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양대 은행 중 하나인 크레디트스위스(CS)의 위기는 UBS의 인수로 일단락된 듯 보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손실을 본 이들로 CS가 발행한 신종자본증권(Additional Tier1·AT1) 투자자가 꼽힌다.
앞서 스위스은행감독청은 2023년 3월 20일 UBS가 CS를 인수하며 CS의 160억 스위스프랑 규모 AT1을 모두 상각(상환불능) 처리했다고 밝혔다.
대체 신종자본증권이 뭐길래 투자자들 채권이 깡그리 휴짓조각이 된 걸까?
일단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신종자본증권은 코코본드(COntigent COnvertible Bond)의 일종이다. 코코본드란 불특정 사안 발생 시(Contigent) / 전환 가능한(Convertible) / 채권(Bond)이라는 뜻이다.
채권이긴 하지만, 금융사 파산 시 변제받을 수 있는 선순위 채권 등과 달리 신종자본증권은 발행사에 의해 보통주로 전환될 수 있으며 조건에 따라 아예 상각, 즉 상환 거부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은행 위기 발생에 대한 손해를 신종자본증권 투자자들이 보게 되는 구조다.
한편 만기는 30년 이상이고 연장할 수 있는 특성('영구채'라 불린다) 등으로 인해 회계상 신종자본증권은 투자자들에게 갚아야 할 '부채'가 아닌 기업의 '자본'으로 인정된다.
특히 은행자본건전성을 제고하기 위한 바젤III 협약이 발효되면서부터 금융사들은 자본성 강화와 예금자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활용해 왔다.
금융사 위기에 따른 책임은 투자자에게 '몰빵'하면서 예금자와 선순위 채권자를 보호하고 납세자 부담은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크레디트스위스 전경/홈페이지 갈무리
투자자들에겐 위험천만해 보이는 신종자본증권, 대체 왜 투자하는 걸까?
투자는 돈이 되니까 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법칙에 따라 신종자본증권의 이자는 높은 편이다. 일반 회사채보다 고금리로 발행된다.
그런데 신종자본증권 발행 이후 5년마다 '콜옵션(투자자들에게 조기 상환하는 것)'을 행사해 투자자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게 업계 관행이다 보니, 사실상 30년 만기가 아닌 5년짜리 채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신종자본증권은 내재한 위험성에 비해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투자처로 꼽혔던 것이다. 여타 채권보다 더 높은 이자를 5년만 투자해도 받을 수 있었으니! 그리고 '금융사가 설마 망하겠어?' 싶었던 거다.
하지만 금리의 역습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물질은 열을 받으면 분자 간 결합이나 분자 내 구조가 바뀌면서 모습이 바뀐다. 얼음을 냉동실 밖으로 꺼내두면 녹아서 물이 되고, 드라이아이스는 고체에서 기체로 승화한다. 종이는 불에 닿으면 타서 재가 된다.
금리는 불꽃같은 게 아닐까. 저온(저금리)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활용되던 신종자본증권은 통화긴축이라는 열이 가해지자 처치곤란한 물질로 변하고 만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국내 대표 생명보험사 중 하나인 흥국생명이 5년 전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의 최초 조기 상환일(2022년 11월 9일)을 일주일여 앞두고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시한 일이 있었다.
콜옵션 행사는 발행한 회사 의사에 달린 것이므로 조기 상환하지 않는다고 하여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시장의 신뢰가 깨지고 말았다.
국내 금융기관이 외화채권에 대해 조기 상환하지 않은 건 2009년 우리은행 이후 13년 만이었으니까. '얼마나 사정이 안 좋길래?'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물 채권의 부도 가능성 지표(CDS프리미엄)가 치솟았다.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 후 CDS 프리미엄 변동 추이 / 나이스신용평가
흥국생명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신종자본증권 발행 당시는 지금보다는 금리가 낮은 시절이었다. 금리가 연 4.475%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5년이 지나 콜옵션을 행사하기 위해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차환)하려고 보니 그동안 금리가 너무 뛰었다. 업계에 따르면 연 12% 수준. 이자 부담이 커져도 너무 커진 것이다.
발행사 입장에서만 보면 콜옵션을 건너뛰는 편이 당연히 합리적이다. 심지어 금융당국마저도 처음엔 흥국생명의 결정을 두둔했을 정도다.
물론 후폭풍을 세게 맞으면서 금융당국은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꿨고, 흥국생명도 울며 겨자 먹기로 결국 콜옵션을 행사했다.
한국에서도 신종자본증권 상각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을까?
CS의 신종자본증권 사태는 흥국생명 건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흥국생명은 금리 부담을 덜기 위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고, CS 건은 발행사가 다른 은행에 인수되며 아예 상환이 불가능해진 경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CS 유사 사례가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을까?
금융당국에 따르면 2023년 3월 20일 기준 국내 은행권 코코본드 발행 잔액은 31조5000억원이다. 금융지주가 19조5000억원, 은행이 12조원으로 파악됐다. 일단 규모는 작지 않다.
한국신용평가는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했다. 국내에서의 신종자본증권 상각은 발행회사가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될 때 발생한다.
그런데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되기 전 경영개선권고 또는 경영개선요구가 단계적으로 시행되므로, CS의 경우처럼 상각 예정 사유가 갑자기 발생할 확률은 희박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자본시장은 심리로 움직인다. 요즘엔 SNS를 통해 은행 위기설이 일단 퍼지기만 하면 불안감을 느낀 고객들이 예금을 일거에 빼내는 사태가 발생한다. 현재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선 은행이 쓰러질 때마다 가위표를 치는 '빙고' 게임이 유행이다.
은행 파산 빙고 게임/트위터 갈무리
독일의 투자은행 도이체방크가 대표적인 예다. 3월 24일(현지시간) 도이체방크 주가는 장중 14% 넘게 떨어졌다. 추후 반등하긴 했지만 결국 8%대 하락 마감했다.
도이체방크가 2014년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거래 가격이 최근 하락한 소식이 전해지면 서다. 핵심 자기 자본 대비 신종자본증권 발행액 비율이 유럽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점도 우려를 더했다.
그러자 보름 전 100bp(베이시스포인트)였던 도이체방크의 CDS프리미엄은 이날 220bp까지 올랐다. 코로나19가 터진 이후인 2020년 수준까지 치솟은 것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나 외신 등은 도이체방크의 건전성에 비해 시장의 공포가 과도했다고 지적했다. 뱅크런 공포도 팬데믹처럼 전염됐다는 것이다.
도이체방크/홈페이지 갈무리
이런 가운데 신한금융지주가 다음 달 원화 신종자본증권 1350억 원어치에 대한 콜옵션(조기상환)을 행사하겠다고 27일 밝혔다. 이번에 상환되는 신종자본증권은 2018년 발행 당시 연 4.08% 금리에 콜옵션 5년이 약정된 건이다.
신한금융지주 관계자는 "지난 1월 4000억원의 신종자본증권을 선제적으로 발행해 추가 조달 없이 중도상환 여력이 있는 상황"이라며 "신한금융지주는 안정적 자본비율 및 선제적 유동성 관리를 통해 그간 콜옵션을 모두 행사해 왔고 앞으로도 일관되게 행사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은행도 2023년 4월 25일 콜옵션 만기가 돌아오는 5000억원 규모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하기로 했다. 하나은행은 오는 10월 1800억원, 하나금융지주는 11월 2960억원 콜옵션 만기가 오는데 둘 다 행사할 계획이다. KB국민은행은 올해 만기가 오는 신종자본증권이 없는 상태다.
국내 금융권이 도이체방크처럼 은행 뱅크런 팬데믹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선제적으로 "이것 봐, 나 진짜 괜찮아!"라며 건전성 홍보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걱정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콜옵션을 행사하면 통상 새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차환)하는데, 최초 발행했던 때보다 금리가 오른 상태여서 부담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투자심리까지 위축됐다. 종합적으로 신종자본증권을 통한 금융권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거란 관측이 나온다.
어쩌면 은행 위기는 '별일이겠어?'하고 지나칠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이 물 위에 깔린 시장의 공포란 기름을 타고 언제 강을 건널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