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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민 Feb 19. 2021

백수에게 이런 건 묻지 마세요

<후아유> 형태의 한 마디

"무슨 일 하세요?" "요즘 뭐 해?"


최근 내가 듣는  번째로 곤란한 질문이다. (물론  번째는 "언제 결혼해?"  이야기는 추후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하자.) 현시점에선 "놀아요" 가장 적확한 대답이지만, 서른 하고도  이나 더 먹은 이 나이에 논다니. 그렇다고 그럴싸한 거짓말로 둘러대기도   하고. 그저 난감한 노릇이다. 이쯤 되어 돌아보니 나는  번도 소속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유치원을 지나 초·중·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22년간 학생이었고, 운 좋게도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을 해 하루의 틈도 없이 직장인이 되었다. 사회생활 8년 차에 퇴사 후 영국으로 떠났지만 영어공부를 한다는 명목 하에 다시 학생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또 곧바로 취업을 해 다시 직장인. 무슨 일을 하냐는 누군가의 질문엔 항상 준비된 답이 있었다.




바야흐로 2002년 봄, '네트워크 세대의 새로운 사랑법'을 그린 센세이셔널한 영화가 개봉했다. 조승우와 이나영의 리즈 시절 얼굴을 볼 수 있는 영화 <후아유>가 바로 그것. 요즘으로 치면 극 중 둘은 본캐와 부캐를 각각 가지고 있는데, 조승우는 게임기획자 형태이자 게임 속 캐릭터 멜로, 이나영은 수족관 다이버 인주이자 게임 속 캐릭터 별이다.


줄거리는 대략, 게임을 통해 알게 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온라인을 넘어 현실에서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언뜻 이것만 보면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어리둥절할 수도 있는데, 영화 중반부쯤 이런 장면이 나온다. 형태가 인주의 기분전환을 위해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하고, 한강을 바라보며 달리던 중 차창 너머의 청담대교를 보며 말한다.



형태: 청담대교. 저 다리 폭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27m에 총연장 1.2km, 다리에 들어간 철근이 18,000톤, 콘크리트가 12만 평방미터, 연 동원 인원이 57만 2천 명이나 됩니다.

인주: 여자 꼬실 때 쓰려고 외웠죠?

형태: 하 참, 나 백수 시절에 컴퓨터로 저 다리 시공 시뮬레이션했어요. 알바로.

인주: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 백수였는데. 글쎄 2년 동안 아무도 안 써 주는 거 있죠.

형태: 백수, 그거 참 할 만한 건데. 나는 누구인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니까.




외국에는 갭이어(gap year)라는 것이 있다. 학업을 잠시 중단하거나 병행하면서 봉사, 여행, 진로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활동을 체험하며 흥미와 적성을 찾고 앞으로의 진로를 설정하는 기간을 말하는데, 19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도입하여 시행 중이다. 찾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부터 갭이어 체험을 지원 중이라고 한다.


보통 해외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 진학 전 갭이어를 갖는다. 이런 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건 영국에 있던 스물아홉 살 때였다. 같이 어학원을 다니던 십 대 새파란 아이들 중엔 갭이어로 온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일단 문화적으로 1차 충격을 받았고, 이어 곧바로 부러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라떼는 말이야. 떠밀리듯 적성을 끼워 맞추고 억지로 진로를 찾거나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 전공을 선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거야.' (내 이야기다 이건. 아닌 친구들도 많다 물론.)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데 시간이 걸렸고, 알고 난 후로도 그것을 나의 업으로 만들기 위해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경우엔 일단 대학 졸업을 위해 소질도 없는 전공 수업을 꾸역꾸역 듣고 학점을 만들어야 했다. 남는 시간엔 도서관에 가 영화 관련 책을 읽고 혼자 끼적거리는 것이 전부였고. 스마트폰도 없고 정보도 지금처럼 넘쳐나지 않던 시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서두에 서술했듯 어찌어찌 운 좋게 취업을 했고 그 뒤로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시간은 또 어찌나 재빠르던지.


얼마 전 세 번째 다닌 회사를 퇴사했다. 사표를 내게 된 과정까지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지만, 결론적으로 목적 없이 그만둬버린 것은 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토록 완연한 백수는 처음인 것이다. 이제야 시간이 생겼다. 내가 누구인가 생각해볼 시간이. 올해는 내가 나에게 주는 갭이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올 한 해 나에 대해 지독하게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답이 나왔다. 이젠 누가 "요즘 뭐해?"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


"나는 누구인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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