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영화 <모나리자스마일>_리무 고도근시안경

by 리무

사실 나는 무식하다. 남들에게 무식의 정의가 어떠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참 무식하다고 느낀다. 거친 파도바람을 뚫고 항구를 새벽마다 나서는 어떤 시인도 국문학과를 나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열망을 배 위에서 시 낭송을 하며 푼다는데 나는 그런 열망이 없어서 외울 줄 아는 시가 한 개도 없다. 고로 나는 참 무식하다. 하지만 무식한 나도 대학 학위를 땄다는 아이러니가 내 졸업장에 두 가지 전공이라는 잉크로 새겨져 있다.


대학 학위를 따기 위해 나는 몇 년의 입시시스템을 거쳤다. 뭐 내 주관은 하나도 없었다. 무식한 애가 주관도 없다니. 내 학창 시절 플러스 재수 1년은 참 무식의 곱빼기였다.


너 미대 갈래? 그럼 미술학원 알아오래서 알아왔고, 미대 가려면 홍대 앞에서 무조건 학원을 다녀야 한다 그래서 그 추운 겨울에 홍대 앞을 나간다고 교복치마에 살색스타킹을 신고 학원을 발품 나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요즘 수족냉증에 좋다는 징코를 열심히 먹고 있다.


그렇게 알아낸 미술학원에서 그냥 그림 그리래서 그림 그렸다. 정말 창피한 소리지만 그 당시 나는 가나다군이 뭔지도 몰랐다. 고3 1학기까지 난 그걸 몰랐다. 그래서 가장 친한 친구가 학교에서 제일 먼저 수시에 붙었다는 사실을 내게 복도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말할 때도 난 질투심도 나지 않았다. 그냥 기뻐서 마냥 박수만 열라리 쳤다. 무식한 바보가 순수하기까지 하다니. 순수한 바보는 입시미술을 그림문제 푸는 느낌으로 홍대까지 재밌게 입시미술을 하러 다녔다. 음... 지지고 먹으려고 간 거 일수도 있어.


여기까지 내가 얼마큼 무식했는지(플러스 현재진행형) 서술했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렇게 무식했음에도 암기까지는 아니지만 기억이 나는 시 한 편이 있다.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고1 때였나, 우리 반에 문과 탑이 있었다. 선영이. 선영이는 공부를 정말 잘했다. 말도 잘했다. 나는 그 애 입에서 육두문자를 내뱉는 걸 본 적이 없다. 꼿꼿하긴 얼마나 꼿꼿한지 그 자세로 매 학기마다 반장을 했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고 쿠데타도 일으키지 않았다. 노는 무리들도 선영이가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였다. 선영이는 그런 애였다.


어느 날 국어시간에 시를 한편씩 골라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수업주제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가 않는다. 하지만 선영이가 저 시를 읊은 건 기억이 매우 잘 난다.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1997)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잣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잣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잣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편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나는 선영이가 알고 있었는지 그게 참 궁금하다. 그 친구의 근황보다도 나는 그게 제일 궁금하다. 넌 분명 뭘 알고 있었던 거니? 너는 우리한테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거니? 그 시를 선택한 이유가 뭐니? 국어시간 끝나고 외출증을 어떻게든 끊어서 정문 앞 치즈밥을 먹으려 했던 천진난만 우리한테 그 시를 알려준 이유가 뭐니? 넌 정말 뭔가를 알고 있었니?


나는 무식해서 대학교를 가고 나서야 알았다.


선영아, 사실 근데 무식한 게 죄는 아니지 않니? 잠깐만 너 나 알기는 아니? 나 그때 맨날 뒤에서 졸면서 필기했던 신통방통했던 그 애인데... 모르니...?


그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에 대신 짧게 답하자면 카톡 프사 속 걔네들은 아직 화사하다. 필터로 화사하기도 하고, 외국물을 먹어 화사하기도 하고, 하얀 면사포를 써서 화사하기도 하다. 아, 어떤 애는 아기로 화사함을 대신하기도 하더라.


선영이는 어디로 갔냐고?


선영이는 이과탑의 결혼식에서 선생님이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화사한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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