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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Jul 31. 2022

[스페인]고적한 지중해, 타라고나

스페인 여행 3일 차 Part 1

#2022.6.13.


원래는 이날 바르셀로나 자유 관광을 할 예정이었지만 흥적으로 당일치기 근교 여행을 결정했. 행선지는 스페인 동북부에 있는 타라고나(Tarragona).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로 왕복 3시간 안쪽 거리다. 카탈루냐 광장 근처에 숙소가 있던 우리는 그라시아역(Passeig de Gracia)에서 렌페(Renfe) 기차를 타기로 했다. 기차표는 그라시아역 내부 자판기에서 16.1유로(왕복) 구할 수 있다.


열차 시간표가 있지만 꼭 제시간에 오는 게 아니니 잘 확인해야 한다. 타라고나행 기차도 여러 편이라 역무원이나 주변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승강장에서 현지인 두 명에게 물어물어 겨우 맞는 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착석하고 나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앞자리 승객에게 재차 확인했다.

타라고나 기차역 주변 풍경 / 직접 촬영
타라고나 기차역 주변 풍경 / 직접 촬영
타라고나 기차역 주변 풍경 / 직접 촬영

타라고나 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새파랗고 건물은 모래색이다. 지중해변이 하늘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길가에 늘어선 보라색 꽃나무가 싱그럽게 산들거린다. 타라고나는 꽤나 한적했다. 기차역 주변을 오가는 사람도 적가게도 그리 많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10분 정도 걸어올라 가면 로마 원형 경기장이 나온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을 축소해놓은 느낌이다. 이날은 원형 경기장이 개방되지 않았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근처엔 해시계로 추정되는 물건도 있다. 로마 숫자가 그려진 원판 한쪽에 뾰족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그림자가 가리키는 숫자가 현재 시간인가 보다.


그런데 타라고나에 왜 로마 유적이 있을까.


타라고나는 과거 로마 제국에 합병된 스페인의 행정·상업 도시였다. 로마제국이 다른 지방을 건설하는 데 모델로 삼을 정도로 잘 설계됐다고 한다. 도시 곳곳에서 지중해 연안의 고대 역사를 만날 수 있다. 현재도 도시 아래에 상당한 유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유네스코는 '타라코(Tárraco, 타라고나의 옛 이름) 고고 유적군'을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홈페이지).


그래서인지 타라고나엔 외국인보다 스페인 현지 관광객이 은 듯했다. 교복이나 체육복 등을 맞춰 입고 단체 소풍을 온 학생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로마 유적. 원형경기장 / 직접 촬영
해시계 / 직접 촬영
소풍 나온 스페인 아이들 / 직접 촬영

근처 노천카페에서 혈중 커피 농도를 충전한 뒤 해변가로 향했다. 타라고나에 온 진짜 목적, 해수욕을 하기 위해서다. 바다로 가는 길은 한적하고 고즈넉했다. 철길 옆 주택가엔 노란색 꽃나무가 탐스럽게 서있고 그 옆으로 기차가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오갔다. 꼭 해수욕이 아니더라도 상의를 벗고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타라고나 해변 가는 길

우리는 해변을 즐기겠다는 의욕만 앞섰을 뿐 준비성은 부족했다. 뜨거운 태양과 모래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파라솔과 돗자리 등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사실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처럼 현장에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길거리 상인은커녕 마트조차 없었다. 방문객이 워낙 적어서 그런 것 같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시피 해 겨우 작은 마트를 하나 발견, 돗자리와 맥주 그리고 프링글스를 샀다. 참고로 타라고나엔 외국인 관광객이 드물어서 그런지 상인들과 영어 소통이 쉽지 않다.

준비물은 얼추 갖췄는데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탈의실이 없다는 점이다. 야외 화장실도 없다. 그래서 돗자리로 몸을 가려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꽤 많아서 그런지 딱히 이상해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타라고나 해변에선 수영복 하의만 입은 채 태닝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어찌 보면 동양인들만 필요 이상으로 몸을 가리는 건 아닐까.

투명한 지중해 물빛
타라고나 해변엔 물고기가 노닌다.

옷까지 갈아입고 나니 비로소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낸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제부턴 지중해를 오롯이 느끼면 된다. 물은 차고 투명했다. 수면 위에서든 수중에서든 시야가 맑다. 사람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노닐고 있다. 물살이 약하고 수심도 완만해서 안전해 보인다. 나중에 쓰겠지만 토사 데 마르(Tossa de Mar)에선 어느 정도 수영하다 보면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된다. 다만 타라고나 해변엔 구조대가 없는 것 같았다.

물놀이가 지겨워지면 돗자리에 누워 볕을 쬔다. 이때쯤이면 맥주는 미지근한 정도를 넘어 뜨끈해지지만 아무래도 좋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신다는 행위 자체가 황홀감을 선사한다. 한 캔을 비우고 나면 적당히 알딸딸해진다. 돗자리에 엎드리니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토막잠을 자고 일어나 개운한 정신으로 다시 바다로 뛰어든다.


참고로 파라솔이 없어도 나쁘지 않았다. 선크림만 잘 발라준다면. 일부러 몇 시간씩 몸을 굽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타라고나 해변이 좋은 점 중 하나는 소매치기 걱정을 덜 해도 된다는 것이다. 관광객이 적어서 소매치기도 없는가 보다. 그래도 마음을 아예 놓을 순 없어 물놀이하는 틈틈이 소지품을 감시했다.

해수욕을 마친 뒤 주린 배를 채우러 Rambla Nova 거리로 향했다. 골목 곳곳에 가격이 착한 타파스바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일단 와인부터 주문했다. 하우스 와인이 잔의 5분의 3쯤 담겨 나온다. 매우 흡족하다. 맥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배부르게 먹고 마셨는데도 계산서엔 22유로(약 3만원)가 찍혔을 뿐이다. 이 얼마나 혜자스러운 나라이며 도시인가.


기분 좋게 취한 채 타라고나 골목 곳곳을 거닐었다. 작은 동네 성당이 나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했고 아이스크림 가게가 나오면 젤라토를 먹었다. 그러다가 '인간 탑 쌓기' 동상을 발견했다. 인간 탑 쌓기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전통문화로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에도 등재돼 있다. 사람의 몸으로만 5~6층 높이 탑을 쌓는데 맨 위에는 어린아이들이 올라간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직접 구경하기는 어려워진 듯하다.

타라고나는 화려한 관광지도 멋들어진 휴양지도 아니지만, 중세 로마의 고즈넉함과 스페인의 평범한 현지 일상 그리고 눈부신 지중해를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시끌벅적한 바르셀로나 관광에 지쳤다면 인적 드문 타라고나 바다에 몸을 담근 채 맥주 한 잔 하는 건 어떨까. 우리는 바르셀로나 벙커 야경을 보기 위해 오후 5~6시쯤 기차를 타고 돌아갔지만 타라고나를 한나절쯤 구경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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