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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민 Jun 27. 2021

부산 한 달 살기 끝에서 홀로서기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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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또 도졌네.” 아빠가 그랬다. “말린다고 안 갈 거 아니잖아.” 그렇지. 말린다고 안 갔을 거였음 12년 전에 미국도 안 갔을 터. 지난 몇 달은 한창 스트레스로 피부가 다 뒤집어져 야단이 난 시기였다. 그런 날더러 엄마는 “그 돈으로 피부과나 가” 하더니 이내 태세를 전환해 “가서 기분 전환하고 피부 좋아져서 와” 하고는 말았다. 그 길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귀국한 후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아니, 쓸 일이 없었던 28인치 캐리어를 꺼내 화장대 위와 옷장을 쓸어 담았다. 떠나는 날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아침 9시 56분. 단 돈 3만 원이라도 아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역에 도착해 무궁화호를 탔다. 부산역에 내리니 거진 오후 4시. 도착 후 올라가는 티켓은 KTX로 끊었다. 어쨌거나 드디어 왔다. 왜 왔냐고? 미래를 찾으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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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어서 나쁜 점 두 가지. 하나, 밥 먹을 때 메뉴를 하나밖에 못 시킨다. 감자탕이나 곱창 같은 기본 2인분 음식은 시키지도 못한다.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다. 둘,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한껏 수다를 떨고 나면 목이 아프다. 혼자 있으면 말할 일이 없으니 내가 말을 안 하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간만에 성대를 쓰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거 참, 성대도 안 쓰면 녹이 스는구나.


혼자 있어서 좋은 점 여러 가지 중 하나. 나에 대해 쓸데없이 탐구할 시간이 많아진다. 이번엔 내가 뭘 잘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난 ‘몰아보기’를 정말 잘한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그랬다. 스무 살 무렵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프렌즈> 전 시즌을 다 봤고, <해리 포터>를 독파하며 뜨는 해와 함께 잠들었다. 그리고 난 의외로 아픈 걸 잘 참는다. 몸의 통증도, 마음의 고통도. 이건 좋은 점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가. 어쨌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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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내려온 지 2주일 하고도 반이 지났다. 그동안 6명의 친구들을 만났다. 날 보러 서울에서, 수원에서, 울산에서 부산으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와 준 사람들. 물론 여행이나 쉼 등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왔을 터이지만, 나를 보기 위함도 그 목적들 중 하나라는 자체가 고마웠다. 6월 중순 부산의 날씨처럼 그 마음들이 참 따뜻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거나, 나처럼 잠깐 스쳐가거나, 고향을 뒤로하고 부산에 눌러앉은 사람들이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각자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었지만, 부산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묘한 유대감이 느껴지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같이 보낸 시간은 비교적 짧았음에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늘 마지막엔 평생을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헤어짐을 아쉬워하지만 그들은 곧 나를 잊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나 없는 일상을 영위할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그렇듯 그 작별의 순간만은 진심임을 알기에. 아무 연고도 없던 곳에 내가 오면 반겨줄 사람들이 생겼다. 혼자가 되러 온 시간인데 되려 사람들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인생은 늘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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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 지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전엔 혼자 무언가를 잘할 줄 안다는 것이 잘 지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혼자서도 밥을 잘 먹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혼자 전시회를 보러 다니고, 혼자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혼자 여행을 잘 다니는 것. 할 줄 몰랐던 것들이라, 아니, 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라 몰랐는데, 이런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외로움의 방을 지니고 있다. 그 방의 크기가 저마다 다를 수는 있어도 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방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잘 채우고 정돈해 놓는 것. 그래서 혼자이고 싶은 시간이 왔을 때 언제든 기꺼이 들어갈 수 있고, 그곳에 혼자 남겨진 시간이 와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 그리하여 내 안의 외로움을 혼자 잘 다스릴 줄 알게 되는 것. 그게 혼자 잘 지낸다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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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마지막 날이다. 29박 30일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잘 놀았고, 잘 먹었고, 잘 돌아다녔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 안의 방을,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던 그 방을 잘 돌아보고, 정리하고, 버릴 건 버리고, 채워야 할 것들로 가득 채운 날들이었다는 것이다. 늘 물렁해서 문제였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졌다. 더불어 올 한 해 내내 해온 ‘나 자신 똑바로 들여다보기’를 마음껏 하고 왔다.


부산에 온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미래였다. 새로운 분야로의 도전과 두려움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찾았냐고 묻는다면, 찾았다. 진부하지만,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 답을 찾는 지름길이었다. 내 안의 정의가 확립되자 불과 지난달까지 나를 끝없이 괴롭히던 의구심이 걷혔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손 끝을 바삭바삭하게 만드는 햇빛이 별안간 쏟아지는 기분. 비 온 뒤 맑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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