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국 엄마가 영국에서 집밥 차려주는 방법
결혼 후 지금껏 늘 요리는 내 담당이었지만 맞벌이 부부가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일이 많지는 않았었다. 적어도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는.
2년 전 처음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1년의 반 이상 재택근무를 했고 아이 어린이집도 문을 닫았다. '돌밥돌밥' 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때였다. 그때 나는 끼니때가 돌아올 때마다 먹을 만한 식사를 차려내야 하는 주부의 고단함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았다.
주말에 한두 번 요리하는 일은 재미로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매일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달랐다. 어설펐지만 품위 있었던 아마추어리즘의 세상에서 처음으로 냉혹하고 험난한 프로페셔널리티의 세계를 살짝 엿본 것 같았달까.
뭐, 전 세계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자든 여자든) 주부가 하는 요리라는 것이 엄청난 전문성을 요하는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닥치면 어떻게든 하는 것이 요리인 것이다. 하지만 요리는 여타 다른 대부분의 과제와는 좀 다르다. 대부분 꽤 난이도 있는 멀티태스킹 능력을 요구하고, 과제 간 구조화 및 개별 과제들의 적절한 타임슬롯 배치/운영이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에 실패하거나 시간계획을 제대로 못 짜면 밥, 찌개나 국, 메인 요리, 기타 반찬들이 식사시간에 딱 맞게 준비되지 못하고 뭔가가 타거나, 식거나, 너무 익어 푹 퍼지거나, 제때 조리가 끝나지 못한다. 간단히 된장찌개만 하나 끓인다고 해도 작은 과제들이 수없이 순서에 맞게 이어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치매 같은 질병으로 뇌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요리’를 못 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요리라는 것은 재료 준비가 오 할 이상으로, 한 가정의 주방 담당자에게는 적절한 재고관리 능력이 필수적이다. 그게 안 되면 냉장고에서 한 번 쓰고 남은 채소들이 썩어가고, 유통기한 지난 수많은 소스류가 굴러다니며, 장보기 비용이 급격히 높아진다. 효율적인 재고관리를 위해서는 특정 요리의 재료와 양념에 있어 필수적인 것, 대체할 수 있는 것, 생략해도 되는 것을 파악하는 통찰력도 있어야 하고 때로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창의성도 있어야 한다.
아, 그렇다. 요리 담당자가 충족시켜야 할 목적함수는 먹을 수 있는 끼니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3대 영양소를 충족시키고’ ‘버리는 것을 최소화하고’ ‘비용 효율적으로’ ‘가족들의 입맛에 맞게’ ‘적당한 변화와 다양성을 주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쓰다 보니 너무 과몰입한 감이 없지 않다. 이 글을 보면 설거지와 청소 담당인 남편이 할 말이 많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깐 스친다.)
뭐, 어떤 집안일이든 모든 사람이 100점의 역할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각자 자기 상황과 여력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영국에서 나의 전업주부 생활도 딱 그만큼이다.
아침은 토스트나 시리얼로 간단히 먹는다. 아이가 학교에서 먹을 스낵을 챙겨 주고,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는 남편의 점심 도시락도 챙겨 준다. (상당수 영국 학교들이 오전 간식 시간을 운영하고, 이때 먹을 간식은 집에서 준비해 오도록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점심을 심플한 샌드위치나 슈퍼에서 파는 Meal-deal 같은 것으로 간단히 때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저녁 한 끼만큼은 신경 써서 챙겨 주려고 노력 중이다. 다양한 채소를 많이 먹이려고 하고 밖에서 한식을 못 먹으니 가능한 밥 종류로 챙겨주려고 한다.
한국에서 올 때 쌀과 잡곡, 김치, 말린 미역, 다시마, 국물용 대멸, 멸치볶음용 세멸, 된장/국간장/진간장/고추장/고춧가루 같은 기본양념 정도를 챙겨 왔다. 요새는 런던에서도 인터넷 쇼핑과 배송이 편리해서 대부분의 한식 재료를 당일배송으로 구입할 수 있지만 가격은 아무래도 한국과 비교하면 좀 비싼 편이다. 쌀도 선박 편에 대량으로 짐을 부칠 수 있다면 한 100kg쯤 들고 왔을 텐데. 우리는 캐리어에 겨우 5kg 정도 넣어 왔을까? 한 달이 못 되어 쌀이 바닥났고 김치는 더 일찍 떨어졌다.
런던의 대부분 슈퍼에서도 소용량 쌀을 판다. 그중 동남아나 인도요리용 쌀 말고 리조토용이나 파에야용 쌀을 고르면 낟알의 크기가 밥쌀보다 약간 더 크긴 해도 찰기나 맛이 아주 이상하진 않은데, 문제는 작은 돌멩이가 종종 들어 있다는 점이다.
밥을 주식으로 먹는 우리는 인터넷 한식 재료 쇼핑몰에서 쌀을 사면 된다. ‘농협’이라고 적혀 있고 1kg, 5kg, 10kg 단위로 구분되는 국산 쌀이 가장 안전하다. 한국산 쌀인 척하는 미국산 쌀이 많으므로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경기미’, ‘이천쌀’ 같은 브랜드가 한글로 쓰여 있어도 4.9kg, 6.8kg, 9.07kg 같은 애매한 단위로 파는 것들은 다 lb(파운드) 기준으로 파는 미국산 쌀이었다. 고시히카리 같은 아시안 밥쌀 품종을 미국에서도 수출용으로 생산하는 것 같았다. 가격은 국산 대비 약간 더 싸고 먹어 보니 품질도 나쁘지 않은 것 같긴 하다. (여기선 국산 쌀도 한국에서처럼 당일 도정하여 바로 배송하는 수준은 아니므로) 하지만 아무리 밥맛이 국산과 별 차이가 없다 한들 미국산 쌀이 ‘이천’이나 ‘경기’ 같은 고유명사는 못 쓰게 해야 하는 것 아닐지. 대충 보고 속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쌀 외에 김치와 마른미역도 한인몰에서 공수하고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현지 마트에서 구하기 힘들어 한인몰에서 샀던 품목은 떡볶이와 한국식 카레가루다. 떡볶이는 내가, 카레는 아이가 먹고 싶어서. 반면 고추장과 신라면 정도는 런던의 여느 작은 동네 슈퍼에서도 구할 수 있을 만큼 이미 대중적인 아이템이었다.
그 외에는 거의 현지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쓰고 있다. 고기는 지난번에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오늘은 채소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해 볼까 한다.
기후대가 같아서 그런지 영국에서 즐겨 먹는 채소는 한국과 거의 비슷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감자다. 영국 사람들은 감자를 구워도 먹고 튀겨도 먹고 볶아도 먹고 삶아서 으깨어도 먹는다. 신선 채소의 대부분은 스페인이나 모로코 등 대체로 인근 따뜻한 지역에서 수입된 것들이 많은 데 비해 감자는 ‘British’라고 쓰인 것이 많다. 이곳 브리튼과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품종도 정말 다양하다. 맛이 어떻게 다른지 아직 다 파악을 못 했지만 감자 코너에는 품종도 크기도 모양도 색도 다른 여러 가지 감자들이 있다. 우리 식구는 감자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여기서 모양도 예쁘고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까지 싼 감자를 매일 보다 보니 덩달아 많이 먹게 된다.
한국에 비해서는 당근도 자주 먹는다. 오븐으로 조리할 때 감자랑 같이 미리 깔아 두면 되니 요리하기 편하고 섬유소와 비타민 A 섭취 등 영양면에서도 좋을 것 같아 냉장고에 항상 상비하게 된다. 외국 당근은 한국에 비해 훨씬 날씬(?)해서 한 봉지 살 때의 부담감이 한국보다 적다. (한국에서는 늘 당근을 다 못 쓰고 버리는 일이 잦았다.)
양파, 대파(leek)와 마늘(garlic)도 한식에 필수인 데다 워낙 편하게 아무 데나 쓸 수 있는 채소이니 늘 상비해 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늘 먹는 애호박(courgette)이나 가지(aubergine), 오이,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 파프리카, 시금치도 흔하다.
Leek는 한국 대파와는 좀 다르지만 아쉬운 대로 대체가 가능하다. 마늘은 한국 마늘 맛과 차이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아쉽게도 통마늘로만 판다. 간 마늘이나 깐 마늘 같은 것은 한인마트에나 가야 구할 수 있는 품목이다. 영국 요리사들이 마늘을 쓰는 방식은 제이미 올리버나 고든 램지처럼 껍질 벗기지 않은 통마늘을 칼 옆등으로 으깨서 기름에 넣고 향을 낸 다음 휙, 버리는 방식이라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아까운 마늘 버리는 꼴을 참을 수 없는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통마늘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한국에서 자주 못 써 본 신기한 채소들은 이런 것이다.
먼저 Brussel Sprout. 호두알만 한 크기의 양배추 모양 채소인데, 오븐요리 마지막 즈음 반으로 썰어 양파랑 넣어두면 적당히 익는다. 모양도 재미있고 맛도 좋아서 자주 쓴다.
다음으로는 깍지 채로 먹는 초록 콩깍지들인데, 볶음요리를 할 때 적당히 넣으면 초록색에 길쭉길쭉한 모양이 보기에도 새롭고 맛도 괜찮다. 완두콩도 채소로 자주 쓴다. 완두콩은 다른 콩류와 다르게 ‘곡류’의 느낌보다 ‘채소’의 느낌으로 아삭하고 푸릇해서 좋다. 한국에서 완두콩은 초여름 딱 한철 밥에 올려 먹는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사시사철 초록 완두를 만날 수 있다. Salted butter를 얹은 데친 완두콩을 피시 앤 칩스에 곁들여 먹으면 정말 꿀맛이다. 완두콩 통조림도 많길래 한 번 먹어 보았는데 맛은 무난해도 색이 영 예쁘지가 않다.
버섯은 좀 아쉽다. 한국만큼 다양한 버섯을 많이 만날 수가 없다. 여기는 대부분의 마트에 흰 양송이와 갈색 양송이, 큰 양송이가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양송이 자체는 한국보다 저렴해서 처음에는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표고버섯의 진한 향이, 쫄깃한 느타리버섯이, 새송이버섯의 단단한 식감이 그립다. 규모 있는 고급 마트에서 새송이와 느타리를 발견한 적이 있는데 ‘Exotic mushrooms’라는 이름에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조용히 내려놓고, 그냥 여기서는 양송이나 실컷 먹기로 했다.
여기서 주로 샐러드용으로 먹는 상추(Lettuce)는 쌈야채로도 훌륭하다. 다만 깻잎은 우리나라에서만 먹는 채소라 구할 수가 없다. 해외생활을 오래 하는 분들은 깻잎 씨앗(생들깨)을 가져와서 키워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할 정성은 없어 그냥 간장에 절인 깻잎장아찌를 한통 들고 와서 삼겹살 먹을 때 아껴 먹고 있다.
또 외국에서 한국인들이 직접 키워 먹는 채소 중에 콩나물이 있다. 현지 슈퍼에서 파는 ‘Bean Sprout’는 숙주나물뿐인 데다 요즘 콩나물 재배기가 잘 나온다고 하니 시도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콩나물은 안 먹기로…
여기도 날씨가 풀리면 채소 코너가 더 풍성해지겠지.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조리방식은 거의 두 가지로 수렴하고 있다. 시간이 많을 땐 오븐에 덩어리 재료를 넣어 천천히 로스팅을 하고, 시간이 없으면 더 잘게(길쭉하게 혹은 얇게) 썰어 Pan frying을 한다. 한국식 조림/찜/전골/지짐 이런 것은 없다. 돼지, 소, 닭, 연어, 오리, 대구 등 메인 재료와 그때그때 다양한 채소를 그대로 굽거나 볶아서 메인 반찬으로 먹고 있다. 양념도 간단히 소금, 후추만 할 때가 많고 굴소스, 간장, 된장을 쓰기도 한다.
남편이나 아이 모두 이 정도로만 대충 해도 맛있게 잘 먹는 입맛이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