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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May 22. 2022

1등이어야 했던 A씨

영화 리뷰 - 리플리(1999)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입시 성적이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한 학년에 8개 학급이 있었는데 우등생이 한 반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했다. 그런데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A는 내신도 모의고사도 '전교에서 노는' 친구였다. 성격도 쾌활하고 축구도 잘해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체육 실기 수행평가 꼬리표(성적표)가 반장이던 A에게 전달됐는데, A는 곧바로 교실에서 나간 뒤 얼마 후 돌아왔다. 그런데 꼬리표 상태가 이상했다. 출석번호 1, 2번 부분 점수가 잘려있었다. 2번은 A였다. 이상하리만치 태연해 보이는 A의 표정.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당시 체육 실기 종목은 줄넘기 2단 뛰기(소위 '쌩쌩이')와 농구 자유투였다. A는 운동에 소질이 있었지만 유독 농구에는 젬병이었다. 1차 평가에서 10번의 자유투 중 1개만 들어갔을 뿐이다. 줄넘기도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A의 내신에 적지 않은 타격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2차 평가 날엔 많은 비가 내렸다. 그날 A는 체육선생님에게 "맨 나중에 던지겠다"라고 말했다. 반장인 A가 점수를 기록하는 역할을 맡았다. 실기를 마친 친구들은 비를 피해 교실로 뛰어올라갔다. 마지막엔 A만 남았을 것이다. A가 골을 몇 번 성공시켰는지, 던지기는 한 건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친구들 몇 명과 일대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복도 끝 화장실에서 잘린 꼬리표 조각을  찾아냈다. A의 성적은 꽤 높았다. 그는 왜 자신의 꼬리표를 은폐하려 했던 걸까. 여러 정황을 종합했을 때 한 가지 개연성 높은 추론이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는 A를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A를 멀리하게 됐다.


'예비 수능'으로 불리던 모의평가 때였다. '이때 성적이 수능 성적'이라는 속설에 수험생들은 긴장하며 문제를 풀었다. 가채점 결과 나는 500점 만점에 390점대가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수능으로만 상위권 대학에 가긴 힘든 점수였다. 그런데 A는 꽤 높은 점수가 나왔다. 수행평가에선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지만, A의 모의고사 실력만큼은 진짜구나 싶었다.


그런데 몇 주 뒤 게시판에 붙은 A의 모의평가 성적이 이상했다. 가채점대로라면 전교 1,2등이어야 했지만 실제론 10위권 언저리로 나온 것이다. 이후 모의고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됐지만 다들 A가 가채점을 잘못했겠거니 할 뿐 대수롭게 여기진 않았다. 몇 문제 차이로 순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해 11월 우리는 대망의 수학능력시험을 치렀고, 다음날 학교에 모여 가채점을 했다. 나는 적당한 점수를 받아 수시전형 최저등급 조건을 충족시켰다. 그런데 A의 가채점 점수를 받아 든 담임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A의 성적은 모르긴 몰라도 서울대는 너끈히 들어갈 정도의 숫자였다. 다들 진심으로 감탄해하며 박수를 쳤고 A의 표정은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얼마 후 수능 성적표가 학교로 배달됐다. 그런데 담임의 표정이 도깨비 가면처럼 일그러졌다. 담임은 A에게 물었다. "성적이 왜 이렇지?" A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담임은 다른 학생들에겐 일언반구 설명하지 않았다.


심부름할 게 있어 교무실로 내려갔다가 우연히 A의 성적표를 봤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대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몇 문제 채점 실수로 벌어질 만한 점수 차이가 아니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한 바퀴 돌아 A는 두 번째 수능을 봤다. 친구들 사이에서 A가 이번에야말로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스승의 날에 고3 담임선생님을 만나 A에 대해 얘길 나눴다.


"A가 드디어 서울대에 들어갔다더라고요."

"무슨 소리냐? 그런 일 없다."


학교에선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생들의 입시 결과까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서울대 합격자 명단에 A의 이름은 없다고 했다. 다음 해, A가 삼수를 한다는 얘기가 전해졌고 말엔 A가 교차지원-우리는 이과였다-으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영화 '리플리'(1999)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1955)를 원작으로 한 심리 스릴러 영화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스스로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성격장애를 뜻한다. 해당 소설에서 유래했다.


A는 항상 1등이어야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현실을 거짓으로나마 바꾸려 했던 건 아닐까. 그런데 그는 왜 항상 1등이어야 했을까. 듣기론 A의 부모가 성적 문제로 상당히 압박을 가했다는 후문이다. 늘 우등생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A의 마음 한 켠에 리플리를 자라나게 한 건 아닐지.


A는 지금은 진실된 삶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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