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야경을 보기 위해 벙커(Bunkers del carmel)로 향했다. 벙커는 1930년대 말 스페인 내전 당시 좌파 연합인 인민전선(Frente Popular)이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전투기 공격으로부터 바르셀로나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이후 야경 명소로 알려지며 유명 관광지가 됐다.
벙커는 구엘공원 근처에 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갈 땐 24번 버스로 30~40분 정도 이동한 뒤 10분가량 걸어가면 된다. 버스정류장에서 벙커로 올라가는 길에 슈퍼마켓이 한 군데있다. 스페인의 여느편의점이지만, 가격은 다른 곳보다 비싸다. 간식거리가 필요하다면 미리 챙겨가는 것도좋겠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냉장고 온도가 높게 설정된 탓인지 맥주나 음료가그다지 시원하지 않다. 벙커에올라가면 아이스박스에 맥주와 콜라 등 음료수 담아놓고 파는 상인들이 있는데, 오히려 이 쪽이 더 시원할지도 모르겠다.
벙커를 오르기는 특별히 어렵지 않다. 이 구간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얘기도 있는데 우리는 별 문제없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선 언제든 조심하는 게 좋다. 세계 소매치기 3 대장 도시니까.
서산으로 해가 넘어갈 때쯤 벙커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전경 / 직접 촬영
벙커에선 바르셀로나와 그 위로 펼쳐진 지중해가 한눈에 담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대성당)도 보인다. 꼭대기 위로 삐죽 튀어나온 크레인이 마치 십자가 같다. 벙커를 찾은 이들은 대부분 이십 대 젊은 층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순간을 즐겼다. 늦은 저녁, 베이지색의 아주 얇은 실크 원단이 깔리듯 석양빛이 시내 위로 덮였다. 아름다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비둘기는 날개를 재촉하지 않아도 언제든 명당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 직접 촬영
풍경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미리 도착해 시야가 좋은 자리를 맡아놓길 추천한다. 우리도 나름 발을 재촉했건만 명당자리는 모두 차있었다. 물론 유러피언들 사이에 둘러싸여 그들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기나긴 코로나19 터널 끝에 오게 된 유럽이니까. 우리는 적당한 곳에 걸터앉아 미지근한 맥주와 환타를 마시며 해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벙커 구조물 위에 올라가 밤을 기다리는 여행객들 / 직접 촬영
벙커 구조물 위에 올라가 밤을 기다리는 여행객들 / 직접 촬영
황홀경을 즐길 때 빠질 수 없는 술. 와인을 따로 준비해온다면 더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 직접 촬영
스페인 맥주와 환타. 스페인에서 파는 환타엔 실제 과즙이 첨가돼있다. / 직접 촬영
드디어 사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달이 떠올랐다. 운이 좋게도 보름달이었다. 열정의 나라 스페인이어서 그런지, 달은 태양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하고 넘치는 빛을 지중해 위로 쏟아냈다. 벙커 위에 있는 모두가 도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술을 마시던 이들은 밤하늘을 향해 잔을 들었고 연인들은 조용히 서로의 손을 그러잡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달 / 직접 촬영
달은 하늘 위 점 하나로만 존재하지 않고 바다 위에도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 직접 촬영
벙커의 야경은 몬주익의 밤이 주는 느낌과 다르다. 몬주익 분수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인 반면 벙커에선 바르셀로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유럽의 젊은 여행객들이 주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딱 하나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맥주가 딱 한 캔 뿐이었다는 것. 다음에 또 갈 기회가 있다면 하프 보틀 와인에 피자 한 판 곁들이며 해질 녘의 바르셀로나를 좀 더 알딸딸하게 감상하고 싶다.
바르셀로나 야경. 벙커에선 지평선과 해안선이 곡선으로 보인다. 지구는 둥그니까 / 직접 촬영
야경을 충분히 즐겼다면 이때부터 돌아가는 게 걱정이다. 물론 오는 버스도 있으니 가는 버스도 있다. 다만 먼저번 버스정류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타야 하니, 미리 구글맵을 이용해 탑승 위치와 운행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동네가 어두컴컴한 데다 벙커를 찾은 여행객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너무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 가는 건 좋지 않을 듯하다. 조금 서둘러 돌아가서 또 다른 바르셀로나의 밤을 즐기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