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릴 때는 내가 갑인데 빌려주고 나면 네가 갑이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면 안 되는 이유

by 김선비

지인을 사기죄로 신고했다. 30만 원을 빌리고 갚지 않아서 신고했다. 나는 솔로에 출연한 이후 알게 되어 한 번 같이 밥을 먹은 사이인데 어느 늦은 밤 갑작스럽게 전화를 하더니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했다. 그런데 병원비가 딱 30만 원이 부족하니 30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이틀 뒤에 월급이 들어온다고, 그 때면 갚을 수 있다고 했다.


믿지 않았다. 덥수룩한 수염에 나보다 여섯 살이 어리지만 더 들어보였던 외모, 그리고 다리까지 새겨져있던 문신, 코인 트레이더라는 직업, '제약 영업하면 그래도 1억 이상은 벌지 않아요?'하며 은근히 무시하는 듯하던 말투. 도저히 신용할 구석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돈이 많다던 사람이 단돈 30만 원이 없어서 나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도 도무지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는 걸 사실대로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곧 당신은 30만 원에 부모를 팔아넘기는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했다. 경찰에도 연락해봤다. 혹시 이런 식의 신종 피싱이 있냐고. 경찰은 피싱은 아니라고 했다. 피싱은 내 금융 정보를 빼돌리는 건데, 송금만 하는 걸로는 금융 정보를 빼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라 했다. 다만, 그 30만 원을 갚지 않을 수는 있다고 했다. 나는 아무려면 30만 원에 부모를 팔지는 않지 않겠냐, 그는 나에게 민증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다, 했지만 경찰은 세상에는 별 놈들이 다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30만 원 버리는 셈 치기로 했다. 그가 한 말이 진담이라면 나는 30만 원에 평생 나를 지지해줄 사람을 하나 얻는 것이고(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이 날 지지해준들 무슨 도움이 크게 될까 싶다.) 거짓이라해도 그냥 불우이웃 도운 셈 치기로 했다. 좋은 일 하면 언젠가 돌려받는다지 않는가.


내가 돈을 보내자 그는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다고 했다. 다음날에도 연락해서 친구가 급전 100만 원을 빌려주었다며, 예정보다 빨리 갚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1달이 넘는 동안 생각날 때마다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 있었고, 최근에는 켜져 있었는데도 받지 않았다. 3일 내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신고했다. 어른들이 돈 함부로 빌려주지 말라고 했던 게 이런 뜻이구나 싶다. 나는 건전한 재정 상태를 갖고 있다. 서울에 대출 없이 집을 산다거나, 파이어족이 된다거나 할 정도의 돈은 없지만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차곡차곡 돈을 모아 왔다. 그러니 30만 원 정도의 돈은 언제든 빌려줄 수 있다. 하지만 30만 원이 없는 남자의 삶이라는 건 뻔하다. 막 살아온 것이다. 착실히 살아오며 실력과 평판, 잔고를 쌓아온 게 아니라 요행에 의지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앞으로도 돈이 없을 것이다. 그가 했던 말 자체가 거짓이었다, 나에게 갚을 의지 자체가 없었다, 라고 까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이 살 것이며, 앞으로도 30만 원이 없어 주변에 손을 벌릴 거라는 건 확실하다. 그나마 친구라 할 관계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친구한테 돈을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는데 이번엔 돈만 잃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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