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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Feb 23. 2022

영국에서 술을 마셔보자

재미있는 영국의 음주문화


영국은 비교적 금욕적인 문화를 가진 재미없는 나라인데, 특이하게도 술과 관련한 영역에서만은 상당히 흥미로운 편이다. 같은 영미 문화권이니 미국과 비슷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술에 대한 태도에서만은 두 나라가 완전히 달랐다. 


다들 아는 것처럼 미국은 술을 매우 금기시하는 사회이다. 다른 대부분의 성인으로서의 권리나 의무가 만 16세 혹은 18세부터는 적용되는 데 비해, 음주만은 만 21세가 되어서야 허용된다. (그 전에는 술을 만지거나 운반해서도 안 된다!) 미국에서 주류 판매는 까다로운 허가증을 받아야만 가능하고, 한 번에 일정량 이상의 주류를 판매할 수도 없다. 술을 산 사람은 술병이 보이지 않도록 종이봉투 등으로 꽁꽁 싸매어 들고 다녀야 하고, 야외나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도 대부분의 주에서 엄격하게 금지되는 만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마셔야 한다. 주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술집에서의 주류 판매 시간도 대부분 새벽 2시 반 이전에 끝난다. 만취해서 길바닥에 늘어져있는 것은 물론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는 것도 안 된다. 


미국의 이런 음주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흑역사가 있다. 10여 년 전,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한 클럽에서 한국식으로 테이블을 잡아 병째 주문을 하고 신기한 외국문화를 구경하다가(샌프란시스코는 LGBT들의 천국이고 그곳에도 게이들이 많았다), 같이 갔던 일행 중이 반 이상 남은 술이 아깝다며 내 가방에 넣어 가자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가방에 술병을 넣고 몰래 나가려는데 정말 어마어마하게 무시무시한 바운서(술집 경비원)가 어떻게 봤는지 우리 일행을 잡고는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195cm는 족히 될 듯한 키에 무슨 격투기 선수마냥 몸이 두껍고 컸다. 세상에서 본 것 중 가장 무서운 얼굴을 앞에 두고, 60%쯤 남은 Grey goose를 가방에서 꺼내는 장면. 희극적이면서도 공포스럽게 뇌리에 박힌 그 장면이 워낙 강렬해서 아직도 그 술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알고 보니 미국에서는 술집에서 마시던 술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불법이고 적발될 경우 술집도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영국에서는, 만취자를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동네 곳곳의 펍에서 사람들이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신다. 축구라도 있는 날이면 난리가 난다. 펍에서 산 술을 길거리에 들고 나와 마시는 모습도 흔하다. 오죽하면, 현대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영국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젠틀한 영국 신사가 아니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훌리건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있을까.

영국에서는 만 18세만 되면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고, 16, 17세라도 어른과 동행하면 마실 수 있다. 또 만 16세, 17세 아이들에게도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곁들이는 와인, 맥주, 사이더(사과 발효주)가 허용되며, 만 5세-16세의 어린이들조차도 집에서 마시는 술(발효주)은 합법이다. 이 정도면 매우 쇼킹하다.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 오랜 기간 와인, 맥주, 사이더 같은 발효주는 ‘술’이 아니라 수분 섭취를 대체하는 ‘음료’였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런 관념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해리포터에서 보면 아이들이 버터비어를 마시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과연 이 버터비어에 알코올이 포함되어 있을까? 구글에서 찾아보면 Non-alcoholic beverage라는 이야기와 1~2%의 알코올을 함유하고 있다는 정보가 혼재한다. 해리포터가 영화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화는 미국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Alcohol-free’라는 것이 공식적인 답변인 것 같기는 하지만. 글쎄, 영국인 작가 조앤 롤링이 책을 쓸 때에는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가정하지 않았을까 합리적 의심을 해 본다. (그러고 보니, 헤르미온느가 버터비어 마시고 취한 적도 있지 않던가?)

버터비어를 벌컥벌컥 마시던 헤르미온느


이렇게 어릴 때부터 알코올음료에 익숙해서인지 런던 도심의 핫플레이스에서는 Binge drinking 하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GP(보건소와 비슷한 1차 의료기관) 등록을 위해 NHS(국가 보건기관)의 건강 관련 문진에 답변해야 했는데, 아이용과 다르게 성인용인 내 질문지에는 알코올 소비 습성에 관련된 질문이 상당히 상세하고도 길었다. 아마도 알코올 남용과 관련된 문제가 많다는 증거인 것 같다. 궁금한 김에 국가별 알코올 소비량을 구글링해 봤다. 


■ 연간 1인당 순수 알코올 소비량(리터) (2016년 기준)
→ 독일(13.4) > 프랑스(12.6) > 러시아(11.7) > 영국(11.4) > 대한민국(10.2) > 미국(9.8) > 일본(8.0)
 

역시, 서유럽 강대국 3개국과 술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러시아가 알코올 소비량이 많다. 우리나라도 음주와 관련해서는 웬만해서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대한민국보다 더 술을 많이 마신다. 미국은 우리보다 더 적고 일본은 그보다도 더 적었다.


미국과 영국의 이런 음주문화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내가 모르는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당 부분 종교적 배경에 기인한 것 같다. 

미국은 (대중문화로 접하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주류 문화에서는 초기 정착인들의 엄격한 청교도 정신이 남아 있어 음주와 성(sex)에 매우 보수적인 국가이다. 오죽하면 미국에서 무제한으로 허용된 단 하나의 쾌락이 먹는 즐거움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미국은 오래도록 압도적인 비만율 1위 국가라는 기록을 지키고 있다.  (물론,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W.A.S.P.로 대변되는 상류층의 문화와는 별개로 너무나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있긴 하다.)


같은 기독교 문화이지만 유럽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자유롭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더 너그러운 가톨릭 덕분인 것 같다. 가톨릭 문화권인 이탈리아와 프랑스는 성 문화가 한층 자유롭고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도 과격하다. 가톨릭 사제들에게 성(sex)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알코올은 너그럽게 허용되었다. 와인과 각종 향료를 첨가한 알코올음료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가장 먼저 발달했을 정도이다. 질적 측면에서의 미식문화도 발달해 있다. 

독일 지역에서 널리 퍼진 루터파 신교는 면죄부 판매 등 가톨릭의 가장 부패한 측면을 반대했을 뿐 교리에 있어서는 기존 가톨릭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영국 교회 또한 헨리 7세가 본인의 이혼을 위해 가톨릭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영국 국교회를 만들었지만 교리는 가톨릭과 거의 동일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위에서 데이터로 확인되는 것처럼) 알코올에 관대한 문화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자 그럼, 이런 음주의 천국 영국에서 술을 마셔 보자. 

영국은 맥주 중에서도 다양한 에일의 천국이고, 스카치위스키가 있고, 진(gin)의 나라이기도 하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술들이다. 와우!

(술에 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공유하는 채널이 많고 자세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많으므로 나의 짧은 지식으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간단한 수준에서만 얘기하려 한다.)


보통 한국에서 흔히 마시는 ‘라거’는 하면 발효 방식의 맥주로, 냉장시설이 발달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맥주이다. 반대로 상면발효 방식의 맥주는 ‘에일’이라고 불리는데 독특한 맛과 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는 라거가 점령했지만 영국만은 전통식 에일이 강세를 보이는 곳이며, 그중에서도 드럼통 채로 유통하는 ‘캐스크 에일’이 유명하고 한다. 캐스크 에일은 여과나 살균 과정, 탄산의 인위적인 주입 없이 맥주를 발효시키는 캐스크를 통째로 운반하여 따라내는 진정한 생맥주이다. 살균을 하지 않아 캐스크 내에서 2차 발효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유통기한이 극히 짧고 운반 방식도 까다로워 바다 건너 수출이 어렵다. 영국 안에서도 일반 가정에서는 맛볼 수 없고 공장에서 매일 신선한 캐스크를 직접 공급받는 펍에서나 맛볼 수 있다. 인위적인 가스 주입이 없어 톡 쏘는 맛도 없고, 온도도 상대적으로 미지근한 상태이므로 생소할 수는 있지만 (나의 경우) 맛과 향이 독특하고 좋았다. 

하지만… 아이 등하교를 책임지는 애엄마가 펍에서 맥주를 마실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운 좋아야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것일 뿐. (눈물) 

마트에서 파는 에일 맥주들도 있긴 한데, 글쎄. 지금까지 탐색을 해 본 결과 바이젠(밀맥주) 종류와 기네스를 빼면 병입 된 에일은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닌 것 같다. IPA나 비터 페일 같은 영국 에일 맥주는 내 입맛에 별로다. 

그리고, 여기 와서 보고 알게 된 점인데 영국 사람들도 라거 정말 많이 마신다! 영국 사람들은 모두 에일 마시는 줄 알았더니 웬걸. 필스너, 페로니, 스텔라 등등 라거의 위상도 에일 이상이다. 

결론적으로, 가끔 펍에 갈 일이 있을 때 마시는 캐스크 에일 외에는 영국에서 맥주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라거나 바이젠은 한국에도 많을 뿐더러 가격도 한국 편의점이 더 싸다. 


또, 영국 사람들 독주(증류주, Spirits)도 생각보다 별로 많이 마시지 않는 것 같다. 펍이든 레스토랑이든 보통 맥주나 와인을 많이 마시지 위스키, 진, 럼 같은 술을 마시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주류 코너에서도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내가 집에 위스키나 진을 사놓고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먼 길 돌아왔지만, 결론적으로 영국에서 가장 좋은 건 와인이었다. 영국에서는 나지도 않는 와인이 가장 괜찮았다니 좀 우습지만... 실제로 영국 사람들도 와인을 엄청 많이 마시는 것 같다. 여전히 펍에서는 맥주가 최고이고 햇살 좋은 날 길거리나 야외에서도 맥주가 어울리지만, 관찰해 보니 영국인들도 레스토랑에서 식사와 함께 할 때는 대체로 와인을 곁들이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마트에서 집에서 마실 술로도 와인을 고르는 모습이 더 흔히 보였다. 

이것도 정말 그런지 궁금하니 구글에서 UK에서 주종별 알코올 소비 비중을 한번 찾아보자.


(Source: Adapted from data supplied by British Beer and Pub Association, Statistical Handbook, 2016)


실제로 영국에서 맥주 소비량은 조금씩 줄고 와인 소비량이 계속 늘고 있었다. 위 그래프가 과거부터의 데이터가 풍부해서 선택했는데 좀 더 최근 자료 중에는 두 가지가 역전이 되었다는 데이터도 있었다.


나의 경우, 와인을 좋아하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와인 한 번 따기가 쉽지는 않았다. 마실 만한 와인은 식당에서건 술집에서건 마트에서건 맥주 같은 대체재에 비해 비쌀 뿐더러, 우리 집에서 음주를 즐기는 사람은 나 한 사람 뿐이기 때문에 750ml 와인 한 병을 따면(두어 번 나누어 마신다 해도) 대체로 반도 못 마시고 냉장고에서 요리용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네, 엄청 술 잘 마시는 것처럼 썼지만 한두 잔이면 끝인 주량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럽산 와인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가득한데다, 다양한 소포장 와인들까지 있다. 375ml짜리 하프 보틀이 아니고 187ml짜리 쿼터 보틀인데 내 주량에 딱 적당한 수준이다. 그냥 레드/화이트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샤르도네/소비뇽 블랑/메를로/카베르네 쇼비뇽 등 품종도 다양하고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뉴질랜드 등 국적도 다양하다. 가격도 2~3파운드 수준으로 맥주 한 병 수준이다. 

집 앞 Sainsbury에서 가장 먼저 사 본 소비뇽 블랑은 1.95파운드짜리 착한 가격을 자랑하는데, 맛도 꽤 괜찮았다. (뉴질랜드산 소비뇽 블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 품종 중 하나다.) 레드와인 중에서 175ml짜리 미니미 버전으로 자주 보이는 것은 스페인산 와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적용이 안 되는 얘기지만 유럽에서는 스페인산 와인이 의외로(?) 괜찮다. 리오하, 키안티 등 웬만한 스페인 와인들이 맛도 괜찮고 가성비도 좋다. 물론 이탈리아나 프랑스 와인도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마시기 좋은 조건이다. 


영국 사람들이 많이 마시는 와인을 마트에서 차지하는 면적 비중으로 추측해 보니 프랑스=이탈리아 > 스페인 > 미국=호주=뉴질랜드=남아공 > 남미 순인 것 같다. 유럽은 워낙 가까워서 그런 것 같고, 호주나 뉴질랜드, 남아공도 영연방이라 그런지 꽤 많다. 휘리릭 지금껏 훑어본 바로 미국이나 남미 와인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고 유럽과 영연방 와인들은 한국보다 가격이나 접근 가능성 면에서 훨씬 좋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계속 조금씩 와인을 쟁이게 된다. 영국에 온 지 한 달 반, 지금까지는 맥주도 탐색을 해봐야 하니 종류별로 사서 조금씩 맛보고 있었다. 

질적으로 술이 안 받기도 하고 음주의 즐거움을 모르는 남편은 못마땅한 눈치다. 사실 나도 술이 약한 체질이라, 일주일에 두세 번 이상 마시면 몸이 피곤한 게 느껴져서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마시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이렇게 술 이야기를 썼는데, 오늘 저녁엔 한 잔 해도 되겠지? 

어떤 걸 골라 볼까 오늘도 술 구경을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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