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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May 20. 2023

한국은행의 '쌍둥이 헤르미온느'

해리포터 「아즈카반의 죄수」 편을 보면 헤르미온느 그레인저가 동시에 진행되는 수업 여러 개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그에겐 '미스터리부(Department of Mysteries)에서 만든 '타임 터너'가 있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9월 24일에 치러진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 입사 필기시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A씨가 두 회사 필기시험에 모두 붙은 것이다.


A씨가 호그와트 재학생이고, 현실에서의 취업을 위해 잠깐 나왔다가 유혹을 이기지 못해 헤르미온느처럼 타임 터너라도 쓴 것일까?


아니다. A는 헤르미온느처럼 똑똑한 것은 맞지만 우리와 같은 머글이다. 대신 자신과 똑같이 똑똑한 쌍둥이 형제 B를 이용했다. 위즐리 쌍둥이 형제에 비유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시기는 5월 초쯤부터다.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두 시험장에 있었다'는 목격담이 나왔다는 건데, 아마 A를 아는 무리가 각각 A를 보고는 "A가 한은 시험 치러 왔더라" "무슨 소리야 A는 금감원 시험장에 있었는데?"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한은과 금감원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모 언론사 기사에 따르면 5월 둘째 주쯤 기자가 한은에 문의할 때까지만 해도 담당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에선 별별 일이 다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대리시험 의혹도 나온다'라고 기자가 담당자에게 재차 확인을 부탁했더니 "그런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확인하느냐"라고 대꾸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부터 소문이 쫙 퍼졌나 보다. 직장인 익명 앱 블라인드에도 그렇고 서울대학교 에브리타임에도 관련 글이 올라왔다. 서울대에선 "후배님들 적게 들어오기 시작해서 퀄(리티) 떨어지니까 별 희한한 일이 생기네"라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자 한은은 이달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감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사실로 밝혀져 부랴부랴 17일 보도자료를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쌍둥이 형 B가 A 대신 금감원 1차 필기시험을 쳐 합격했고, 이후 진행된 금감원 2차 필기시험과 1차 면접전형에는 A가 응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한은은 현행 채용 시스템상 본인 확인 절차를 충실히 진행했다고 강조했다.


A는 한은 채용 과정만큼은 본인이 직접 응시했다고 진술했고, 한은은 매 단계마다 신분증 및 필적을 통해 동일인 여부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대리 시험 발생 기관은 금감원이지, 한은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읽힌다.


하지만 이는 A와 B의 진술일 뿐 경찰 수사에 따라 다른 사실관계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한은과 금감원은 이날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A와 B를 고발했다. 


그리고 한은은 "유사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대리시험 등 부정행위를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라고 했다.


'불가능한 얘기'같아 보여도 현실은 언제나 더 극적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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