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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Feb 04. 2022

학부모는 처음인지라

사람들 모임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아웃사이더 엄마의 학부모 신고식


아이를 학교에 보낸 지 일주일째, 하굣길에 드디어 Year 1의 다른 학부모들과 인사를 했다. 


이름이나 외모에서 이탈리아 계로 보이는 한 엄마가 나를 보더니 혹시 새로 온 한국인 학생의 엄마냐며, 반 대표 엄마로 보이는 다른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드디어 만났네요! 당신이 OO의 엄마군요. 왓츠앱에 초대할게요.” 

나는 내 전화번호를 전달했고, 그날 저녁 일단 왓츠앱부터 설치했다.  


즉각 아이네 반 학부모의 단체 대화방에 초대가 되었다. 

나는 머리가 하얘지고 얼어붙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니 더 불편해서 “고마워요, 반가워요!” 하고는 안절부절못해하며 기다렸다. 그 단체 대화방의 리더든 누군가가 나에게 간단히 본인들의 소개를 해 주고 나를 소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방 분위기는 쎄 하였고 나는 뭔가 의기소침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남편에게 오늘 학부모 단톡방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남편이 자기가 봐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는 그냥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왓츠앱에 다시 들어가 보았더니 오빠가 내 휴대폰에서 적절하고 겸손한 자기소개와 함께 이런 멋진 그룹에 합류하게 되어 기쁘다는 아부 섞인 소감을 밝히면서, 괜찮다면 나의 남편도 이 방에 초대해 줄 수 있냐고 요청해 놓았다.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보내주었고 남편 번호도 단체방에 추가되어 있었다. 


문득, 나이 40이 되기까지 적절하게 다가서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상대방의 호의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자리 자체가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특히 이미 형성된 그룹 안에 새롭게 참여하는 것은 더더욱. 


혼자 있는 것은 외롭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애태우며 살필 필요가 없었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적절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환대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상처받거나 무시받는다는 모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상처받거나 무시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어색한 자리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때 내가 불안을 처리하는 방식은, 마치 애초에 그런 불안이 없는 척하는 것이었다. 마치 이미 내가 이 자리를 편하게 느끼는 것처럼 구는 것이다. 속으로는 모임에서 환영받지 못할까 봐 극도로 불안에 떨고 있더라도. 

다른 방식의 처리 방법도 있다. 

너희들이 나를 환영하지 않더라도 나는 거기 전전긍긍하지 않을 거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내가 꼭 여기 끼고 싶어서 그런 건 아냐. 내가 꼭 너랑 친해지고 싶은 건 아니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미묘한 제스처를 통해 나는 다른 친구들과 계획과 삶이 있고, 너희들의 호의나 도움이 꼭 필수적이지는 않다는 식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 행동이 상처받기 쉬운 내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듯이.


그런데 누가 그런 신참을 좋아하겠는가. 오래된 인연들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오자마자 건방지게 구는 사람을 말이다. 나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흉보고 싫어했을 것이 뻔하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전략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먼저 조심스럽게 다가서고, 너희들의 그룹에 포함되고 싶다고 정중하게 요청하고, 나는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었을 테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겸손한 말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어, 많은 수고를 들여 문구를 다듬거나 새로 연습할 필요도 없이 비슷한 말을 외워 써도 될 것이다. 

굳이 매번 진심을 다해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도 없다. 그냥 형식적인 문구와 제스처여도 상황에 맞게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의 남편은 이런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공식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고, 필요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기대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나보다 훨씬 더 편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능숙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공식을 나는 알지 못했고 서툴고 미숙한 나에게 그런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가까이에서 보고 배울 기회도 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그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바꿔 볼 생각을 안 하고 살았더랬다. (참고로, 나는 사회생활을 16년이나 했다.)

그리고, 내 나이 40에 머나먼 이국 땅에서 학부모 사회로 진입하고서야 비로소 이런 사회적 매너와 스킬을 배우고 있다. 


...나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런 나라도 앞으로는 잘할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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