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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Apr 16. 2023

'한전채'라는 사건의 지평선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윤하 「사건의 지평선」 中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공부해 본 적이 있는가? 개념이 생각날 듯 말 듯 알쏭달쏭하실지 모르겠다. 그러면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란 개념은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 가수 윤하의 노래 말고. 


사건의 지평선 /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인간의 시각은 빛을 통해 작동한다. 물체에 반사된 빛이 눈의 시신경을 자극하고, 뇌는 그 전기신호를 분석해 세상을 지각한다. 


그런데 인간이 볼 수 없는 물체가 있다. 바로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엄청난 질량이 좁은 공간에 집중된 천체다. 만유인력 법칙에 따라 질량이 크면 중력이 커진다. 블랙홀은 시공간을 비틀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중력을 자랑한다. '속도의 상한선'인 빛의 속도마저 압도한다.


그렇다. 블랙홀은 빛을 빨아들인다.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 빛은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기에 우리의 시신경을 자극할 수 없다. 눈으로 블랙홀을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전 물체를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점이 사건의 지평선이다.


노래가사 중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빛'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별을 표현한 것일 테다. 별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짜낸 마지막 빛이다.


■채권시장에도 한전채라는 블랙홀이 있다


"역대급 적자를 버티지 못한 한국전력공사가 한전채를 쏟아내면서 한전채가 또다시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여기에 세수가 부족한 정부가 국채 발행을 늘릴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려운 개념이긴 하지만 금융시장에선 나름 핫한 이슈다. 


한전채란 한국전력공사가 발행하는 채권이다. 채권은 돈을 빌릴 때 발행하는 증서다. 얼마를 빌려주면 언제까지 얼마의 이자를 지급해 갚겠다는 내용이 적힌 유가증권 말이다.


채권 발행은 국가나 기업 등이 돈을 마련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국가가 발행하면 국채, 회사가 발행하면 회사채 이런 식이다.


특히 기업 입장에서 회사채 발행은 자금을 시장으로부터 직접 조달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그런데 한전채나 국채가 자금 '블랙홀'이 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란 말일까?


그건 바로 채권 시장에서 현금이 한쪽으로 몰리면서 신용도가 낮은 일반 기업은 심각한 돈가뭄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번 글을 통해 한전채라는 '슈퍼 매시브 블랙홀'에 대해 알아보자.


■물가 상승 우려에 전기요금 못 올리는 한전, 밑 빠진 독 채우기에 남발되는 한전채


올해 1월부터 현재까지 한전은 총 9조3500억원 어치 한전채를 발행했다. 1분기(1월~3월) 규모로 따지면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약 17% 늘었다. 


한전은 어디에 급전이 필요하길래 채권을 이리 찍어대는 걸까? 지난해 발생한 역대급 적자 30조원을 메우기 위해서다.


한전 적자의 이유는 생산 단가에 미치지 못하는 전기요금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한전이 국회에 제출한 적정 전기요금 인상액은 ㎾h당 51원 수준이다. 지난 1분기에 4분의 1 정도인 13.1원을 올렸지만 아직 4분의 3이 모자란다.


한전이 적자에도 불구하고 전기요금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물가 때문이다.


지난달 국내 소비자물가상승률은 4.2%고 여기서 변동성이 큰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0%로 집계됐다. 


이전보다 물가상승률 둔화 폭이 가팔라지긴 했지만 물가상승률 목표치인 2%보다는 훨씬 높은 실정이다. 


게다가 물가의 상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들이 아직 많다. 국제유가가 OPEC+ 움직임에 따라 상승할 가능성이 있고 공공요금 인상도 우려스럽다. 


전기요금이 오르면 가정이나 산업체에서 내야 할 전기요금이 오를 뿐만 아니라 재화의 생산단가도 오르게 된다. 


당정이 전기요금 인상을 최대한 미루는 이유다. 물가가 올라 국민 여론이 나빠지면 정치적으로도 좋을 게 없다.


전기요금을 인상하지 못하는 한전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엔 임금을 조정하겠다는 뉴스도 나왔는데 조족지혈일 것이다.


채권을 발행해 현금을 모으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는 거다.


■ AAA등급 한전채, 그런데 이자도 잘 쳐줘!?


그런데 여기엔 부작용이 따른다. 


한전채는 '특수채'로 분류된다. 신용등급이 '트리플 A'다. 한전 채권이 부도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자는 솔찬하다. 현재 한전채 표면금리는 4% 안팎에서 형성돼 있다.


현재 시장금리가 하향 추세로 전환하면서 기준금리인 연 3.50%보다 낮은 예적금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한전채에 투자하면 돈 잃을 염려도 없고 이자도 더 많이 쳐준다.


꽤 매력적이지 않은가! 한전채에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4월 한전채 발행 상황/금융투자협회 채권정보센터 화면 갈무리

게다가 요새는 모바일뱅킹이 너무 잘 개발돼 있어서 스마트폰 터치 몇 번이면 채권을 살 수 있다. 금리 하락 시기인 만큼 채권 투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토스뱅크 내 채권 투자 화면 갈무리

그런데 이런 초우량 한전채가 쏟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떨어지는 일반 기업 회사채는 소외된다.


표면금리는 일반 회사채가 한전채보다 높지만 요즘처럼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안이 큰 때는 주목받기 쉽지 않다. 회사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절이니까.


최선의 투자는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라 최대한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실제로 지난달 A급 회사채 미매각률은 26.7%로, 지난해 같은 기간(17.1%) 대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레고랜드 사태 때의 돈 가뭄 악몽 재발할 수도…근본 해결책은?


'밑 빠진 독' 적자를 채우기 위해 전기요금 인상을 미루고 채권을 찍어내는 대응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관측도 나온다.


통화당국 수장인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1일 "한전채가 계속 많이 발행되면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전기요금을 어느 정도 인상해서 문제에 대응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 문제는 전기요금을 올려야 해결되는 일이란 말이다. 시기와 인상 폭이 문제일 뿐

/토스뱅크 내 채권 투자 화면 갈무리

그런데 여기에 설상가상 부족한 세수 20조3000억원을 채우기 위해 국고채 발행이 확대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나랏일에 필요한 현금을 만들기 위해 채권을 찍어 판다.


국고채 발행량은 직전 해에 예산안을 확정할 때 정해지고, 발행량을 늘리는 건 국회의 허락을 받아야 해서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부족한 세수는 어떤 방법으로든 채워야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정책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결국 국고채 발행일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고금리·고물가로 이미 흔들리는 기업들 앞에 블랙홀이 하나가 아닌 둘이 버티고 서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아스라이 하얀빛만을 남기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전기요금 현실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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