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은 불안정을 알아본다

영화 <헤어질 결심>_리무 고도근시안경

by 리무

리무 고도근시안경

해준은 불안정한 사람이다. 멀끔한 외모에 깔끔한 성격, 맞춤옷을 입으며 능력있는 아내와 주말부부로 지내는 그는 남들이 보기엔 꽤나 안정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는 지독한 불면증이 있으며 졸음운전을 하면서까지 주말마다 아내가 있는 안개 속의 도시 이포로 향한다. 어쩌면 그가 많은 물티슈를 넣을 수 있도록 많은 주머니가 달린 깔쌈한 맞춤옷을 갑옷마냥 입고 다니는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무방비해져 몹시 불안해서일 것이다.


그는 살인 사건이 일어날 때만 눈이 반짝반짝해진다. 갑옷을 입은 기사마냥 활개를 친다. 그렇게 마주한 너저분한 사건현장들은 그에게 역으로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그의 집에 가려진 커튼 뒤로 미결사건들을 숨겨놓는 것도 어쩌면 잠 못드는 밤 불안에 휩싸이는 것보단 해결해야할 미결들을 바라보며 눈이라도 반짝반짝한게 낫기 때문일 것이다.


서래는 평생을 모호함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경계, 불법체류자, 수차례 바뀌는 남자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노인들 돌보기, 정착되지 않은 옷차림과 머리스타일.... 하지만 그녀의 불안정함은 해준과는 다르다.


그녀는 그처럼 마주하고 차차 풀어나가려하는 것보단 아예 그것들을 종결시켜버린다.


그녀의 잔혹하고도 과감한 결단력들은 항상 수없는 사건들로 이어진다. 풀고 싶은 사건을 항상 짊어지고 있는 서래를 만나며 그녀를 향한 해준의 눈은 항상 반짝반짝해진다. 반짝반짝을 넘어 푹 빠진다. 펜타닐같은 중독을 느끼고, 그녀가 있어야만 숙면을 취한다.


서래는 본인의 인간만도 못한 전남편들과 달리 마치 우아함을 한껏 장착한 기사같은 해준의 기사도 정신에 빠져 그의 습관까지 추종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닮았으나 분명 다르다. 그래서 서로에게 이끌렸다. 그들의 불안정은 흐릿할까? 흐물흐물할까? 연약할까? 아니다 외피와 결단력으로 불안정을 포장하여 매우 단단하다. 너무 단단해서 서로의 끌림은 강한 충격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먼저 부딪친 해준은 붕괴한다.


붕괴 이후 둘은 이전의 본인들의 모습과 달리 정반대 서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해준은 이포로 돌아가 주말부부를 청산하였고, 완벽하던 외피는 점점 부식하고 있다. 반면 서래는 화려한 외피로 둘러싸며 해준의 곁을 이전의 그처럼 빙빙 맴돈다. 해준은 겨우 헤어질 결심을 하였는데, 서래의 사랑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서래는 그의 곁을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만 아슬아슬 스치려고만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해준과 맞닥뜨린다. 이미 한차례 붕괴했던 그가 자신과 또 부딪친다면... 항상 꼿꼿했던 서래는 아찔해진다. 서래는 결단력을 내린다. 숨이 아직 붙어보이는 남편을 살해하는 것. 언제나 살인사건은 해준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줬었다. 이거라면 해준은 붕괴하지 않지 않을까?


단발의 생기를 불어넣어주기엔 충분한 살인사건은 해준에게 영원한 반짝반짝함을 안겨주기엔 충분치 않다. 서래는 '마침내' 결심한다. 그에게 영원한 '미결'을 선물하기로.


바스켓을 들고 그가 반짝반짝함을 꽤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모래를 깊게, 과감하게 퍼낸다. 그리고 그 구덩이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꼿꼿하게 서있는다. 어쩜 서래는 죽음 앞에서도 꼿꼿하다 싶겠지만 이미 그녀는 붕괴된지 오래다. 해준을 생각할 때마다, 습관을 따라할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스칠 때마다 본인에게 금이 가고 있었음을 서래는 느끼고 있었을까?


커다란 바위가 파도에 부서지고 부서져 모래알갱이가 된 것처럼 서래는 그 모래알갱이들 속에 헤어질 결심을 굳게 품고 마침내 잠겨버린다.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은 거센 파도가 덮쳐도 더이상 붕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래처럼 꼿꼿해 보인다.

이것이 아마 서래가 해준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그리고 사랑이다.




덧붙이기.


불안정은 불안정을 알아보는 법. 그래서 서래랑 해준은 서로 이끌렸다. 해준의 아내도 불안정한 사람이긴하다. 하지만 그녀는 해준과는 결이 매우 다른 사람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빈틈 없으며 심지어 그래야만하는 원전에서 일한다. 그런 그녀는 유일하게도 성생활, 부부관계에 대한 불안정함이 존재한다. 해준과 서래는 단단한 결을 가진 불안정함이라면 해준의 아내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 완벽한 자신의 유일한 틈새인 불안정함을 끈적끈적한 무언가로 그저 메꿔버리려는 것 같다. 그건 결국 집착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녀는 본인과 결이 맞는, 이전 결혼 생활에서 섹스리스였던 이주임에게 떠나버린다. 물고 늘어지는 자라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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