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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by Sunyu

낮은 실내온도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추위에 지쳐 잠들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침이 되어 다시 정신이 들었지만
차게 굳은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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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가 건네준 차를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 나가보니
주위가 온통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개로 둘러싸인 숲은 신비롭고 평온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은 겨울이 우기여서
어떤 날은 오후까지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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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돌아와 먹다 남은 비스킷등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끝내고
뒤에 남은 사람들의 인사(buen camino~)를 받으며
어제저녁 늦게 합류한 독일 커플과 함께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 일행은 길을 떠나며 자연스럽게 각자 걷기 시작해 다음 마을의 작은 공터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낡은 벤이 한 대 와서는 멈추어섰다
곧 다른 순례자와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 차에서 빵을 사기 시작했다
갓 구운 빵을 파는 낡은벤은 아침마다 이렇게 빵집이 없는 작은 마을들을 도는 것 같았다
어제 하루 순례길의 와일드함을 겪었던 터라 식량을 준비해둘 필요를 느꼈기에
큰 빵 한 개를 사 알맞은 크기로 나누어 가방에 넣어두었다

순례자들과 헤어지고 다시 한참을 걷고 있으려니 서서히 발목과 다리에 통증이 왔다
아직 오후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 빨리 지치고 있었다
걸으며 생각을 해보니 내 저질체력 신발이 문제인 것 같았다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은 예외 없이 등산화를 신고 있었는데
반면 내 낡은 스니커즈는 이런 길을 걷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오전 내내 돌길을 걷다 보니 발목을 수차례 삐끗했던 것이다
겨우 둘째날인데.. 좋지 않은 징조였다

두 시간쯤을 더 걸어 다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을 즈음
다행히 집 몇 채가 모여 있는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벤치에 앉아 신발을 벗고 아픈 발목을 주무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왜소한 할아버지 한 분이 지나가다 말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 이 상황은 뭐냐.. 뭐라 해야되나..
일단

[ 올라 - ]

할아버지는 어색하게 인사하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 손에 넌지시 쥐여주었다
어리둥절 바라본 내 손에는

(농담 아니구)
탁구공보다 조금 큰 풋사과 두 개가 있었다

. . . .

.. 조금 불쌍해 보인건 인정하겠다만..
그래도 지나가던 사람이 먹을걸 건내줄 만큼 처절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 그라시아스.. ]

무슨 말을 더 하리
할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엔 까미노를 읊조리며 멀어져갔다
손에 든 사과가 어찌나 작던지
자켓주머니에 넣으니 두 개가 들어가고도 공간이 조금 남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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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시간쯤 더 걸었을까
언덕으로 이어진 길은 점점 가팔라져 좁고 울퉁불퉁한 돌밭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목의 통증이 더 심해지더니 갈증과 허기마저 느껴졌다
마른 풀밭에 몸을 누이고 지친 몸으로 숨을 고르다가
아까 할아버지가 준 사과가 생각났다
아무 생각 없이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는데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있었다
감동적인 맛에 두 개를 다 먹고 싶었지만
왠지 하나는 아껴두고 싶어 남겨놓았다

그렇게 언덕길에서 반 시간쯤을 더 걸었을 때
경사진 곳에 앉아 쉬고 있는 익숙한 빨간 점퍼를 발견했다

[ 마리아야 안녕- 거기서 뭐해? ]
[ 응.. 힘들어서 쉬고 있어 ]

이 언덕은 나한테만 힘든게 아니었나 보다

[ 힘내, 또 봐 - ]

짧게 인사한 뒤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 .. 자, 이거 받어 ]

지친 그녀에게 한 개 남은 사과를 건네주었다

[ 와아.. 이거 뭐야? 사과가 골프공만하네 ]

( 내 말이 )

[ 고마워, 나 줘도 돼? ]

솔직히 고민은 좀 했다만

[ .. 그냥 .. 받어 ]

너도 나만큼 불쌍해 보인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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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헤어지고 나니 잠시 후
아스팔트 도로와 연결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포장된 길로 내려오자 걸음이 한결 편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진 아스팔트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굽어진 길을 돌아 멀리 작은 산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아하니 아마도 저곳이 오늘의 목적지인 듯 했다

다시 한 시간여를 걸어
파란 점퍼를 입고 길에 쓰러져 자고있는 어떤 남자를 지나
마을 어귀임을 알려주는 문을 통과하니
그렇게 멀어 보이던 산이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그렇게 걸어 해가 뉘엇이 저물어 갈 즈음

둘째 날의 목적지인 Castrojeriz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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