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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Feb 13. 2023

성층권에서 헤르만 헤세 읽기

비행 독서

기억은 처음엔 생생한 영화였다가 언제부턴가 정지된 수채화 그림으로 남는다. 전후 과정은 기억나지 않고 인상적인 몇 장면만 남을 뿐. 그래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 수채화처럼 읽히는 이유인가 싶다.


베트남 하노이로 휴가를 떠나는 아침, 5시간 안팎의 비행시간이 무료할까 싶어 서재에서 헤르만 헤세의 단편 소설집을 꺼내왔다.


<동네서점 베스트 컬렉션 × 헤르만 헤세>


처음 만난 작품은 '청춘은 아름다워'다. 타지에서 지내다가 잠시 고향으로 휴가 온 청춘의 헤르만이 추억을 회상하면서 쓴 소설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동네 풍경.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만난 두 여인에게서 느낀 사랑의 서투른 감정이, 기분 좋게 후텁지근한 여름날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소설은 물을 담뿍 섞어 맑은 수채화를 읽어나가는 느낌이다. 아스라하면서도 밝은 빛에 휩싸여 있다.


이런 감상엔 독서 환경도 한몫했다.


비행기는 성층권을 날고 있었다. 태양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조금 더 온전하게 햇살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대류권에 속한 지상에선 대기가 순환하기 때문에 날씨가 각양각색이지만, 대류 현상이 없는 성층권은 궂은날도 더 화창한 날도 없이 늘 푸르고 화사하다.


탁한 한국의 하늘을 벗어나 맑은 햇빛을 받으며 헤르만의 추억 속을 여행하고 있자니 내 유년의 기억들이 수채화 그림 몇 점으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리 집은 녹슨 고철 대문이 달리고 장독대가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마당 한편엔 개집이 있목줄이 달린 렁이가 뛰놀았다.


좁고 기다란 화단엔 집보다 두 배는 키가  라일락 나무가 서있었다. 봄이면 은은하게 흰 라일락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봄바람에 기분 좋게 사브렸다.


비가 내리면 집 앞 골목 웅덩이가 고였고, 그 위로 손톱 반만 한 라일락 꽃잎이 둥실 떠다다. 기억 속의 나는 웅덩이 앞에 쪼그려 앉아 꽃잎이 흔들리는 양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네댓 살 나이에 '운치'걸 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 장면만큼은 평생 고상하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아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인식은 못했을지언정 본능적으로 꼈던 것 같다.




성층권에서의 독서, 처음 시도해 보는데 꽤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읽고 있는 책이 헤르만 헤세의 아름다운 소설이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론 공해로 찌든 지구의 환경이 아쉽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라일락 나무가 유난히 아름다웠던 이유도 새파란 하늘이 배경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밤하늘도 검푸르게 투명했다. 밤이 되면 북두칠성과 오리온 같은 별자리들을 맨눈으로 찾아내며 놀았을 정도니.


지금 하늘은 미세먼지 때문에 잿빛인 날이 더 많은 느낌이다. 새로 쌓이는 기억은 회색 물감으로 칠해지는 수채화랄까. 밤하늘도 까만 유성 물감으로 덧칠 것 같다. 빛공해 탓에 더더욱.


기분 좋은 독서를 즐기는 한편, 성층권에 오르지 않고선 맑은 하늘을 볼 수 없는 미래가 오진 않을까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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