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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첸 Mar 23. 2019

#18  나 여기 있어요.


   꿀벌의 날갯짓이 들리는 오후, 이 꽃 저 꽃 비집고 돌아다니는 벌들이 봄소식을 전했다. 오전에 멘디와 라벤더를 심고 오후에 일이 없다는 희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방안에서 혼자 심심했다.

  노트북을 켜고 메일을 확인했다. 친구에게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으면 그 전날에 읽었던 같은 편지를 또다시 읽었다. 여행 중 유일한 낙이 한국에서 온 메일 읽기라니.

  다음 순서로 페이스북을 열어 지인들의 소식을 훔쳐보곤 했다. 그러다 더 볼 게 없어지면 드라마를 감상했다. 이렇게 지내는 나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정신없이 뭔가 하나에 빠져있어야 했다.

  나는 답답한 내 숨통을 트게 해줄 멋진 것을 찾아 헤매었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주제로 토론하거나 자신이 요즘 겪고 있는 어려움을 나눈다거나, 아무쪼록 연결된 느낌을 갈망했다.

  하지만 레드필드는 서양 특유의 독립성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공동체라면 끈끈한 결사체 같을 것이라는 내 예상을 비켜나갔다. 공동의 이벤트들도 있지만, 개별적인 생활 영역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우퍼(WWOOFer)들이 활동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여유시간도 많았다.

  일정 정도 나의 책임이 있다면, 첫째, 영어실력이 부족했다. 둘째, 영어실력이 부족하니 대화에서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저러나 먼저 나에게 다가와 주는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 오겠거니 피아노로 감성적인 연주며 클래식, 유명 영화 OST에 애절한 감정을 담아보아도 봄볕에 일광욕하는 새들끼리만 시끄러웠다.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주경야필. 일하는 날에도 저녁만 되면 글을 썼다. 친구랑 운영하는 작은 온라인 저널에 한 달에 두 번씩 여행기를 연재했다. 나는 여행하러 온 건지 여행기를 쓰러 온 건지 의문일 정도로 방에 박혀 글을 썼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 여전히 농사지어요’, ‘아직도 공동체적인 삶을 꿈꿔요’, ‘나 여기에 있어요’ 하고 사람들에게 외치며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일이었다. 미처 두고 온 것들이 많아서일까.                    







  자주 연주하던 악보집을 동네 헌책방 검붉은 피아노 위에 두고 와서일까. 먼 여행 떠난다고 옆집 할머니에게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하고 와서일까. 여행하는 내내 마음은 늘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일구던 농장에 가 있었다.

  추운 겨울 잘 견디라고 밭이랑마다 덮어준 볏짚이며, 아침마다 자전거로 오가던 벚꽃 길 모두 두고 온 것 같았다.

  그리운 농장이 있는 마을은 내게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복지부장으로 활약하며 농촌 지역복지에 뜻을 두고 서울 모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가서도 운동권 학생회의 판에 박힌 농활을 바꾸고 싶어 농(農)과 촌(村)을 배우는 교육 농활을 기획해 마을로 수십 명을 데려갔다. 하물며 학과를 졸업하기 위해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실습도 교수님을 설득하여 일반 종합사회복지관을 가지 않고 농촌 복지를 배우러 마을에 왔다. 그 후 마을에서 일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농장에서 일하게 될 무렵, 엄마는 돈도 얼마 못 받는데 먹고살 수 있겠냐고 전화기 너머로 물어보았지만 난 내가 알아서 잘 살겠다고 전화를 뚝, 그동안 받던 용돈도 뚝 끊었다. 자주 심심한 밤에 초가집에 혼자 앉아 눈만 껌뻑이느라 외롭기도 했지만, 오래전부터 로망이었던 농사를 짓는다니 그까지 건 꿀꺽 삼켜낼 수 있었다.

  도시 촌년 시골살이 안내해주랴 싸움 상대해주랴 나 때문에 폭삭 늙은 친구 1, 저만치 남은 삽질이 까마득해질 때면 달큼한 포도 효소를 타 오던 친구 2, 깜빡하고 놓친 일들을 살포시 뒷정리해주던 친구 3, 밭일을 놀자판으로 만들어 한참을 웃게 만들던 친구 4와 친구 5. 해가 뜨고 지는 모든 날에 우린 밭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여름 아이스크림 던져놓고 도망가던 이웃 형님, 명절마다 집에 가져가라고 한 주머니 든든히 챙겨주시던 빵집 언니, 일 좀 그만하고 쉬었다 하라며 밭 건너편 마을 학교 선생님의 걱정 소리도 있었다. 편지 끼워 책 선물해주시던 동네 출판사 사장님도 그리웠다. 어서 돌아가 ‘잘 다녀왔습니다’ 꾸벅 인사드리러 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19세 여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고,
53세 엄마는 교회를 그만두고,
55세 아빠는 밭을 맡기고,
26세 나는 가족과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려운 가족(이라는)여행
성질부리는 큰 딸이 302일 간 기록합니다.

매주 수요일&토요일에 만나요! :D

숨겨둔 장면은 여기에서
https://www.instagram.com/travel_of_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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