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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May 31. 2022

소설 '탁류'와 21세기 금융권 횡령

채만식 『탁류』

"뻐게졌네 뻐게졌어"

삼십 원대가 무너졌다는 말이다.


"…팔 전인데 끊어버리세?"

"글쎄…"


"글쎄구 무엇이구 이대루 십 정만 더 떨어지면 아시야 아시. 알어들어? 왜 정신을 못 채리구 이래?"

"그렇지만 인제 와서야 머…"


- 채만식 『탁류』 中 -


고태수는 XX은행 군산지점의 행원이다. 원래는 서울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궁색하게 살다가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XX은행 서울 본점 급사로 들어갔다. 이후 야학으로 을종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상사 눈에 들어 행원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군산지점으로 오게 됐다.


태수는 서울에선 손꼽히는 모범 행원이었으나 군산으로 오자 기를 탁 펴더니 유흥에 빠져 살았다. 월급보다 많은 돈을 흥청망청 쓰느라 빚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태수는 은행 고객 중 백석이라는 고리대금업자 명의로 소절수(일종의 어음)를 위조하자 마음먹었다. 백석의 도장을 복사하고 필체를 모사했다.


위조한 소절수로 은행 현금계에서 돈을 만들었다. 그 뒤 공범 형보가 돈세탁을 하고, 그 돈이 태수에게 돌아왔다. 소절수 몇 번 만든다고 해서 표는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백석의 계좌에서 야금야금 1800원을 빼내 썼다.


그런데 갑자기 백석이 다른 은행으로 거래를 옮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백석이 예금을 모조리 찾는 순간 돈이 빈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그때가 태수의 명이 다 하는 날이다.


그래서 태수는 미두를 하기로 했다. 미두란 쌀 시세를 이용해 현물 없이 투기적 약속으로만 사고파는 행위다. 미두로 돈 천원 정도 만든 다음 백석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판판이 돈을 잃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차장급 직원 A씨는 2012년 10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회삿돈 약 614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지난 24일 구속 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은 A씨가 횡령한 돈으로 주가지수옵션거래 등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A씨가 빼돌린 돈은 옛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과 관련해 이란 다야니 가문이 낸 계약금이었는데, 당시 계약이 깨지면서 몰수한 돈을 우리은행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야니 가문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자소송(ISD)을 제기했고, 2019년 말 최종 승소했다. 우리 정부는 약 730억원을 배상하게 됐다.


A씨는 은행에서 대우일렉 매각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ISD 대응 태스크포스(TF)에도 참여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모 위원회와 모 공사 명의 문서를 위조해 수백억원짜리 수표를 인출하는 수법으로 돈을 빼돌린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횡령이 발각되지 않은 이유는 국제사회의 대이란 제재 탓에 계약금을 즉각 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지난 1월 미국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특별허가에 따라 계약금 송금이 가능해진 뒤에야 돈이 사라진 사실을 인지하고 내부감사를 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A씨는 빼돌린 수백억원을 종잣돈 삼아 큰돈을 벌었을까? 그는 횡령한 돈을 불리기 위해 전업투자자에게 무려 16억원을 주고 정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A씨는 투자한 금액의 대부분을 잃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현재까지 수사기관이 추징보전 청구한 A씨와 B씨, 그 가족들의 재산은 65억원에 불과하다. 친동생 B씨와 공모해 해외 페이퍼컴퍼니로 빼돌린 50억원을 더한다 해도 80%가 넘는 돈이 빈다.


금융기관 횡령은 심심치 않게 일어나지만 횡령액 회수는 쉽지 않다. 2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 5월까지 5년간 금융권에서 횡령을 한 임직원은 174명, 횡령 규모는 1091억8260만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환수한 횡령액은 127억1160만원으로 11.6%에 그쳤다.


횡령은 왜 반복될까. 금융감독원은 대출 서류 위조, 계약자 정보의 무단 도용 및 변경, 외부 수탁업체에 대한 관리 소홀로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내부통제가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간 불붙었던 자산시장도 '횡투(횡령 투자)'를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주변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알트코인으로 '억' 소리 나게 벌었다든지, 대출 '영끌'해서 아파트를 샀더니 값이 두배로 올랐다든지 하는 소문이 가득했다. 증시는 끊임없이 우상향 하는 것 같았고, 예·적금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큰돈을 굴릴수록 많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과, 돈을 벌어서 돌려놓으면 그만이라는 도덕 불감증이 횡투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주식이나 가상화폐 등 각종 투자는 굉장한 분석이 필요한 분야"라면서 "기초적인 분석도 없이 한탕하려는 인식에서 큰 사고들이 터지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쯤에서 손절하라"는 공범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고태수는 횡투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소설에 묘사된 일제강점기 때 은행과 현재 금융권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글은 글쓴이가 소속 언론사에서 동일한 내용으로 인터넷 기사로 출고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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