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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Sep 18. 2023

(스포주의) 도시 안으로 도망쳐 살아갈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맑은 눈으로 온 마음 바쳐 사랑할 때가 있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취미든. 하지만 정열의 폭풍우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면, 어쩐 이유에선지 그때만 한 열정을 다시 갖기가 어려워진다. 일단 한 번 얼린 고기는 다시 녹여도 생고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나'도 그렇다. 열일곱 살의 나는 소녀와 알 수 없는 이별을 한 뒤 낙담한다. 그 이후의 삶은 소녀와 헤어지기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런데 별안간 나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 들어다. 열일곱 때 소녀가 설명한 가상의 세계. 이유는 모른다. 나는 도시의 규칙에 따라 분신과도 같은 '그림자'를 떼어냈다. 그리고 꿈을 읽는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일이 끝나면 소녀를 집으로 데려다준다. 흰 눈을 소복소복 밟으며. 극적이진 않지만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된다. 그런 삶이 나쁘지 않다고 느낀다.


어느 날 그림자가 함께 현실로 돌아가 하나가 될 것을 권유한다. 체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시간이 흐를 수록 기력이 쇠하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 나는 그림자에게 설득되고, 그러자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실행 당일 생각을 바꾼다. 아무래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소녀와 함께 꿈을 읽는 생활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는 혼자만 현실로 돌아온다. 책을 유통하는 회사에 취직해 나름 인정받으며 그럭저럭 지낸다. 하지만 40대가 될 때까지 결혼은 하지 못했다. 그간 진지하게 사귀던 여자는 더러 있었지만, "내게 항상 네가 있었기 때문"이다(193쪽). 열여섯의 소녀와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이다.


*작품 속에선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이 스스로를 그림자라고 인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아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본인은 도시에 남기로 하고 그림자만 보냈음에도, 무슨 이유에선지 현실로 돌아오게 됐다며.


결국 그림자는 도시의 흔적을 좇아 어느 시골의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장으로 지내던 중 우연히 한 커피숍 주인과 인연을 맺는다. 처음엔 별 의도 없이 습관처럼 커피와 블루베리 케이크를 먹으러 간 곳이다. 그런데 그림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매너리즘 적으로 살아온 그에게 일어난 큰 변화였다.


"식사든 뭐든 언제 한번 같이 하자고 해도 괜찮을까요?" (중략) 여자에게 함께 식사하자고 한 건 생각해 보면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그러도록 만들었을까? 혹시 그녀에게 마음이 끌리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552쪽)


그림자에게 일어난 변화는 도시에 남아있던 진짜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난생처음 봄날 들판에 나온 어린 토끼처럼, 내 마음이 내 의지에 반해 설명할 길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무제한의 약동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중략)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 내 의지와 내 마음이 그토록 상반되게 움직이려 하는지도. (746쪽)
"아무래도 그때가 가까워온 모양이군요." 한동안 이어진 깊은 침묵을 깨고 소년이 내게 말했다. (중략) "당신이 이곳을 떠날 때입니다." (748쪽)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도시의 진짜 나는 내면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진짜 나'와 '그림자'는 구분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림자는 삶에의 의지를 잃어버린 나 자신이었다. 빈껍데기만 남은 나.


그렇다. 소녀가 만든 도시는 가상의 도피처였을지도 모른다. 소녀를 잃 상실감을 극복하고 현실을 애써 부정할 수 있는 공간. 허무하고 긴 세월 끝에 나는 커피숍 주인을 만 생애의 의지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이 장면을 그림자와 내가 하나가 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한때 현실에서 도망쳐 살던 때가 있었다.


장장 5년을 준비했던 고시 결과를 확인하던 날, '불합격' 세 글자를 보자 세계가 무너졌고, 그 잔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이불을 뒤집어다. 현실을 부정하다 지쳐 잠이 들면 달콤한 꿈이 펼쳐졌다. 현실에서와 달리 꿈속에서의 나는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눈을 뜨는 순간 절망이 운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다른 도피처를 찾아야 했다. 처음엔 영화나 드라마에 집중했다. 그도 부족해서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 속 캐릭터는 나와 달리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에서도 익명으로 활동했다. 재치 있는 글과 냉철한 분석력으로 유저들의 관심을 끌며 소위 '네임드'가 됐다. 나는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잠도 줄여가며 게임에 빠져 지냈다. 가상의 도시에 스스로를 유배한 거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현실을 부정하 살 순 없었다. 분연히 게임을 삭제하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되는 대로 입사 지원서를 넣었고, 운 좋게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사회 현상을 취재하고 분석하일에 소명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럼 하루키는 이 작품을 통해 "현생을 열심히 살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니체가 설파한 위버멘쉬(초인) 같을 수는 없다. 역경에 당당히 맞서기보다는, 가능하다면 안락한 곳으로 숨고픈 것이 인간의 솔직한 모습이다.


하지만 긴 인생을 살다 보면 다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순간이 온다. 마흔 중반에 비로소 도시에서 빠져나와 진짜 나를 찾게 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그런 때가 오면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면 된다. 하루키는 이렇듯 인생이 흘러가는 모습을 소설로 그려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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