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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망하면 어떡해?

<미스 리틀 선샤인> 올리브와 할아버지의 대화

by 지민

또 시작이다. 적어도 일에 있어서는 더 이상 새로운 시작은 없겠다 싶었는데, 참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올 1월 말에 퇴사를 했고, 잠시 쉬어간다는 어쭙잖은 명목 하에 어영부영 세 달이 훅 갔다. 마냥 놀고 싶으면서도 매달 코밑으로 들이치는 카드값에 그럴 수가 없어 앞으로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나 고민을 참 많이도 했다.


몇 날을 잠도 제대로 못 잔 적이 있다. 달이 차고 기우는 와중 끝없이 차오르던 의구심. ‘이 길이 맞을까? 이걸 하는 게 맞는 걸까? 무얼 해야만 할까? 내 인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쉼표도 없이 이어지는 끝없는 물음표에 묻는 사람만 있고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어느 날 밤엔 꿈을 꿨다. 이게 꿈인지, 꿈이 아닌지, 꿈에서 깼는지 모르겠던 밤이었다. 아니, 밤인지 낮인지 그것도 아니면 새벽인지 동틀녘인지도 모르겠던 밤. 새까만 기름을 부어놓은 듯 아주 칠흑 같고 찐득한 어둠이 온통이었고, 그 가운데 내 키보다도 큰 물음표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눈을 떠서도 감아서도 물음표 투성이. 내가 물음표인지, 물음표가 나인지 모르겠던 호문지몽의 경지.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아니 무엇도 맞지 않는 건 아닐까. 끈적하고 까만 어둠 속에 홀로 물음표를 올려다보며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또 현실에서도. 달은 차고 기울고 또 찼지만 물음표는 늘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지난 세 달은 내게 이랬다.





올리브: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올리브: 나 예뻐요?

할아버지: 올리브,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단다.

올리브: 그냥 하는 말이죠?

할아버지: 아니! 할아버지는 너를 정말 사랑해. 네가 똑똑하고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쁘기 때문에 사랑한단다. 내면과 외면 모두가 말이야.

올리브: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올리브: 저는 실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할아버지: 너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올리브: 아빠는 실패한 사람을 싫어하잖아요.

할아버지: 잠깐만. 실패자가 뭐라고 생각해? 진짜 실패자는 지는 게 두려워서 도전조차 안 하는 사람이야. 넌 지금 도전 중이잖니, 안 그래?

올리브: 맞아요.

할아버지: 그럼 넌 실패자가 아니야. 내일 재미있을 거야, 그치?




<미스 리틀 선샤인>은 개인적으로 참 귀여워하는 영화 중 한 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 하나 딱히 정상적인 구석이 없는 콩가루 집안의 막내딸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슬린)다.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통통한 체구의 올리브는 유난히 미인대회에 집착하는 7살 난 꼬마 아이다.


어느 날 올리브에게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인대회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 출전 기회가 찾아온다. 올리브는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막내딸의 일생일대 소원을 위해 온 가족은 낡은 노란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박 2일의 여정 끝에 마침내 다가온 미인 대회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올리브는 할아버지를 불러 세워 묻는다. 일곱 살 소녀의 마음에 찾아온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서른이 넘은 내 마음에 찾아온 것과 몹시도 닮아있었다.


몇 달간의 지독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일에 대한 플랜을 대강 A, B, C로 나누어 세웠고, 그 옵션들 중에 실패는 없었다. 대강 계획은 세워놓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문득 현실이 다가와 강하게 물었다. “정말? 없어?” 그 날을 기점으로 두려움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한 달에 백만 원도 벌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니, 십만 원도, 아니, 마이너스가 되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분야인 만큼 내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일보다 열과 성을 다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 발치에 겨우 닿을까 말까다. 어중간한 각오로 뛰어들었다간 그나마 손에 쥐고 있던 것도 잃고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요동쳤다.


올리브가 할아버지에게 그랬듯 엄마를 붙잡고 물었다. “엄마, 나 망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돌아본 엄마는 수심 가득한 내 얼굴을 보곤 초연하게 대꾸했다. “망하면 어때? 엄마랑 가게 하면 되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무슨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니 그것이 더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었다.


지난 수개월 나를 괴롭혔던 물음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는 더 많은 물음표에 부딪히게 될 일이 많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아무 도전도 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침잠되어 버린다면 나는 실패자가 될 것이다. 지금 난 통장이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도전하고 있고, 이것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적어도 실패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망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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