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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Feb 17. 2022

영국 초등학교 입학 적응기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며 우는 아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근처 카페에서 쉬고 있을 때,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교장 선생님이었다.

아이가 오늘 아침 너무 upset 되어서 수업을 듣기 힘들어 잠깐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 학교에 가기 싫다며 눈물을 보이는 아이를, 충분히 달래주지 않고 서둘러 들여보낸 것이 문제였나 보다.


영국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3주 차, 아침마다 아이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살짝 눈물을 보인다.

“엄마는 바로 근처 카페에 있을 거야. 네가 필요로 한다면 바로 달려올 수 있어.”라고 얘기해 주고, 매일 아이가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한참을 교문 밖에서 지켜보다 돌아서곤 한다. 막상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지내다가 오는 눈치였기에 오늘도 일단 들여보내고 나면 괜찮겠거니 하고 서둘러 밀어 넣고 왔더니만, 오늘은 또 그게 아니었나 보다.


"지금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가는 게 좋을까요?" 했더니 교장선생님도 고민되시는 눈치다. 잠깐 아이랑 통화 좀 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천천히, 차분하게 말했다.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하니? 엄마한테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니?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금 바로 데리러 갈게.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엄마 목소리 듣고 힘내서 학교 수업을 듣고 오면 더 좋겠어. 어차피 내일 또 겪을 일이고, 이건 반드시 꼭 해야 하는 거거든. 어때, 할 수 있겠어?”

다행히 아이는 진정이 되었는지 이제 교실에 수업 들으러 가겠다고 했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정을 붙이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어린이집에 처음 갈 때도 다른 아이들보다 좀 더 어려워했고 학년이 바뀌어 선생님이 달라질 때마다 등원길에 울곤 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곧장 출근해야 했던 나는 아침마다 실랑이를 하고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곤 했다.

매번 기관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달래 가며 보내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아이에게서 내 어릴 때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5살에 처음 갔던 선교원 앞에서 나는 악을 쓰며 온 힘을 다해 안 가겠다고 버텼고 엄마는 힘으로 나를 끌었다. 선생님은 난처하다는 웃으며, 세상 모르겠다는 말투로 “도대체 아이가 왜 이럴까요, 호호호.” 하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몰랐다. 엄마가 억지로 나를 밀어 넣고 돌아서자마자 저 선생이 얼마나 무서운 표정으로, 얼마나 냉담한 태도로 바뀌는지.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다정하거나 친절한 적이 없고, 늘 소리치고 밀치고 벌을 주는 나쁜 보육교사였다. 엄마 앞에서는 웃다가도 엄마가 없을 때는 순식간에 사나워지는 그 선생이 마귀할멈 같았다. 하지만 나는 선교원에 가기 싫은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고, 엄마는 아이의 불편함을 알아차릴 만큼 섬세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1~2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몸에서 열이 펄펄 났다.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써 보았지만 택도 없는 소리라는 엄마의 태도는 굳건한 바윗돌 같았고 나는 거기에 부딪치는 날계란 같았다. 그중에서도 칼슘이 모자라 껍질이 얇은, 파사삭 깨지는 그런 계란. 열감에 내딛는 걸음이 뭔가 공중을 디디는 것처럼 어질어질 이상한 느낌으로, 울면서 학교에 가던 기억이 선하다. 그때, 아무리 아파도, 하늘이 무너져도 학교에 가는 것 외에 도저히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학교로 향하는 것이 죽기만큼 싫었던 적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다. 우리 반에 여왕벌 같은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는 다른 친구들을 시녀처럼 부리면서 한 명씩 돌아가며 따돌리고 괴롭혔다. 관계에 있어서 서툴고 멍하고 느린 편인 나는 곧잘 타깃이 되었다. 당시 나는 월요일부터 주말까지 남은 날짜를 세어가며 하루하루를 겨우 버텼다.

(다행히 의사소통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된 초등 고학년 이후로는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그 시절은 그랬다. 아이의 생각을 묻지 않았고 아이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것은 그저 어리광으로만 여겼을 뿐이고, 12년 초중고 과정 내내 결석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집이 특별히 엄격했던 것도 아니다. 졸업식 날이면 한 반의 아이 50명 중 45명이 개근상을 받았고 나머지 5명도 한두 번의 지각이나 조퇴가 있었을 뿐이다. 모든 집이 다 그랬던 것이다.


그런 기억 때문에, 나는 학교에 가기 싫다는 아이에게 꼭 물어본다. 혹시 무서운 선생님이 있는지, 친구들이 괴롭히거나 너무 짓궂은 장난을 치는지, 아니면 몸이 아프거나 불편한지.

그러다 보면 아이가 뭔가 불편했던 지점들을 털어놓을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아이의 마음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친구들과의 미묘한 관계, 다소 거친 친구들의 영역 침범, 교직원의 딱딱한 사무적 태도 등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포착하지 못할 디테일한 부분들을 이야기한다. 뭐 그런 걸 갖고 따지고 드냐며, 감정 같은 것은 쉽게 무시하는 거친 환경에서 둔하게 자라왔던 나는 속으로 감탄한다.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안에서 '감정'이란 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겨우 구분해서 이름을 붙여줄 수 있었는데, 하면서.


여하튼, 다행스럽게도 아이에게 지금까지 신체/정신적 학대나 괴롭힘 같은 즉각적인 조치가 필요한 상황은 없었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좋은 선생님들과 기관을 만났다. 친구들도 대부분 반듯하게 키운 밝고 건강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난다고 한다. 엄마만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학교에 없다고 한다.


"아, 그건… 엄마도 가끔은 그렇단다."


어른들조차도, 딱히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더라도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들만 가득한 곳에서 버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한 성인이 되고서도 나는 따뜻한 엄마 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엄마 품’이라는 것이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것은 아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엄마의 손길 같은, 그런 사랑과 보호, 안전의 느낌이다.


내 유난스러운 불안과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이 유년기의 채워지지 않은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으므로, 아이가 어릴 때 나는 가급적 항상 아이의 옆을 지켜주거나 예측 가능한 곳에서 기다려 주려고 했다. 아이를 자주 안아주고 세상에서 너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아이는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면서도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어 묻고 또 물었고, 나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는 만족했다. 사실 이렇게 ‘연결성’을 강화하는 과정들은 아이보다도 오히려 내 내면의 어린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도 8살, 학교라는 더 큰 사회의 일원이 되어 일차적인 독립을 해야 하는 시기이다. 앞으로 사춘기 때, 성인이 될 때 또 한 번씩 정신적 독립이나 물리적, 경제적 독립을 해 나가겠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또 새로운 도전들이 되겠지만,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울지 말고 학교에 가자.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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