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금융시스템이 흔들릴 정도로 위기가 발생한 경우, 금융회사들은 두 부류로 구분된다. 채무지불 능력이 없는 한계기업과, 정상적인 상태임에도 단순히 단기 유동성이 부족해진 기업들이다.
한계기업은 파산하도록 두는 것이 시장경제 논리에 부합한다 하더라도 후자의 경우는 고민이다.
홍수가 났다고 치자. 뛰어난 수영선수인 후자의 기업들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구조하러 오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체력이 바닥나 물에 가라앉을 것이다.
급격한 금융시장 변화로 유동성 경색이 일어날 경우 정상적인 금융회사(뛰어난 수영선수)에 선제적으로 자금을 수혈해 살려내자는 것이 '금융안정계정'이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법안이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이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예금보험위원회 의결에 따라 금융안정계정 부담으로 금융회사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금융회사가 채권을 발행하면 이를 지급보증하는 방식이다.
금융안정계정 필요성은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로 단기 자금시장이 경색된 이후 필요성이 제기됐다. 정부는 올해 상반기 도입을 목표로 지난해 12월 중순 예금자보호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현재 위기 대응제도는 부실 발생 이후 사후적 안정성 확보 중심이기 때문이다. 정상금융회사의 부실이 우려되는 경우 등 사전적인 대응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금융산업은 상호 연계성이 높기 때문에 정상적인 금융회사의 위기는 금융시장 전체로 확산될 우려가 크다.
이런 와중에 지난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스마트폰 뱅크런'으로 36시간 만에 파산하면서 금융안정계정 필요성이 재차 부각됐다.
금융당국은 개정안 도입에 힘쓰겠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지난 4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도 금융안정계정 도입을 주요 추진 과제로 꼽았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단기적으로 예상보다 유동성이 빨리 고갈되는 상황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대응할 것인지에 초점을 두고 제도를 개선하겠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2월 국회 정무위원회에 상정된 안건은 여전히 계류 중이다.
표면적으로는 금융안정계정 재원과 관련해 이견이 맞부딪히고 있다. 현재는 예보기금 내 계정으로부터 차입금, 예보기금 채권발행, 보증료 수입금 등으로 충당하게 돼있는데, 정부 재정과 한국은행 차입금 등 공적자금도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재원을 정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야권 일각에선 금융안정계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의 관리·감독 실패 책임을 돈으로 메꾸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유불리에 따른 반대로 비춰질 여지가 있다. 만약 지금 야권이 여당이라면 아마 입장이 다를 것이다.
진짜 문제는 '도덕적 해이'다. 금융안정계정이 있다는 이유로 각 금융회사가 평상시 유동성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대마불사 은행이라고 들어봤는가? 망하게 두기엔 규모가 커서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은행이다. 역사적으로 각국 정부는 이런 은행들이 망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유동성 위기가 오면 어차피 정부가 구원투수로 등판할 거야'라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 금융기관들은 조심성을 잃게 된다.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대출을 펑펑 내주게 된다. 풍전등화 같은 위기가 오긴 쉽지 않고, 온다 한들 익사하기 전 정부가 끄집어내줄 것이 확실하다면 굳이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금융기관에게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안전판을 만드는 일, 영원한 금융감독당국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