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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Mar 27. 2019

#19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보름이 지나고 미리 계획했던 일정에 맞게 우리는 다음 여행지로 건너왔다. 겉보기에는 바로 전에 머물었던 레드필드 공동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공간은 더 넓었지만 빈방이 많았고, 구성원은 50~60대로 연배가 높았다.

  금발 머리 절반이 허옇게 물든 할머니께서 차를 내주셨다. 그때까지 우리는 영국식 전통 스토브에 장작을 넣고 찻물을 데우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한 가족이 다 같이 여행을 하게 된 거예요?”


  할머니는 홍차에 우유를 따르며 말했다. 


  “여기가 첫 방문지예요?”


  할머니는 우리에게 궁금한 게 많은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또 물었다.


  “여긴 네 번째에요.”


  “아~ 이미 여행을 꽤 한 상태구나!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이름이 수빈이의 영어 이름과 똑같은 할머니 루시는 으레 처음 만나면 하게 되는 예상 범위의 질문들을 계속할 심상으로 보였다. 어쩜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해대는지. 나는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앵무새처럼 말하는데 이골이 난 상태였다. 

  누가 나 대신 대화 좀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우리 넷만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로 낮게 속삭였다.


 “야. 박수빈. 말 좀 해봐.”


  언어담당을 하기로 했던 동생은 괘씸하게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뭐…. 딱 어디가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네요. 다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죠. 근데, 루시는 여기서 산 지 얼마나 됐어요?”


  대화가 지루하게 느껴지면 질문을 가로채는 게 상책이었다.


  “한 20년 넘은 거 같은데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루시는 여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앞마당에서 큰 축제를 벌이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는 이야기를 추억 삼아 들려주었다.


  “벌써 옛날 일이네요. 우리도 늙었어요. 조용할 일밖에 없죠.”


  과연 루시의 말처럼 이곳은 한낮에 문 여닫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막했다. 창밖에 마당을 노니는 한 마리의 늠름한 수탉과 아홉 마리의 암탉들도 정지된 장면처럼 보였다.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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