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의 한 은행 현관엔 A4 용지로 만든 안내문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걸어서 15분 거리의 다른 은행 영업점과 합쳐진다는 내용이다. 해당 영업점을 이용해 온 고객들은 4월부턴 건너 동네로 다녀야 한다.
KB국민은행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보면 이달 전국 총 24곳의 영업점이 위 은행처럼 문을 닫는다. 또 다른 4대 시중은행인 신한은행은 4월 10일 영업점 6곳을 폐쇄한다. 우리은행은 올해 들어 7곳이 사라졌다.
은행들이 오프라인 영업점을 줄이는 이유는 '경영 효율화' 때문이다. 디지털금융이 보편화되면서 객장을 직접 찾는 고객들이 많이 줄었다. 계좌이체든 공과금 납부든 모바일뱅킹으로 터치 한 번이면 언제 어디서든 수수료 없이 무제한 가능하고, 대출도 비대면 상품이 즐비하다.
돌이켜보니 최근 은행에 직접 간 적이 언제던가? 해외여행을 준비하면서 외화를 환전하러 갈 때 말곤 없긴 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조사해 봤더니 2022년 은행 고객 10명 중 8명이 인터넷뱅킹으로 돈을 옮겼다.
민간기업인 은행이 이런 비효율을 가만 둘 리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9년 말 6709곳이었던 국내 은행 점포 숫자는 2022년 말 5800개로 꾸준히 감소했다.
하지만 디지털소외계층을 고려하면 마냥 쌍수 들어 반길 일은 아니다.
카카오톡으로 사진 한 장 보내는 것도 어려워 자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그분들이 스마트폰으로 인증서를 다운로드하고 지문을 등록하는 등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모바일뱅킹에 익숙해지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신체적인 불편함 때문에 대면 영업점이 꼭 필요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은행을 오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허리가 굽거나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상당하다.
/엠페사(M-PESA) 홈페이지 갈무리
물론 디지털금융이 '금융포용' 관점에서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프리카처럼 은행 영업점이 부족한 조건에선 오히려 디지털금융으로 인해 금융 접근성이 높아진다.
'금융계 미래학자' 브렛 킹의 저서『뱅크 4.0』에 따르면 모바일금융서비스 '엠페사(M-PESA)'가 출시되기 전까진 케냐 인구의 단 27%만 은행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거의 모든 성인이 모바일머니 계좌를 갖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케냐가 아니지 않은가. 결국 국내디지털소외계층에겐 '집에서 가까운 은행'이 필요하다.
서울 영등포구 주민들이 은행 폐쇄를 반대하며 모은 1320명의 서명. / 직접 촬영
그래서 동네 은행 영업점이 폐쇄되면 근처 주민들이 들고일어나곤 한다. 저 영등포구 주민들은 132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 대통령실과 금융감독원, 은행에 탄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은행 시책에 따른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최근 몇 년치 폐쇄 현황을 분석해 적정 기준을 점검해 보겠다"라고 말했지만, 금융당국이라고 해서 민간기업인 은행의 영업점 통폐합을 직접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은 다수 은행이 한 영업점에 들어서는 공동 점포나 이동 점포, 우체국 등 대체 수단을 활성화하도록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2023년 3월 30일 우리은행 영등포시니어플러스영업점 개설식 / 직접 촬영
마침 30일엔 우리은행이 고령층 특화 점포 '시니어플러스점'을 서울 영등포구에 개설했다. 서울 성북구 1호점에 이어 두 번째다. 자동화기기(ATM) 화면 내 글자가 큼지막하게 나오고 영업장 한편엔 은행원과 화상으로 대화하면서 은행업무를 볼 수 있는 창구 한 곳도 마련됐다.
우리은행 영등포시니어플러스점에서 화상 상담 창구를 시연하는 모습 / 직접 촬영
그런데 일반 영업점과 별 차이가 있나? 그저 점포 이름에 그럴싸한 '시니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뿐이란 느낌이다. 물론 취지나 시도 자체는 높게 평가할 만한 것이지만.
폐쇄를 앞둔 은행 앞에서 만난 한 남성은 "다른 동네 은행까지 힘들게 걸어가는 것도 모자라 여러 동네 사람이 몰려서 대기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