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민 May 12. 2021

엄마, 나 망하면 어떡해?

<미스 리틀 선샤인> 올리브와 할아버지의 대화

또 시작이다. 적어도 일에 있어서는 더 이상 새로운 시작은 없겠다 싶었는데, 참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올 1월 말에 퇴사를 했고, 잠시 쉬어간다는 어쭙잖은 명목 하에 어영부영 세 달이 훅 갔다. 마냥 놀고 싶으면서도 매달 코밑으로 들이치는 카드값에 그럴 수가 없어 앞으로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나 고민을 참 많이도 했다.


몇 날을 잠도 제대로 못 잔 적이 있다. 달이 차고 기우는 와중 끝없이 차오르던 의구심. ‘이 길이 맞을까? 이걸 하는 게 맞는 걸까? 무얼 해야만 할까? 내 인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쉼표도 없이 이어지는 끝없는 물음표에 묻는 사람만 있고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어느 날 밤엔 꿈을 꿨다. 이게 꿈인지, 꿈이 아닌지, 꿈에서 깼는지 모르겠던 밤이었다. 아니, 밤인지 낮인지 그것도 아니면 새벽인지 동틀녘인지도 모르겠던 밤. 새까만 기름을 부어놓은 듯 아주 칠흑 같고 찐득한 어둠이 온통이었고, 그 가운데 내 키보다도 큰 물음표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눈을 떠서도 감아서도 물음표 투성이. 내가 물음표인지, 물음표가 나인지 모르겠던 호문지몽의 경지. 이게 맞을까, 저게 맞을까, 아니 무엇도 맞지 않는 건 아닐까. 끈적하고 까만 어둠 속에 홀로 물음표를 올려다보며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꿈속에서도 또 현실에서도. 달은 차고 기울고 또 찼지만 물음표는 늘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지난 세 달은 내게 이랬다.





올리브: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올리브: 나 예뻐요?

할아버지: 올리브,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단다.

올리브: 그냥 하는 말이죠?

할아버지: 아니! 할아버지는 너를 정말 사랑해. 네가 똑똑하고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예쁘기 때문에 사랑한단다. 내면과 외면 모두가 말이야.

올리브: 할아버지

할아버지: 응?

올리브: 저는 실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할아버지: 너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

올리브: 아빠는 실패한 사람을 싫어하잖아요.

할아버지: 잠깐만. 실패자가 뭐라고 생각해? 진짜 실패자는 지는 게 두려워서 도전조차 안 하는 사람이야. 넌 지금 도전 중이잖니, 안 그래?

올리브: 맞아요.

할아버지: 그럼  실패자가 아니야. 내일 재미있을 거야, 그치?




<미스 리틀 선샤인>은 개인적으로  귀여워하는 영화   편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 하나 딱히 정상적인 구석이 없는 콩가루 집안의 막내딸 올리브(아비게일 브레슬린)다.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통통한 체구의 올리브는 유난히 미인대회에 집착하는 7살 난 꼬마 아이다.


어느  올리브에게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리는 어린이 미인대회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 출전 기회가 찾아온다. 올리브는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막내딸 일생일대 소원을 위해  가족 낡은 노란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박 2일의 여정 끝에 마침내 다가온 미인 대회 전날 . 잠자리에 들기  올리브는 할아버지를 불러 세워 묻는다. 일곱 살 소녀의 마음에 찾아온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서른이 넘은 내 마음에 찾아온 것과 몹시도 닮아있었다.


몇 달간의 지독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일에 대한 플랜을 대강 A, B, C로 나누어 세웠고, 그 옵션들 중에 실패는 없었다. 대강 계획은 세워놓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문득 현실이 다가와 강하게 물었다. “정말? 없어?” 그 날을 기점으로 두려움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한 달에 백만 원도 벌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니, 십만 원도, 아니, 마이너스가 되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분야인 만큼 내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일보다 열과 성을 다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 발치에 겨우 닿을까 말까다. 어중간한 각오로 뛰어들었다간 그나마 손에 쥐고 있던 것도 잃고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요동쳤다.


올리브가 할아버지에게 그랬듯 엄마를 붙잡고 물었다. “엄마, 나 망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돌아본 엄마는 수심 가득한 내 얼굴을 보곤 초연하게 대꾸했다. “망하면 어때? 엄마랑 가게 하면 되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무슨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니 그것이 더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었다.


지난 수개월 나를 괴롭혔던 물음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는 더 많은 물음표에 부딪히게 될 일이 많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아무 도전도 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침잠되어 버린다면 나는 실패자가 될 것이다. 지금 난 통장이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도전하고 있고, 이것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적어도 실패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망해도 괜찮다.

작가의 이전글 인스타그램을 끊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