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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Sep 04. 2023

인간은 왜 사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독서일기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만 직면해도 인생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 죽을 때 내가 인생을 헛산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132쪽


소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인재이면서도 월든 호숫가에서 2년 2개월 2일간 스스로 땀흘리며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소로가 말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은 무엇일까? 물질은 최소한만 쓰면서 자연에 동화돼 사는 것? 그렇다면 또 '삶이 아닌 삶'은 무엇일까? 인간 사회에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모습이려나?


그렇다면 우리의 오늘은 모두 쓸모가 없는 것일까? 드높은 아파트와 멋진 외제차를 가졌다 한들 죽고난 뒤 무덤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번영해 봐야 무슨 의미인가. 우주인의 시각에서 보면 지구는 그저 아름다운 푸른별이고, 인류라는 것은 초 고성능 망원경을 통해서나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미천한 존재다. 그런데 인간이란 것들은 단지 지구를 좀먹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결국 허무주의적인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이 때문인지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위로하기 위해 문명을 끊임없이 발전시켰다. "봐, 이런 화려하고 편리한 온갖 것들을 우리가 창조해 냈어"라면서. 그게 아닌 인간은 말초적인 즐거움만을 좇으며 사고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지위를 슬며시 내려놓기도 한다.


이런 인류의 끝은 멸망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는가? 핵무기 개발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먼저 시작했다. 지구를 제패해 위대한 게르만족 아래 전 인류를 복속시키기 위해서다. 이에 대항해 미국이 뒤늦게 '맨해튼 프로젝트'로 원폭 개발에 나섰다. 프로젝트 구성원들은 한평생 좁은 대학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진실을 연구해 오던 물리학자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자신들 어깨에 인류의 존망 - 어떤 의미에서든 - 이 걸리자 전에 없던 새로운 열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폭이 실제로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폭발하자 과학자들은 그 광경을 보며 환호한다.


그들 중에 '원폭을 만들어 나치나 잽스(당시 일본군을 비하하던 말)를 쓸어버려야지'라며 반인륜적인 생각을 한 사람도 더러 있을 테지만, 대부분은 앎에 대한 갈망이 그들의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인류 멸망의 시계를 앞당긴 꼴이 됐다. 1945년 투하된 원폭 두 기로만 일본인 수십만 명이 사망하고 그 이상이 피폭돼 고통을 받았다. 이후 기술이 개발되면서 더 막강한 위력의 원자폭탄들이 만들어졌다. 과거의 나치처럼 통제를 잃은 국가나 집단이 원폭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지구는 연쇄 폭발이 일어나면서 검은별이 되고 말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뒤늦게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한 이유다.


너무 과도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외계인을 여태 만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외계인이 없어서는 아니다. 이 우주에 태양계는 수도 없이 많은데, 그중에 지구와 같은 별이 과연 이곳뿐일까? 아니다. 지적 능력을 지닌 생명체가 우주 어디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인류가 외계인과 접촉하려면 외계의 문명이 지구보다 훨씬 고도로 발달해야 한다. 일단 빛의 속도를 극복해야 하니까.


그 정도로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원자의 구조를 깨우치게 되고, 우라늄을 핵분열 시키면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즉 빛의 속도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원자폭탄 개발은 정해진 수순이다. 하지만 핵폭탄을 철저히 관리할 수 있는 외계 문명이 있다면 모를 일이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존재한다. 결국 언젠가는 핵전쟁이 일어나고, 문명은 빛의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는 단계에 이르기 전에 멸망해 버리고 만다는 논리다. 이를 학계에선 '우라늄 장벽'이라고 한다.


버스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니 한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첨탑 윗부분에 있는 예수님 조각상이 두 팔을 활짝 벌려 인자한 표정으로 땅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인간은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천국이란 개념을 만들고 신앙생활을 이어는지도 모른다. 종교는 속세에서의 인생이 덧없으니 내세를 위해 덕을 쌓으라고 가르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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