세는 시늉을 하며 티켓이 얼마인지 물어보자
아주머니가 우리와 운전사를 번갈아 보며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보여준다
우리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운전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더니 이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 당신들이 이 차를 타려면 1,500파운드를 내시오. 아니면 내리시던가 ]
점점 이 나라에 지치기 시작했다
두 영국인과 내가 눈빛을 주고받았을 때 결론은 이미 난 상태였다
[ 알겠어요. 지붕에서 짐을 내리겠습니다 ]
운전사는 그제야 당황하며 말리려고 했지만 더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운전사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밴에서 짐을 내린 뒤 영국인들과 나는 택시를 잡기로 했다
근처에 있던 택시와 가격을 흥정하고 짐을 옮겨실었다
밴 쪽을 보니 우리와 같이 타고 있었던 아주머니와 아이들도 내려서 택시에 옮겨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밴에서 내릴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운전사가 아주머니에게도 높은 금액을 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면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준 사람에게 못되게 군 그가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짐을 트렁크와 뒷좌석 위에 구겨 넣고 있는 동안
아이들이 택시를 타고 지나가면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함께 손을 흔드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 당신들과 우리는 한 팀이니까! )
라는 표정을 본 건 아마 기분 탓이겠지
두 영국인과 나는 그렇게 오후가 돼서야 빈 밴을 뒤에 남겨두고
다마스쿠스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