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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Mar 09. 2019

#16  가족의 탄생


  집안에 새로운 얼굴이 여럿 보였다. 브리짓과 동년배로 보이는 여성들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사해요! 빈! 내 절친한 친구 캐리에요. 거리의 목사라 부르기도 해요. 아참, 캐리! 빈네 엄마 송도 목사셔. 둘이 인사하면 좋겠다~!”


  친구들을 만나 한층 더 들떠 보이는 브리짓은 맞은편에 서있는 캐리를 소개해주었다.

  거리의 목사라니! 소개부터 멋졌다. 


  “캐리는 이 농장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같이 활동해오던 오래된 친구예요. 거리에서 만난 갈 곳 잃은 사람들, 노숙인들을 여기로 데려오죠. 지금은 할머니들이 되었지만, 우리 다 젊었을 때부터 사회약자들을 위한 여러 가지 주거운동을 해왔어요. 그 일환으로 지금의 핀챔스 농장이 만들어진 거고요. 2~30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어요. 끊임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시도해봐야죠.”


  브리짓은 친절하게도 그간의 이야기들도 들려주었다.

  백발의 할머니가 장거리 고속운전을 할 때부터 무언가 남다르더라니. 긴 세월 어디서나 환영받기에 어려운 활동이었을 텐데도 지금껏 이어올 수 있었던 건 청년 못지않은 브리짓의 에너지 덕택일 것이다.


  “여기 있는 꼬마 아가씨 소개를 내가 했던가? 제 손녀딸이에요. 제가 입양한 딸이 세 명이 있는데, 얘는 내 둘째 딸의 아이에요.”


  식탁에서 인형놀이를 하던 꼬마아이를 풀썩 끌어안으며, 브리짓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이었다.

  달짝지근한 수프 냄새를 맡고 다른 핀챔스 농장 식구들도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기다란 식탁에는 따끈한 수프가 사람 수만큼 놓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설어 곁눈질만 하던 나는 이제 웬만큼 적응이 되었는지 식탁에 둘러앉은 핀챔스 식구들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브리짓의 손녀부터 네이쓴, 소피, 다렉, 캘리….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은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가족’이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이제껏 남으로 살다 만난 사람들이 다 같이 웃고 있으니 그 표정이 둘에서 하나로 닮은꼴이 되어 오묘하게 겹쳐져 보였다.


  “데인은 왜 안 보여?”


  비어있는 한 자리를 가장 먼저 허전해하는 브리짓.


  “방에 있을 걸?”


  소피는 대답과 동시에 수프를 한 숟가락 입으로 가져갔다.


  “다 같이 먹어야 맛있지!”


  데인을 부르러 나가는 브리짓의 뒷모습을 보며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가족이란 뭘까.’


  평소 늦은 밤까지 거실에 앉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꺄르르 웃으며 대화하던 소피와 브리짓은 영락없는 모녀처럼 보였다. 때로 데인이 속을 썩여 큰 목소리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편 서로에게 무심하리만큼 아무 말이 없는 우리 가족을 돌아보았다. 식사를 하고 난 후에도 소리 없이 자기 공간으로 돌아가는 우리들. 혼자 있는 게 편한 사람들. 겉으로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지만 속으로 자기 몫의 수만 가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친구네 부모님들은 저녁마다 이웃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고 술판을 벌이며 벌게진 얼굴로 왁자지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데, 우리 집은 그런 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부모님 두 분 다 술을 안 드시니 그것도 어쩌다 대학 동기 후배들, 직장 동료들이 집에 놀러 와서 배불리 식사 한 끼를 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계모임도 하고 학교 행사가 있으면 학부모들과 어울리는 친구네 엄마와 달리 필참이 아닌 이상 학교에 오지 않았고 특별히 사람을 사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소극적인 분들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그 흔한 싸움도 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언성을 높이며 대화한 건 내가 8살 적에 딱 한 번뿐이었다. 살다가 답답할 때도 있을 텐데 친구나 가족들에게 통화하며 한풀이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뒤에서 싫은 소리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로 많은 대화를 하며 애정표현을 주고받는 분들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헌신적인 분들이었지만, 쉽게 다가가기에는 어려운 어른들이었다.

  아빠 얼굴에 수심이 깊어 보이는 날이면 어렸던 나는 왜 그런지 물어보는 대신 베란다에서 줄담배를 피는 아빠에게 다가가 담배연기로 만든 도넛을 보여 달라고 졸랐다. 아빠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도넛을 뻐끔뻐끔 만들어주었다. 그리곤 방으로 돌아가 TV를 보거나 혼자 책을 읽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의 컨디션은 나의 작은 행동에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 눈치껏 가늠할 수 있었지만, 무엇이 그리도 엄마를 불편하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친구네 엄마는 시시때때로 어린 나와 친구에게 미주알고주알 푸념을 늘어놓았는데, 정작 우리 엄마는 어떤 고민을 하고 사는지 내게 들려준 적이 없었다.

  아주 가끔 엄마가 인적이 드문 숲속에 비밀장소처럼 숨겨져 있는 기도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곤 했었다. 해 질 녘까지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묵상기도를 드리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님은 알고 계시겠구나 안심이 되기도 하고 한편 질투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들이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들을 서로에게 짐 지우지 않으려는 배려와 사랑으로 알았다. 그렇게 사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가족의 질서에 적응하고 따랐다.

  하지만 때때로 적막했고 때때로 그 시간이 까마득한 벽처럼 느껴졌다. 의지하던 부모님이 내가 모르는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 머무를 때면 마치 나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처럼 불안했다.

  어른들만 알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어린 나는 함께할 수 없는 거라 스스로 위안 삼았지만, 그건 어른이 되어도 닿을 수 없는 개개인의 영역이었다. 그 사이에 간극이 내게는 너무나 멀게 느껴져 외로웠지만 외롭다 말하지 못했다. 그 부모의 그 딸내미답게 나 또한 속마음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나 혼자 정리해야 할 몫으로 가져갔다.

  나는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 적적함을 인생은 혼자 사는 거란 말로 대신하였고, 다들 이 정도의 거리감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건 줄로만 알았다.

  바래고 무뎌진 마음들은 여행을 통해 가차 없이 들추어졌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난 채워지지 않는 오랜 갈증을 느꼈다.

  내가 유난스러운 걸까? 모두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데, 나만 유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닌가 스스로를 들볶았다. 이 가족을 26년이나 겪고도 나는 여전히 적응 중이었다.



 






학교를 떠난 19세 고3 동생
교회를 떠난 53세 목사 엄마
밭을 떠난 55세 농부 아빠
집을 떠났던 26세 오춘기 나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1년 간의 유럽가족여행기는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옵니다.

사진은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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