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할 땐 그냥 하는 게 답이다
첫 하프 마라톤 기록
대회가 다가올수록 ‘내가 왜 하프를 신청했지?’ 싶었다. 분명 마음속에서 하프는 천천히 준비해서 가을쯤 나가보자는 마음이었다. 근데 띠링- 구리 유채꽃마라톤 문자가 왔고, 구리면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서 갈만한데? 근데 또 10K 돈 내고 뛰긴 아깝고, 그냥 하프 질러버려? 대략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분명 이건 욕심이었다. 근데 아직은 내가 겪어봐야만 이게 실수라는 것도 아는 중생인데 어찌하랴.
사실 지난달만 해도 한강에서 혼자 16K를 뛰어봤던지라, 하프를 뛸 수는 있겠다고 생각은 했다. 근데 그 이후로 다시 한번 장거리 러닝을 마음먹고 나갔을 때는 뭔가 힘들어서 그냥 4킬로 정도만 뛰고 돌아서 8K를 채워 마무리했다. 그때 두려움이 확 밀려왔다. ‘이래서 21K는 어떻게 뛰지?..’ 그리고 그냥 평소처럼 2K, 3K씩 매일 꾸준히 뛰다 보니 하프마라톤이 다가왔다.
불안감이 크다 보니 괜히 이것저것 쇼핑을 했다. 에너지젤, 무릎보호대를 미리 사놓고 준비해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온음료, 빵, 바나나를 챙겨 먹고 스트레칭을 했다. 6월에 있을 트레일러닝을 대비해서 산 베스트(조끼)를 입고 나갔다. 베스트가 있으면 괜히 짐을 보관해서 플라스틱비닐을 안 쓸 수 있고, 물품보관하고 찾는 시간도 절약하고 좋을 것 같았다.
대회장에 도착해서도 불안감은 남아있어서 의료부스에 가서 다리에 파스를 뿌리고, 포도당캔디를 먹었다. 워밍업 겸 5분 정도를 뛰어주고 출발선에 섰다. 처음이니 뒤에 서는게 맞겠지만, 뒤에 섰다 가는 너무 뒤처질까 봐 앞으로 가서 서있었다. 10K 대회에서의 신나고 설레는 마음이 아니라 불안한 마음이 컸다. 분명 언니한테 어제까지만 해도 “할 수 있을까? 근데 못 뛰면 못 뛰는 거지 뭐. 짐도 안 맡 길거고 카드 들고 가니까 못 뛰겠으면 그냥 택시 타고 돌아오지 뭐.”라고 쿨하게 말해놓고, 이렇게 긴장되는 거 보니 아마도 나는 완주를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보다. 출발선 앞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안할 때는 그냥 하는 거야.'
드디어 출발, 앞 선수들이다 보니 다들 페이스가 빨랐다. 그 사이에서 초반에 내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고 계속 속도를 낮추었다. 근데 10K 대회와는 너무 다르게 계속해서 끝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갔다. 그럴수록 ‘내가 지금 너무 못 뛰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계를 보니 전혀 아니었다. 보낼 사람들을 얼른 보내고 내 속도로 뛰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무지 완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5K까지는 쉽게 뛰었다. 10K 참가자들이 반환점을 돌고 하프 참가자들이 직진을 하면서부터 진짜 달리기가 시작됐다. 갑자기 사람들이 확 빠지면서 조금은 고요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또 약간은 두려웠다. 여기서부터 16킬로를 더 가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까마득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단 10킬로 까지는 괜찮잖아. 10킬로까지만 바라보고 가보자’
그리고 드디어 10킬로를 지나서 반환점, 이미 힘든데 아직 반밖에 안 왔다는 생각에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덮쳐왔다. 일단 그냥 생각 없이 뛰려고 노력했는데, 11킬로 그리고 12킬로, 이쯤에서는 정말 그만 뛰고 앞에 보이는 그늘에 있는 의자에 앉고 싶었다. 정말 그만 뛰고 싶었다. 근데 여기서 걸으면 그냥 끝나버릴 것 같았다. 정말 다시 뛰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계속 뛰었다. 급수대에서 주는 방울토마토를 4개 정도 집어 들어 하나씩 먹으며 뛰었는데 정말 꿀맛이었다. 다행히 나약해진 내 정신과는 달리 내 두 다리는 자동적으로 움직여주었다.
그리고 13킬로, 14킬로 1킬로가 이렇게 길었나? 나머지 거리동안 노래로 에너지 좀 얻어보자 싶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틀었다. 그래도 14킬로를 넘어서 15킬로에 왔을 땐 ‘그래, 5킬로만 더 뛰자(사실은 6킬로인데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다..) 5킬로는 쉽잖아?’라고 다독이며 계속 뛰었다. 아니 도대체 풀마라톤은 어떻게 뛰는 거지?
16킬로, 17킬로.. 정말 고지가 눈앞이었다. 준비해 둔 에너지젤도 꺼내서 하나 먹고 할 수 있는 건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었다. 중간중간 물, 이온음료를 충분히 먹어준 것 같은데도 햇볕이 강해서 몸이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전광판에 온도는 26도라고 쓰여있었다. 조끼에 담아 온 플라스크(물통)의 물을 몸에 뿌렸다. 시원했고, 그 힘으로 1킬로를 더 갔다.
18킬로, 19킬로.. 정말 빨리 통과해서 그늘에 누워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이미 나는 내 이전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18킬로라니. 다행히 전에 16킬로쯤 뛸 때 뻐근해오던 고관절은 괜찮았다. 그리고 20킬로에 진입했을 땐 정말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지막 1킬로를 힘을 더 내서 빨리 뛸 에너지는 없었다. 달리던 속도를 유지해서 계속해서 달렸다.
귀에서 마침 <Try everything> 노래가 나온다.
No I won't leave I wanna try everything
I wanna try even though I could fail
I won't give up no I won't give in
Til I reach the end and then I'll start again
No I won't leave I wanna try everything
I wanna try even though I could fail
그런데, 1킬로가 이렇게 길었나. 피니시라인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동네 한 바퀴 뛸 때는 1킬로가 금방인데.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나타난 결승선. 드디어 통과 후 물을 한 병 받아서 벌컥벌컥 마신다. 곧바로 주저앉고 싶지만 얼른 기념품과 메달을 받으러 간다. 그 와중에 설문조사하면 준다는 마사지크림도 받고, 파파존스 후원으로 사람들은 줄 서서 피자도 받고 먹지만 그 줄을 기다릴 에너지는 없고, 지금 피자가 당기지도 않는다. 드디어 기다리던 앉기 타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몸에 물을 뿌린다.
그리고 도착한 기록 문자, 1:58:42. 한 시간 58분. 내가 하프를 두 시간 안에 들어올 거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2시간 30분 정도 걸리려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두 시간 이내에 들어오다니. 그것도 놀라운데 여자 하프 참가자 110명 중 21등이라는 순위가 뜬다. 생각보다 너무 높은 순위에 얼떨떨하다. 21킬로가 정말 엄청난 거리라는 압박감이 있었는데, 이렇게 나의 한계선이 조금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최근 읽기 시작한 책 말머리에 이런 글이 있었다.
"자신을 독려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지만 노력이 지나치면 퇴보한다. 현재의 위치와 하는 일에 따라 한계라는 것도 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순간은 항상 일종의 시작이다."
<마음에 대해 달리기가 말해주는 것들_사쿙 미팜>
나는 오늘 새로운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