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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치스

by Sunyu


호수 반대편에 있는 에르치스에 하루를 묵은 뒤

이어 도착한 아딜체바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맑고 차가운 하늘색의 호수를 따라 포장된 산책로가 한참이나 이어져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작은 시골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사람들도 한결 여유로워 보였고 낯선 여행객에게도 친절했다

이곳에는 길거리 어느 곳이든 차이를 파는 찻집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말만 한마디 건네어도 찻집에 데려가 차를 대접하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어디를 데려갈 때 남자들끼리 팔짱을 끼는 것인데

앙카라에서부터 수차례 당했기에 대충 적응이 되었지만

그게 친근함의 표현이란 걸 몰랐을 때는 적잖이 당황했었다



호수를 따라 한참이나 산책을 하고 시내로 돌아와

어느 집의 그늘진 담벼락에 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장 너머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담장 집의 주인이 나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짐작건대 [ 당신 지금 여기서 뭐 하쇼? ] 정도의 얘기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 담장 밖까지 당신 집은 아니잖소 ) 라는 당당함과

( 이 빵만 다 먹고 가면 안 될까요? ) 라는 불쌍함의 중간쯤 되는 표정으로

음식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좀 봐달라는 몸짓을 했다


그러자 그는 급기야 문밖으로 나와 나에게 다가왔다

( 하아.. 어쩔 수 없군 )

음식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나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그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나를 자기 집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집 마당 안까지 데려온 나를 앉히고는 자기 가족들을 시켜

냅다 밥과 토마토소스, 견과류, 과일 등을 차려주었다



그동안 얼마나 은혜를 모르고 살았던가..

그는 안으로 들어와 먹으라고 얘기했던 것이다

예기치 않은 대접이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그냥 기꺼이 즐기며 고맙다는 표현을 해주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그들의 호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에르달이라고 밝힌 그의 집에서 대접을 받는 동안

깨끗이 차려입은 양복 위로 터키 국기 모양의 베지를 단 신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그의 부인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왔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을 학교 선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조금만 가면 자신의 학교가 있는데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 괜찮을까? )

그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2주 전 4명 납치) 같은 말들이

신문 머리기사처럼 맴돌며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달의 가족이 경계심을 한층 누그려 뜨렸던 터라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따라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양복 입은 남자를 따라 회색 밴에 타니 곧 에르달이 덩달아 따라 타며

함께 가자는 듯한 몸짓을 한다


양복 입은 남자는 마을을 조금 돌며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밴은 점점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음? 잠깐만.. )

이건 예상과 좀 다른데

더 사람이 많은 주거지로 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밴은 마을을 벗어나 점점 외곽지역으로 가고 있었다


가방을 안고 있던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더듬거리며 여권 사본이 잘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이건 뭔가 수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는 이미 나의 귀에

영화에 나오던 테러리스트들의 말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밴은 이제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 황량한 들판으로 들어섰고

내 머릿속에는 이제 ( 한국인 한 명 납치 ) 같은 머리기사가 맴돌고 있었다


하아.. 제길 방심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뭐 짧지만 괜찮은 인생이었..


등 혼자 별 생각을 다 하며 온갖 지랄을 하고 있을 즈음..

뜬금없이 정말 작은 학교가 하나 나타났다



아딜체바즈에서 10여 분 정도 달려 도착한 그곳은

아마 물도 길어다 마셔야 할 것 같은, 작고 낙후된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학교는 깨끗했고 다른 집들에 비해 현대식이었다

나를 데려간 사람은 그 학교의 교장이었다

그의 소개로 다른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안내를 받아 학교 안을 둘러보았다


학교는 2층으로 된 작은 건물이었는데 2,3개 교실만 사용하고 있었다

수업 중인 한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과 인사하고

옆 선생의 통역으로 내 소개를 했다


교장선생은 아이들에게 동양인 여행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다른 교실에서 하던 수업도 잠시 중단이 되어 아이들이 몰려왔는데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후 모두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은 매우 즐거웠다

이상한 무술 동작을 하는 아이들에게 장단을 맞춰주기도 하고

축구와 배구를 합쳐놓은 듯한 공놀이도 하며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몰랐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아이들의 말이 터키어가 아닌 것 같았다

공놀이가 끝나고 난 뒤 나중에 한 선생님에게


[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이 무슨 언어인가요? ]

라고 물어보니 그녀는 쿠디쉬(쿠르드족 언어)라고 답해주었다


이 아이들은 쿠르드족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막연히 어딘가 있다고만 알았던 쿠르드족의 존재가

느닷없이 눈앞의 사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반 호수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쿠르드족이란 것이었다

나는 내내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가 없는 쿠르드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종족이다

EU에서는 아직도 터키의 쿠르드족에 대한 차별을 문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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