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댓국 연쇄 사기범
법치주의 국가에서 죄지은 자가 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역시 무전유죄 유전무죄인가 싶어 입맛이 쓰다.
휴대전화가 울리자 반사적으로 알람을 끈다. 네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 아직 세상은 새카맣다. 아직 쥐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다른 기자들을 피해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빠져 나와 짐을 챙긴다. 기자실 문을 열고 나가자 칼날 같은 추위가 외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가혹하도록 추운 겨울이다.
로비엔 이미 타사 기자가 양말을 신으며 영혼 없는 눈으로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이성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피차 마찬가지다. 정신‧육체적으로 극한에 몰린 상황에서 남의 시선 따위 알 바 아니다. 그저 우리는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한 한 마리의 수(獸·짐승)습기자일 뿐.
“자정쯤 잡혀온 남자가 있다는데요. 검찰에서 수배 중인 사기범이라나?”
이미 형사 당직실에 다녀온 모양이다. 수습기자들은 보통 두 시간에 한 번씩 담당 ‘일진’에게 경찰서를 돌며 취재한 내용을 보고한다. 보고시간이 빡빡하다 보니 수습기자들은 초(超) 언론사적인 인류애를 펼친다. 각자 알아낸 사건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매우 낫다. 물론 일진들에겐 절대 비밀이다.
첫 보고부터 형사 사건이라니 운수가 좋다. 댓바람부터 사건 없다고 싫은 소리를 들으면 하루 종일 기분을 잡친다. 게다가 수배범이다. 얘기가 되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는 곧 산산조각 났다. 출동한 지구대에서 알아보니 돈 한 푼 없이 순댓국에 소주 한 잔 걸치다 잡혀온 남자였다. 사기란 것도 대단한 게 아니다. 무전취식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실수로 음식값을 치르지 못하면 경범죄로 처벌받지만 고의로 남을 속여 음식을 먹으면 사기죄가 성립한다.
경범죄처벌법 제3조(경범죄의 종류)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1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科料)의 형으로 처벌한다.
39. (무임승차 및 무전취식) 영업용 차 또는 배 등을 타거나 다른 사람이 파는 음식을 먹고 정당한 이유 없이 제 값을 치르지 아니한 사람
형법 제347조(사기) ①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신종 사기는 무죄 받는 세상…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아직도?
세상엔 남을 등쳐먹으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다. 불량식품을 건강에 좋다고 속여 팔거나, 개발 가능성이 없는 땅에 투자하라고 유혹한다. 보이스피싱부터 주식, 가상자산까지 사기 수법은 날로 다양해지고 진화하고 있다. 연애를 빙자해 돈을 뜯어내는 파렴치한도 있다. 피해액이 수십~수백억에 이른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피해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경찰서 문을 두드린다. 사정은 딱하지만 막상 얘기를 들어보면 증거 없는 경우가 많다. 고소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유죄가 확정되더라도 피고인이 돈을 이미 써버렸거나 감춰놨다면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기술이 발전하면서 입증이 어려운 범죄가 더 많아지고 있다. 증권이나 가상자산을 이용한 사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마땅치 않다. 수사기관 등에서 범죄 입증을 위해 다양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곤 있지만, 사기꾼들의 머리가 늘 빨리 명석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실제 취재했던 사건 중에서도 법원에서 무죄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비싼 변호인을 대동하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무전취식 사기죄 입증은 어렵지 않다. 자신이 음식 값을 치를 수 없음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정말 돈이 없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먹으면 재산상 이익을 얻는 게 된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죄지은 자가 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역시 ‘무전유죄 유전무죄’인가 싶어 입맛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