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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Sep 30. 2022

영국에서 느끼는 일본의 존재감

"엇, 너희 이렇게 친한 사이였어?"


영국에서 지내다 보면 영국인들이 일본의 존재감을 크게, 그리고 우호적으로 갖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역사로 보나, 국토나 인구의 규모로 보나 중국이 우선이 될 것 같은데 영국인들에게는 일본이 중국 이상을 차지하는 느낌이다. 영국인들에게 동아시아 3국의 비중은 일본 50~60%, 중국 30~40%, 한국 10% 미만 정도 될까. (물론 나의 주관적인 경험이 반드시 실제 상황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대영박물관이나 V&A 박물관 같은 곳을 가 보면 일본문화와 미술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유럽을 강타한 자포니즘의 트렌드는 영국에서도 꽤나 컸던 것 같다.

내가 자주 가는 큐 가든에는 일본식 정원과 당문, 대나무 숲과 함께 꾸며진 일본식 가옥 Minka House가 있다. 아이가 좋아하는 Holland Park에는 교토식 정원도 있다.

큐가든
홀란드 가든

음식의 경우에도 동아시아 음식 중에는 일본 음식점을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다. 전 세계에 중국인이 안 퍼져 있는 곳이 없고, 싸고 편한 음식으로 Chinese Restaurant의 비중이 그렇게 높지만 의외로 런던에는 미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식당들이 별로 많지 않다. 캐주얼한 Asian Fast Food 체인들이 있긴 하지만 Chinese보다는 오히려 스시, 우동, 치킨가츠 등 Japanese가 주력이다.

(물론 영국에는 역사적, 지리적 이유로 인도나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남부 아시아 음식점, 터키 음식점, 레바논 등 중동 음식점들도 많다.)




처음에는 왜? 싶었지만 오래 관찰하다 보니 이들 두 나라 사이는 확실히 정서적으로 친밀감을 느낄 비슷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다.


일본인들이 영국을 동경했던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대 근대화의 모델로 영국을 설정하고 영국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여러 가지로 영국을 따랐다. 근대적인 군주제, 식민지 제국주의, 공/후/백/자/남작의 귀족 호칭과 신분제, 서양식 예법과 복식, 자동차의 좌측통행 같은 것들까지 말이다. 일본인들은 ‘영국도 섬나라, 우리도 섬나라’ 같은 공통점을 강조하며 ‘우리는 아시아의 영국이 되겠다’는 계획을 공공연하게 표현하곤 했다.

새로 누군가를 알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일본처럼) 나를 동경하며 롤모델로 삼고 본받고 따르고 싶다고 하고, 누군가는 (청나라처럼) 오만하게 자신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무시하고, 누군가는 (조선처럼)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이불속에 파묻혀 나오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가장 미더워 보일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나 좋다고 하는 사람 싫다고 내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영국도 대체로 일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속한 연합국과 일본이 속한 추축국은 크게 보아 서로 적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일본은 대체로 직접 맞붙지 않았다. 2차 대전의 무대가 크게 유럽(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나뉘겠지만)과 태평양이라고 할 때 영국군은 대체로 유럽의 서부전선에, 일본군은 대체로 태평양 전쟁에 있었다. 물론 태평양 전쟁에도 당시 영국의 식민지 국가 중 태평양에 가까운 호주,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등이 직접 관여했지만, 태평양 전쟁은 거의 미국과 일본 사이의 싸움이었다. 영국도 유럽에서 승리 이후 일본의 패망(8월)까지 동맹국 미국을 도와 태평양 전선으로 파병을 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전쟁도 끝물이라 원한을 품을 만큼 치고받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사이에는 비슷한 면도 꽤 있다.

정치체제나 사회 시스템의 경우야 일본이 영국 시스템을 따라 한 것이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 이면의 근본적인 철학이랄까, 사상이랄까, 혹은 정서랄까. 이런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들만의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무(武)를 숭상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내용이 길어져서 이전 글에서 따로 정리한 바 있다. ("힘을 지향하는 영국인들" 참고)


그런데 지난번 쓴 글에서 말한 부분 외에도, 자잘한 일상생활 속에서 영국과 일본인들이 남성성을 지향하고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좀 더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우선, 이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은 모두 학부모 모임에서 아빠들은 아빠들끼리,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우리 부부(한국)나 다른 유럽 대륙 국가들에 비해 심하다. 등굣길, 하굣길에 아무 생각 없이 아이 친구 아빠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이들이 약간 당황하는 느낌이 전해진다. 인사를 하며 웃고는 있지만 속으로 ‘아, 여자와 Small talk를 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데. 남들이 이 모습을 보면 내 꼴이 우습게 보일 텐데. 이 여자가 더 길게 말을 붙이면 어떡하지?’ 대강 이런 식의 난처함을 느끼는 것이 사토라레처럼 들리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나 혼자만의 착각이거나 특정한 개인의 성격 때문인가 했다. 하지만 영국에 사는 다른 한국 지인들이나 그 외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영국에서 엄마들은 엄마들끼리만 얘기를 해야 하는 분위기가 참 신기하다고.



또 영국에서 각종 역사적인 관광지를 다니며, 남자들이 ‘여자들과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없고 남자들만의 Business가 있다.’ 고 생각해 왔던 것이 역사적으로 이어져 왔던 것임을 느꼈다.

영국의 왕궁이나 귀족들의 저택에 가 보면, 가장 중심이 되는, State Room(Chamber)이라고 불리는 크고 화려한 방이 있다. 손님이 왔을 때 디너 룸으로 활용되는 방으로, 대체로 그 집에서 가장 멋진 장식과 예술품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방은 보통 Drawing room이라고 불리는 중후하면서도 좀 더 아늑하게 장식된 응접실로 연결된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남자들공간이었다고 한다. 집주인 부부와 초대된 남녀 손님 모두가 State Room에서 식사를 한 후, 남자들은 이곳으로 안내되어 시가를 피우며 위스키를 마시고 카드놀이나 당구를 치고 사업적인 대화(혹은 그저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여자 이야기)에 참여했고, 여자들은 다른 방으로 안내되어 좀 더 가볍고 소비적인 대화를 하곤 했다고 한다. (‘브리저튼’ 같은 사극을 떠올려 보면 된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도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남녀 간 내외를 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현대 비즈니스 혹은 정치, 대학 같은 곳은 물론이거니와 사적인 영역에서도 그런 성별 구분은 많이 희석된 것 같고, 유럽(프랑스 등 대륙)도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작가의 활동이나 여성해방운동 이후 그런 구분이 좀 희미해진 것 같다. 그런데 영국인과 일본인은 아직도, 상대적으로 그런 구분이 좀 더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선 초등학교 중에서도 Girl’s school이 아직 꽤 많이 남아 있고, Eton 같은 최고급 기숙학교들도 여전히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


옷차림에 있어서도 남자들은 남성스러움을, 여자들은 여성스러움을 더 강조하는 옷차림을 한다. 영국인들이 입는 옷이 지나치게 남성적인 복장과 여성적인 복장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다는 글도 예전에 한 번 따로 쓴 적이 있다. ("영국인들의 패션 스타일" 참고)


일본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지만 Japanese Community가 가까운 관계로 일본인 학생들이 꽤 있는데, 여기서 보는 대부분의 일본 엄마들이 순종적이고 가정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일본인 아빠들은 밖에서는 지나치게 예의 발랐지만(일본인들 사이에서는 90도 폴더 인사를 진짜로 한다.) 가족 안에서는 절대적 위치인 것 같았다.


물론 요즘 같은 21세기, 이곳에서도 트렌드는 많이 바뀌고 있고 도심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내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시점, 런던의 한 중산층 거주지역에서 스냅샷을 찍어 보면 이런 경향이 분명히 보인다.



이래저래, 가까운 한국에서도 못 느끼던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 먼 곳 영국까지 와서 상당히 많이 의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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